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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74화 (73/556)

난 할 수 있어 74화

대찬은 복도에서 그를 불러 세웠다.

“원웅아.”

서원웅은 뒤를 돌아 대찬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휙 돌려 외면했다.

대찬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서원웅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원웅아, 네 맘 어떨지 나도…….”

“이거 놔.”

서원웅은 매몰차게 대찬의 손길을 뿌리쳤다.

순간 너무 매정했다고 느꼈는지 서원웅이 흠칫 놀랐지만, 끝내 대찬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대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찬은 멍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건 조 선생이 좀 이해해.”

“…형.”

어느새 다가온 허운이 대찬의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

“오죽 힘들겠어. 나였으면 이미 때려치웠을지도 몰라.”

“…….”

“그러니까 너도 너무 상처받거나 하지 마.”

“…내가 상처받을 일은 아니지.”

대찬 역시 서원웅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첫 번째 삶의 대찬은 유백기에게 저것보다 심하게 당했으면 당했지, 덜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보다 덜 괴롭다고 안 괴로운 건 아니다.

대찬은 서원웅의 의지가 이대로 뚝 끊어져 버리진 않을까 걱정했다.

솔로몬이 남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말은 대개 잘 들어맞는 불후의 명언이다.

하지만 당장 힘든 사람에게 그 명언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도리어 절망을 부채질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침묵의 방관이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대찬은 무거운 마음으로 서원웅의 마음이 추슬러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루에도 열두 번씩 구용표 과장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터.

서원웅의 마음은 회복될 말미를 얻지 못하고 번번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럴 때마다 눈치 없는 송희근 과장은 대찬을 띄워 주기에 바빴다.

오죽하면 참다 못한 한태윤 대리가 송희근 과장에게 쓴소리를 했다.

“과장님, 칭찬은 좋지만 때를 좀 가려 주시죠.”

“치, 칭찬에 때가 어디 있다고 그러나! 어, 어흠.”

송희근 과장은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한심한 칭찬 세례를 관뒀다.

하지만 대찬과 서원웅의 사이는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져 버렸다.

“우리 서원웅 씨, 나랑 오랜만에 술 한잔할까요?”

“내가 지금 술 먹게 생겼습니까?”

넉살 좋은 허운이 윤활유 역할을 자처했지만 서원웅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허운은 유채경에게도 SOS를 요청했지만, 유채경 역시 이 난리 통에서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서원웅과 도매금으로 묶여 매도당하는 현실에 유채경은 기진맥진하고 만사가 짜증날 뿐이었다.

‘답답하네.’

대찬 역시 담배가 부쩍 늘었다.

세수를 하러 자주 화장실에 들르기도 했다.

찬물로 얼굴을 씻으면 그나마 복잡한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효과는 단발적이었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대찬도 지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놈의 티슈는 매일 동나 있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대찬은 아쉬운 대로 좌변기에 걸려 있는 휴지라도 이용할 요량이었다.

대찬이 변기 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웅 씨, 요즘 힘들지?”

‘음?’

서원웅의 이름이 들리자 대찬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대찬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서원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조금.”

“조금은 무슨. 요즘 원웅 씨 얼굴이 말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고. 보기 안 좋아서 하는 말이야.”

대찬은 변기 커버를 내리고 좌변기에 앉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목소리더라…….’

잠깐 고민하던 대찬은 곧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우민호 주임.

서원웅과 같은 1팀 소속이었다.

서원웅은 조금 기운을 차린 목소리로 우민호 주임의 말에 응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선배로서 당연한 건데.”

“주임님께 누가 안 되도록 더 열심히 할게요.”

“그래, 열심히 하자, 우리. 나도 원웅 씨 열심히 도울게.”

서원웅과 우민호 주임의 대화는 대찬이 샘날 정도로 다정했다.

‘뭐지, 우 주임.’

대찬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민호 주임의 저 상냥한 태도가 의심스러웠다.

‘내가 아는 우민호 주임은 저렇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우민호 주임은 냉정한 축에 속했다.

게다가 서원웅이 곤란에 처한 이유가 서청규 사장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우민호 주임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서원웅의 역성을 드는 건 사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이었다.

그런 부담마저 감수하고 서원웅을 감싸고 돌 우민호 주임이 아니었다.

‘굿 캅, 배드 캅 전략일까.’

협박이 있으면 회유가 있고, 채찍이 있으면 당근이 있는 법이다.

죽일 듯한 기세로 몰아붙이는 경찰, 그러니까 배드 캅이 있다면 뒤에서 좋은 말로 다독이는 경찰, 그러니까 굿 캅이 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상대에게 뭔가 얻을 게 있는 경우에만 성립한다.

서청규 사장은 서원웅을 최대한 가혹하게 다뤄서 그가 회사에서 더 버티지 못하기를 바란다.

어르고 달래는 굿 캅은 이 과정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민호가 왜 이 타이밍에서 집적거리냔 말이야.’

서원웅에게 잘 보여서 회장님 환심을 사 보려고?

그럴 리는 없었다.

필래유통은 서청규의 소왕국이고, 서청수 회장의 입김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청수 회장에게 잘 보이고자 서청규 사장의 눈 밖에 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뭐지…….’

대찬이 손톱을 뜯으며 고심하는 동안, 서원웅을 다독이는 우민호 주임의 목소리가 문 밖으로 멀어졌다.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 이 기분을 달랠 방법이 많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방법 중에 가장 간편한 것이 흡연이었다.

대찬은 담배 한 개비를 뽑아 간이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다 유채경과 맞닥뜨렸다.

“어, 채경 씨.”

“…대찬 씨.”

유채경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대찬 역시 유채경이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대찬이 서원웅을 필래유통으로 끌고 왔기 때문에 유채경까지 한데 묶여 된통 당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채경의 저기압에 대찬이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찬이 어색한 웃음을 짓자 유채경도 웃었다.

“대찬 씨 속도 많이 상하셨겠어요.”

“그래도 저야 옆집이잖아요. 채경 씨만 할까요.”

유채경도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뭐 아주 힘들진 않아요. 제가 실수한 것까지 과장님이 전부 서원웅 씨한테 뒤집어씌워서. 서원웅 씨가 제일 힘들죠.”

“답답한 노릇이네요.”

유채경은 대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대찬은 광대를 긁으며 겸연쩍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대찬 씨 그런 표정 처음 봐서요. 속이 꽉 막힌 표정.”

“바로 보셨네요. 지금 아주 속이 꽉 막혀 죽겠어요.”

“대찬 씨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긴 하지만 자신만만하셨잖아요. 항상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허세예요. 자신만만한 날보다 조마조마한 날이 더 많은걸요. 요즘엔 더 그렇고요. 원웅이 일 때문에.”

“우리가 서원웅 씨한테 해 줄 게 많진 않잖아요?”

대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기껏해야 술이나 사 주면서 다독이는 정돈데… 그럼 자리라도 한번 마련해 볼까요?”

“요즘 원웅이가 저한테 워낙 쌀쌀맞아서. 채경 씨가 주도하면 또 다를 것 같긴 해요.”

“원웅 씨가 종종 저한테 미안해하시던데, 제가 부르면 나올 거예요. 제가 자리 한번 만들게요.”

그제야 대찬은 편히 웃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시간 다 비워 놓을게요.”

“좋아요! 이번 주 목요일 어때요? 금요일은 다들 일정 있을 테고, 주말에 회사 사람 만나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나마 만만한 게 목요일이니까.”

“좋습니다, 목요일.”

유채경은 의욕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의욕은 초장부터 산산이 깨졌다.

대찬은 휴게실에서 허운과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은근히 목요일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마자 허운은 얼굴을 찌푸렸다.

“목요일? 왜 하필 목요일이야.”

“왜, 뭐 일 있어?”

“있지. 대박 큰일 있지.”

대찬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뭔데?”

“소개팅이 들어왔는데, 내 스타일이야. 대박 내 스타일.”

대찬은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형 소개팅 타율 얼마나 되는데?”

“타율? 이종범 뺨치지.”

“암튼 맘에 안 들어.”

“유채경 씨는 된다던?”

“이 자리 채경 씨가 먼저 제안했어.”

허운은 불만스럽게 콧잔등을 씰룩였다.

“내가 이러니까 소개팅을 하지.”

“무슨 뜻이야?”

“유채경 씨가 나한테 조금만 마음 열어 줬어도 안 했어. 그저 조대찬이라면 좋아 갖고 막. 나한테는 눈 희번덕거리고. 이번에도 너한테 얘기해서 자리 만든 거 아냐?”

“억지야.”

허운은 불만에 찬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연수원 때부터 그랬어. 유채경이 너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상상력 한번 대단하시다.”

서원웅에게 알리기도 전에 허운 때문에 자리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때 유채경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무래도 목요일은 꽝인가 봐요. 선약이 있으시대요.

“선약……?”

대찬은 의아했다.

서원웅은 보통 퇴근하고 바로 귀가했다. 약속이 있어도 대개 대찬이 낀 대학 동창들과의 자리였다.

그러니까 서원웅에게 선약이란 이례적이었다.

‘원웅이라고 선약이 없으란 법은 없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허운은 유채경의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입가를 씰룩였다.

“서원웅 씨 계속 빡빡하게 구네.”

“원래 이런 친구가 아닌데.”

“됐어! 선약이 있나 보다, 그러고 끝내자고. 그게 서로 맘 편해. 그래야 나도 소개팅에만 집중하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대찬은 못 미더운 시선을 허운에게 보냈다.

허운은 얄미운 웃음을 지으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대찬은 차가운 커피로 속을 식혔다.

그러면서 유채경에게 답장을 보냈다.

-운이 형도 목요일 안 될 거 같다고 하네요. 다음에 봐야겠다.

그러자 몇 분 후, 유채경에게서 답장이 왔다.

-목요일에 우리 둘이라도 술 마실래요?

대찬은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그래요.

* * *

목요일.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허운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2팀 상사들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먼저 퇴근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2팀 팀장인 오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허운아, 형님들 아직 일하시는데 의리 없이 먼저 가기 있냐?”

“아, 하하… 제 일은 다 끝냈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러자 2팀 박 대리가 툴툴거렸다.

“2팀은 일심동체! 다 같이 끝내고 다 같이 퇴근해야지.”

“…….”

그들과 쿵짝이 잘 맞는 곽 주임이 허운의 속도 모르고 나팔을 불어 댔다.

“오늘 목요일인데 간단하게 한 잔 똑, 어떠십니까?”

술이라면 환장을 하는 오 과장, 박 대리의 대답은 들어 보나 마나였다.

술 얘기가 나오자마자 오 과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거 좋지! 내가 요즘 눈여겨보던 태국 음식점 있는데 거기 어때? 똠양꿍이 죽인대!”

‘똠양꿍은 니미럴!’

허운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는 최대한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저도 똠양꿍 진짜 좋아하는데, 오늘 약속이 있어서…….”

“우리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야? 엉?”

오 과장의 목소리는 벌써부터 빈정이 상해 있었다.

“다, 당연히 그건 아니죠…….”

“그럼 그 약속 미루고 우리랑 술 먹어!”

“…….”

“대답!”

“…네…….”

“형님들 일 마무리할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허운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원석 대리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과장님! 저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어어, 그래. 들어가 봐.”

“넵.”

천원석 대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퇴근하면서 허운을 바라봤다.

킬킬 웃는 얼굴은 허운과 대조적이었다.

퇴근이 좌절된 허운을 놀리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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