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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75화 (74/556)

난 할 수 있어 75화

유채경과의 약속이 있어 대찬도 짐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장님, 저도 퇴근하겠습니다.”

“어, 그래. 내일 보자고.”

이미 주어진 업무는 다 처리한 터, 송희근 과장은 선선히 대찬을 먼저 보내 주었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면서 허운 쪽을 한번 흘끗 바라봤다.

절망에 휩싸인 허운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잔뜩 낀 듯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대찬의 자리를 보던 유채경도 그가 퇴근하자 짐을 챙겨 일어났다.

“과장님, 퇴근하겠습니다.”

신입들에게 앙금이 남은 1팀의 구용표 과장은 눈만 한 번 흘기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채경은 짐을 챙겨 일어났다.

대찬과 유채경은 시선을 교환했다.

둘이 따로 자리를 갖는다는 게, 실제로 별 감정이 없는 자리라고 해도 회사에서는 쓸데없는 상상력을 발휘해 헛소문을 양산해 내기 마련이다.

둘은 회사 정문을 통과하고도 한참 더 걸어가고 나서야 아는 척을 할 생각이었다.

유채경이 자리를 뜬 것을 보고 1팀의 우민호 주임이 서원웅을 바라보며 웃었다.

“서원웅 씨, 우리도 갈까?”

“아, 예, 주임님.”

우민호 주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구용표 과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과장님, 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구용표 과장과 우민호 주임은 수상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서원웅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물거품으로 돌아간 소개팅 때문에 잔뜩 속이 상하는 와중에도 허운은 나란히 걸어가는 우민호 주임과 서원웅을 의식했다.

‘뭐야, 저 둘? 선약 있다는 게 우 주임하고의 약속이었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허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곧바로 대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서원웅 씨 선약이 우민호 주임하고 따로 만나는 거였나 봐.

회사 정문을 통과하던 대찬은 허운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우민호 주임……?’

대찬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화장실에서 본의 아니게 엿들었던 대화와 버무려져 더 혼란스러웠다.

물론 우민호 주임이 주눅 든 부하 직원을 살뜰히 챙기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이 상황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전제는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대찬이 우민호 주임의 성품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찬이 제자리에 선 채로 꿈쩍도 하지 않자, 보다 못한 유채경이 다가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아, 채경 씨.”

“나랑 단둘이 술 마시는 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에요?”

“그거 때문이 아니에요.”

유채경은 살짝 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뭔데요?”

“우리, 조금만 있다가 움직여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럴 사정이 있어서 그래. 혹시 우민호 주임님 자차 있어요?”

유채경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뜬금없는 말씀만 하시네요. 네, 있어요.”

“지하 주차장에 있겠죠?”

“그렇겠죠. 갑자기 우 주임님 얘기는 왜 꺼내는데요?”

“아, 글쎄 일단은 묻지 마시고.”

대찬은 유채경의 손목을 이끌고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대찬은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차량이 빠져나오는 출입구 근처에 은신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유채경이 툴툴거렸다.

“나랑 술 마시기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해요. 이게 뭐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뭐냐니까요!”

대찬은 쉿,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그때 출입구 앞에 있는, ‘출차 주의’라고 쓰인 경광등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빛을 뿜었다.

잠시 후, 경차 1대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유채경이 그걸 보고 말했다.

“우 주임님 차예요.”

그러자 대찬은 구부린 몸을 펴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유채경에게 말했다.

“채경 씨.”

“네?”

“나랑 영화 하나만 찍읍시다.”

“여, 영화요?”

대찬의 말에 유채경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영화라니.

유채경은 대찬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남자는 무슨 영화를 찍자고 하는 걸까?

멜로?

로맨스 코미디?

아니면 에로……?

에로는 좀 급한데…….

유채경이 상상의 날개를 펴는 와중에 대찬이 말했다.

“우리 격정…….”

“격정……?”

격정이란 말에 유채경의 동공이 커졌다.

격정 멜로?

격정 에로……?

이건 너무 야한데.

유채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대찬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격정 추격 액션 영화 한 편 찍읍시다.”

“…에?”

유채경은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대찬은 유채경의 손목을 잡고 급하게 이끌어 택시를 잡아탔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빛을 쏘면서 기사에게 말했다.

“저 차 좀 따라가 주세요.”

비장한 목소리에 택시 기사도 무의식적으로 바짝 핸들을 잡았다.

택시 기사는 영문도 모른 채 우 주임의 차를 쫓기 시작했다.

더 영문을 모르겠는 건 유채경이었다.

단둘이 술 마시기로 해 놓고 갑자기 택시를 잡아 직장 상사를 미행한다.

당최 상황 파악이 안 됐다.

유채경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대찬 씨, 최소한의 설명을 해 줘야죠.”

“아무래도 우리 불쌍한 입사 동기가 신경 쓰여서 말이죠.”

“네?”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물론 헛다리 짚은 걸 수도 있는데.”

“대체 무슨……!”

우 주임의 차량은 도심의 한 일식집 앞에 멈췄다.

그에 따라 대찬도 택시를 세웠다.

대찬은 일식집 외관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주임이랑 신입 사원 단둘이서 먹기에는 너무 거창한 식당인데.”

척 봐도 한 끼에 1, 2만 원 하는 식당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민호 주임과 서원웅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나와 공손히 그들을 맞았다.

그를 발견한 유채경의 눈이 커졌다.

“어? 태원수산 사장님인데?”

“태원수산이요?”

유채경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대찬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PL존에 건어물 제품 납품하는 업체예요.”

PL존은 필래유통 산하의 편의점 브랜드였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사장님 얼굴만 보고 태원수산인지 알아요?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업체가 한두 군데가 아닌데.”

“아, 태원수산 계약 만료가 임박한 상황이어서요. 태원수산 쪽에서 우리 회사로 많이 찾아왔거든요.”

“왜 영업부가 아니라 우리 부서한테 와서 청탁을 넣을까요?”

대외협력부에서 일한 기억이 또렷한 대찬은 굳이 유채경에게 듣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협력업체들 사이에서 우리 팀이 청탁전문창구로 유명한가 봐요. 팀장님이 받은 만큼 확실하게 힘을 써 주신다고. 영업부하고 워낙 막역하시니까.”

“태원수산과 재계약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나요?”

“매출이 부진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가 보고서를 잘 써 주면 그나마 가망이 있으니 많이 추근거렸죠.”

“재계약이 불투명한 협력 업체 사장을 고급 일식집에서 따로 만난다, 이상하네요.”

유채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미팅도 아니고 우 주임님이랑 원웅 씨만 저렇게 만나는 건 수상하죠. 저런 자리에 서원웅 씨가 동석한 건 더 이상해요.”

“수상해, 수상해.”

대찬은 저쪽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로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유채경이 듣기에는 속삭이는 목소리가 비밀 연애를 하는 듯 감미롭게 들렸다.

대찬이 유채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휴대폰 기종이 뭐예요? 좋은 거 쓰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유채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그러다 대찬이 대답을 종용하자 대꾸했다.

“그럼요. 이래 봬도 전 얼리어답터거든요. 햅틱2!”

“옴니아가 아니군요. 다행입니다.”

“근데 갑자기 왜…….”

대찬은 유채경의 당대 최신형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왜 찍으시는 거예요?”

“필요하니까요.”

대찬은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나서 택시에서 내렸다.

그는 들키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면서 우민호 주임과 서원웅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면서 유채경에게 말했다.

“계약 만료를 앞둔 업체 사장과 고급 일식집에서 만난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한 향응이에요.”

“향응…….”

“우리 회사는 협력 업체로부터의 향응 수수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요, 사규로.”

태원수산 사장은 우민호 주임과 서원웅을 방 안으로 인도했다.

대찬은 그 옆방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받았다.

“역시 한 가락 하는 값이네.”

가격대가 꽤 높았다.

자리를 잡았으니 음식을 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초밥 정식 \ 30,000(1인분)

모둠사시미 정식 \ 46,000(1인분)

가이세키 정식 \ 82,000(1인분)

대찬이 첫 번째 삶을 영위하던 마지막 시기인 2019년을 생각해 봐도 싼 값은 아니었다.

2008년 현재로서는 신입 사원에게 더욱 부담스러웠다.

값싼 정식을 시키려다가 유채경의 눈치를 흘끔 봤다.

체면이 있지.

“…가이세키로 2인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유채경이 한마디 보탰다.

“소주도 1병 주세요.”

“여기 먹으러 온 거 아니에요. 술은 더 아니고요.”

“아니, 술 없이 회를 무슨 맛으로 먹어요?”

대찬은 반박하지 못했다.

거금이 삽시간에 날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건수를 올리겠다고 대찬은 다짐했다.

돈값 하는 회를 우물거리며 대찬은 벽에다 귀를 댔다. 말소리까진 들리지 않지만 간혹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찬은 벽에 귀를 댄 채로 유채경에게 말했다.

“채경 씨.”

“네?”

“지금 배고프시죠.”

“…네.”

“그럼 혼자 좀 들고 계세요.”

그 말에 유채경은 황당했다.

“이걸 어떻게 혼자 다 먹어요?”

“다녀와서 나도 먹을 거예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밖에서 머뭇거렸다.

귀는 오롯이 태원수산 사장과 우민호 주임, 서원웅이 있는 방에 집중했다.

벽에 귀를 대고 듣는 것보다는 말소리가 더 잘 들렸다.

그러나 역시 온전하지는 않았다.

대찬이 답답한 표정으로 그 앞에 서 있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손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아뇨. 지금 전화 기다리는 중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네.”

그때 방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태원수산 사장의 목소리였다.

“그럼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이구, 그럼 저도…….”

이건 우민호 주임의 목소리.

말소리가 들리자마자 대찬은 헛기침을 하며 잰걸음으로 빠르게 자리를 떴다.

먼저 화장실에 도착해 좌변기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녹음기를 틀었다.

잠시 후, 적잖이 술기운이 오른 태원수산 사장과 우민호 주임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모쪼록 계약 연장이 되도록 신경 좀 써 주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섭섭지 않게 갚겠습니다, 우 주임님.”

“아, 뭐 제가 힘닿는 데까진 도와 드리겠습니다만.”

우민호 주임이 한 발 빼자 태원수산 사장의 목소리가 더 간곡해졌다.

“그러지 마시고 확실하게 밀어 주십시오.”

“윗선에서 압력이 들어오면 저라고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사장님은 윗선을 만족시켜야 해요.”

“될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어흠, 그럼 제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 드릴까요?”

태원수산 사장은 바짝 엎드려 굽실거렸다.

“알려만 주십시오. 똥밭에라도 구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말이죠…….”

우민호 주임은 꽤 품을 들여 태원수산 사장에게 방법을 설명했다.

그 말이 이어질수록 대찬의 동공이 커졌다.

녹음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 대찬은 화장실에 한참 더 머무르다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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