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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73화 (72/556)

난 할 수 있어 73화

대찬은 한태윤 대리가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맞춰 탕비실로 갔다.

우연을 가장해 한태윤 대리와 마주쳤다.

“아, 대리님.”

“조대찬 씨.”

“마침 저도 커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대리님 것도 하나 타 드릴까요?”

“부탁할게요.”

대찬은 한태윤 대리의 취향대로 종이컵에 커피를 타며 말했다.

“대리님,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하세요.”

“중년 남성 건강에 좋은 선물이 뭐가 있을까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한태윤 대리는 어정쩡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왜 물어봅니까?”

“이번에 첫 월급 들어온다고 오늘 가족들이 작은 파티를 열어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래서 저도 가족들한테 보답을 하려는데, 아버지께 드릴 선물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머리로는 잘 안 떠올라서 말입니다.”

“효자시네요.”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기브 앤 테이크인데요, 뭐.”

“저 같은 경우엔 닭발즙 선물로 해 드렸는데요.”

“닭발즙이요?”

“네. 무릎 연골 상한 데 좋다고 얘길 들었거든요. 연세도 있으시니 무릎 건강도 관리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한태윤 대리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저도 오늘 가서 닭발즙 선물로 드려야겠네요. 커피 여기 있습니다.”

대찬은 유독 ‘오늘’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한태윤 대리는 커피를 받아 들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그렇게 대찬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백기가 말했다.

“과장님, 오늘 월급도 들어왔는데 회식 어떠십니까?”

대찬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대찬이 오늘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말을 들은 유백기는, 그걸 어떻게든 방해해 보려고 수작을 부릴 것이라 예상했다.

이른 귀가를 막는 가장 고전적인 명분이 야근 혹은 회식이었다.

대찬은 뻔할 뻔 자의 수작에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속내를 모르는 송희근 과장은 유백기의 제안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식? 회식 좋지.”

“오늘 회식은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한태윤 대리가 송희근 과장의 말에 반론을 폈다.

송희근 과장이 그를 바라봤다.

“어려워? 왜?”

“저희야 흔하게 있는 월급날이지만, 조대찬 씨에게는 아니지 않습니까?”

“응? 왜 아니야?”

“첫 월급날이잖습니까.”

“그런데?”

“아까 들어 보니 조대찬 씨 가족분들이 축하 파티를 준비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조대찬 씨를 술자리로 끌고 가서야 되겠습니까?”

대찬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한태윤 대리가 대찬의 변호인이 되어 주었다.

그에게 귀띔하지 않았더라면 대찬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회식 자리로 끌려갔을 것이다.

같은 말이라지만 상급자인 제3자가 전하는 것과 하급자인 당사자가 전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한태윤 대리가 그렇게 말하자 송희근 과장은 쩝, 입맛을 다셨다.

“조대찬 씨, 한 대리 말이 맞아?”

대찬은 한 대리가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 네. 모처럼 가족들이 마음을 써 주기로 해서요.”

“음.”

“회식을 다음으로 미뤄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대찬은 최대한 곤란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대고 곧 죽어도 회식을 해야 한다며 강짜를 부리는 별종은 정글 같은 회사에서도 드문 법이었다.

특히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는 송희근 과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유백기의 치사한 시비는 조기에 좌초되었다.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유백기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모처럼 제안해 주셨는데.”

“…됐어.”

대찬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만일 한태윤 대리가 아니라 송희근 과장이나 천원석 대리에게 귀띔을 했다면 결과는 사뭇 달랐을지도 모른다.

송희근 과장이야 눈치를 보다 뿐이지, 애초에 부하 직원을 살뜰히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천원석 대리였다면 더 적극적으로 회식을 추진했을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열어 주는 파티냐, 아니면 상사들이 적극 권하는 회식이냐, 딜레마에 빠뜨리는 상황을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인 한태윤 대리라면 자신의 역성을 들어 줄 것이라 대찬은 확신했다.

그렇게 대찬은 정시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회사 다녀왔습니다.”

“아이고, 수고 많았다.”

대찬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저녁 밥상을 보고 놀랐다.

“어머니가 더 수고하셨겠는데요.”

“이 정도 갖고, 뭘. 아들 보람찬 첫 월급날인데 이 정도는 힘을 줘야지.”

“너무 진수성찬이라 밥값을 안 낼 수가 없다. 자, 받으세요.”

대찬은 웃으면서 두툼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그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야, 이게?”

“뭐긴 뭐예요, 밥값이죠.”

아버지의 월급을 20년 넘게 관리해 온 관록으로, 어머니는 지폐의 두께만으로도 그 돈이 100만 원 가까이 된다는 걸 짐작해 냈다.

“밥값치고는 너무 많은데?”

“그리고 이거.”

대찬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냐?”

“양배추즙이에요. 하루에 한 포씩 꼭 드세요.”

“갑자기 웬? 양배추즙 비려서 싫다, 얘.”

“안 돼요. 꼭 드셔야 돼요. 제가 매일 검사할 거예요.”

“유난은.”

대찬이 신신당부하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두 번째 2000년으로 돌아오기 전, 어머니는 대수술을 마쳤다.

위암 수술이었다.

그걸 아는 이상 같은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스스로 돈을 버는 처지가 됐다.

말만 앞서지 않고 있는 힘껏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양배추즙을 시작으로 위 건강에 좋다는 건 무엇이든 할 요량이었다.

“꼭, 꼭 드셔야 해요. 알았죠?”

“그래. 알았어, 알았어.”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아들의 유난이 고마우면서도 황당할 뿐이었다.

대찬은 아버지의 것도 살뜰히 챙겼다.

“이건 아버지 거.”

한태윤 대리가 추천해 준 닭발즙이었다.

그걸 본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닭발을 즙으로 먹는대냐?”

“몸에 좋은 거라니까 아무 말씀 마시고 드세요.”

“원 참.”

그때 누나 조수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뭐 없냐?”

“누나 첫 월급날에 내가 뭐 받은 기억이 없는데?”

“야! 치사해!”

대찬은 흐흐 웃으면서 쇼핑백 하나를 안겨 주었다.

“에이, 주기 싫었는데.”

“역시, 내 동생!”

조수진은 얼른 쇼핑백을 낚아챘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누나는 아직 건강 챙길 나이는 아니니까 헤드폰 하나 비싼 걸로 샀어.”

클래식 마니아인 조수진 맞춤 선물이었다.

조수진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고마워!”

진심으로 기뻐하는 누나를 보고 대찬도 편하게 웃었다.

“자자, 아들 마음은 잘 받았으니까 빨리 밥 먹어라. 식을라.”

어머니는 웃으면서 자식들을 서둘러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자신은 밥술도 뜨지 않고 대찬이 사 온 양배추즙 상자만 보물 상자처럼 쓰다듬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여보, 밥 먹어. 고생고생 차려 놓고 당신은 왜 안 먹고 있어.”

“안 먹어도 배불러요.”

어머니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대찬은 어머니가 양배추즙을 챙겨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출근했다.

사무실의 풍경은 여느 때와 같았다.

대찬을 물 먹이려던 시도가 번번이 물거품이 되면서 유백기는 잠잠해졌다.

그렇기에 대찬의 3팀은 비교적 별 잡음 없이 잘 굴러갔다.

그런데 1팀과 2팀의 풍경이 사뭇 달랐다.

허운이 술을 매개로 팀에 잘 녹아들면서 2팀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반면, 작정하고 서원웅을 쥐 잡듯이 잡는 덕택으로 1팀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1팀의 팀장인 과장은 작정하고 서원웅을 잡았다.

티끌만 한 잘못은 태산만 한 꾸중으로 돌아왔다.

서원웅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고, 웃음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대로면 곤란한데…….’

이 정도로 노골적일 줄은 대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서원웅이 정말로 더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대찬은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당장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서원웅 씨, 회사가 우스워? 일 이따위로 하면서 월급 타 가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들이면 상사 명령 맘대로 흘려들어도 되는 거야?”

“절대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면 대체 뭔데? 왜 일을 이따위로 하는데?”

“제가 일머리가 좋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상사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일머리가 안 좋아서? 그게 변명이야? 오랑우탄도 이 정도 혼나면 서원웅 씨보단 잘할 거 같은데? 서원웅 씨 사람 아닌가?”

굴욕적인 꾸지람에 서원웅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린 마음에 눈물이 눈두덩에 고였지만 억지로 참았다.

이 마당에 눈물까지 흘린다면 완전히 짓뭉개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유채경이 나서서 서원웅을 변호했다.

“과장님, 서원웅 씨가 미숙한 부분도 있지만 지시하신 업무가 너무 타이트했어요.”

“넌 또 뭐야?”

“말미만 상식적으로 주셨어도 잘 해냈을 거예요.”

구용표 과장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짚었다.

“야, 그러니까 내가 몰상식했다는 거네?”

“그냥 제 의견입니다, 과장님.”

“내가 언제 네 의견 물어봤냐?”

“아니요.”

“그럼 닥치고 있어, 그냥.”

유채경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찬은 속으로 아찔한 기분이었다.

유채경은 서원웅을 도우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모닥불에 끓는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다.

유채경 때문에 성질이 더 난폭해진 구용표 과장이 서원웅에게 더한 폭언을 쏟아 냈다.

송희근 과장은 그 참혹한 현장을 곁눈으로 살폈다.

그러다가 어흠, 헛기침을 하고는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조대찬 씨.”

“예, 과장님.”

대찬은 반쯤 몸을 일으키며 송희근 과장의 부름에 응답했다.

‘이 와중에 왜 날 부르고 난리야.’

대찬이 속한 3팀과 지금 서원웅이 산산조각 나고 있는 2팀은 겨우 파티션 하나로 구분되어 있었다.

서원웅이 잔뜩 깨지는 소리가 3팀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자기를 부르는 송희근 과장의 목소리가 대찬은 이해되지 않았다.

송희근 과장은 해맑게 웃으며 대찬에게 물었다.

“조대찬 씨, 비상 연락망 갱신 완료했나?”

“예? 오전에 완료됐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아아, 그랬나? 그럼 코다(KODA) 정기 회의 부장님 발언 참고 자료는?”

“그것도 완료 후 메신저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아아, 그랬나? 하하, 요즘 이렇게 깜빡깜빡한다니까. 아무튼 조대찬 씨 대단하네? 시킨 일을 착착 잘 해내고 말이야.”

“…….”

대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붕어 대가리가 아니고서야 몇 가지 되지도 않는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일부러 깜빡한 척 하면서 대찬의 칭찬을 남 들으라는 듯했다.

2팀 팀장이자 송희근 과장의 동기인 구용표 과장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송희근 과장과 구용표 과장은 오랜 앙숙이었다.

구용표 과장은 송희근 과장을 은근히 무시하고 깔봤다.

거기에 송희근 과장은 항상 억하심정이 있었다.

그런 꽁한 마음을 품어 온 송희근 과장은 서원웅이 흠씬 두들겨 맞는 와중에 대찬을 칭찬하면서 소소한 복수를 했다.

너희 신입은 재활용 불가능한 구제 불능인데, 우리 신입은 이렇게 잘한다고 으스대는 것이었다.

그 얄팍한 속내를 아는 천원석 대리는 시시껄렁한 웃음을 걸쳤다.

그런데 이 한심한 공격이 구용표 과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구용표 과장은 송희근 과장의 말을 듣고 더 길길이 날뛰었다.

“어휴! 다 내 죄지, 내 죄야. 지은 죄가 많으니까 신입 뽑기 운도 이렇게 없어요!”

“…….”

서원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용표 과장 특유의 째지는 목소리가 사무실을 더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진짜 한 번만 더 일 이따위로 하면 더 두고 안 봐. 알았어!”

“…네.”

서원웅의 목소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떨렸다.

대찬의 마음이 한층 더 불편해졌다.

그는 서원웅의 자리를 계속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다 서원웅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자리를 뜨는 걸 보자마자 그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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