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72화
허운의 코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혀도 꼬부라져서 발음이 불분명했다.
“야, 동기 한번 잘 뒀다.”
“응?”
“네가 있어서 마음이 좀 편해.”
“술 들어가니까 인심이 후해지시네. 내가 해 준 게 뭐 있다고.”
대찬은 퉁명스레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미소를 지었다.
허운은 다시 거푸 술을 마셨다.
얼굴은 더 붉어지고 혀는 더 꼬였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마음이 편하다구. 마음이 편해. 네가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허운은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 얼굴을 박고 뻗어 버렸다.
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뭐야, 형, 취했어?”
“…….”
대찬은 허운을 몇 번 흔들었다.
요지부동이었다.
대찬은 한숨을 팍 쉬었다.
“술 먹고 뻗어도 알아서 치워 줄 테니까 마음이 편하다는 뜻이었어?”
대찬은 허운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운의 몸은 불린 미역처럼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사들하고 술로 친해지라고 괜히 알려 줬나. 이 피지컬로는 곤란한데.”
대찬은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처럼 허운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밤공기를 맞아도 허운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퓨즈가 나갔다.
대찬은 허운의 양볼을 쥐고 흔들었다.
“형! 집 주소만 불러! 주소만! 응?”
대찬이 그렇게 여러 번 큰 소리를 내고 나서야 허운은 겨우 옹알이하듯 중얼거렸다.
“장위동 220 다시…….”
“220 다시 뭐?”
“3…….”
대찬은 허운을 부축해 택시를 잡아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홀아비 냄새 풀풀 풍기는 자취방이었다.
“아휴, 환기 좀 하고 살자.”
침대에 널브러진 허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찬은 들어오자마자 창문부터 활짝 열어 젖혔다.
“우욱!”
그때 침대에 널브러진 허운의 몸이 꿈틀거렸다.
순간 대찬은 사색이 되었다.
“아, 제발 형…….”
“우우욱!”
“제발! 내가 잘못했어! 제발 삼켜 줘!”
“우욱!”
“삼켜! 개새끼야!”
우우욱, 허운은 끝내 참지 못했다.
‘우우욱’이 ‘우우욱’으로 끝나지 못하고 ‘웩’으로 끝났다.
허운은 치아에 잘게 부서지고 소화액에 곱게 녹은 노가리를 침대 위에 쏟아 냈다.
그것도 여러 번.
대찬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대찬은 무릎을 꿇고 그 위에 얼굴을 푹 숙였다.
하지만 그 자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반쯤 소화된 노가리 냄새는 참기 어려웠다.
해가 떴다.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도 허운은 요지부동이었다.
옷을 제멋대로 벗은 채로 침대를 독차지하고 단잠에 취해 있었다.
대찬은 따가운 눈빛으로 허운을 내려다봤다.
“아오, 진짜 형만 아니었으면.”
대찬은 꽁한 표정으로 그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가죽 때리는 소리와 함께 허운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얼른 일어나 씻어. 출근해야지.”
“아으……. 여기가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형네 집이지.”
그러자 허운은 벗은 상반신을 이불로 슬며시 가리며 수상한 눈초리를 보냈다.
“뭐야, 네가 왜 우리 집에 있어! 나한테 무슨 짓 했어!”
“꽐라 구제해 줬더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으, 알아서 끊었어야지…….”
그 말에 대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간밤에 무슨 생고생을 했는데……!”
“생고생이라니?”
“침대 커버 빨아, 와이셔츠 빨아, 아… 됐다. 말을 말자. 세탁기 갖다 버려. 토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니까.”
대찬은 허운의 와이셔츠를 매몰차게 던졌다.
“나더러 한 번만 더 술 먹자고 해 봐라. 아주 그냥!”
“헤헤.”
“헤헤는 무슨.”
진즉 준비를 마친 대찬은 허운이 씻는 동안 아침밥을 차렸다.
“이야, 콩나물 북엇국! 우리 엄마도 안 끓여 줬는데. 역시 대찬이 센스 있다니까.”
“맘 같아선 나만 먹고 싶은데, 해장 안 하면 출근길에 또 토할까 봐 주는 거야.”
“일부러 틱틱대기는.”
대찬과 허운은 개다리소반에 둘러앉아 북엇국에 밥을 훌훌 말아 먹었다.
대찬은 넥타이를 매고 허운의 자취방 문을 나서며 말했다.
“오늘 택시 타고 출근할 거야. 형이 내.”
내가 왜……!
허운은 그렇게 항의하려다가 이글이글 타는 대찬의 눈빛을 보고 말을 꿀꺽 삼켰다.
허운은 대찬의 조언대로 상사들과 제법 잦은 술자리를 가졌다.
그 이후로 오 과장이며 박 대리며 곽 주임이며 허운을 팀의 진정한 막내로 인정해 주었다.
이따금의 실수는 호탕한 웃음으로 넘어가 주었다.
“야! 진짜 네 말이 맞았어! 요즘 나 완전 예쁨 받는다니까!”
“너무 자주 마시지는 말고. 예쁨 받는 대가로 건강을 제물로 바쳐야 할지도 몰라.”
“알았어, 알았어. 야, 고마우니까 내가 술 한잔 살게. 어때?”
“절대, 다시는, 영원히 형이랑 술 안 마신다고 했을 텐데? 아직도 노가리 냄새 나는 거 같아.”
대찬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허운도 마땅히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하고 머쓱하게 뒤통수만 긁었다.
어찌 되었든 허운의 회사 생활 첫 고비는 그렇게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회사 생활에 애를 먹는 사람은 비단 허운뿐만이 아니었다.
서원웅의 처지는 허운보다 더했다.
“서원웅 씨, 일처리 이것밖에 못해요? 못하는 거예요, 안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다시 해 오겠습니다.”
“죄송하면 답니까? 나아지는 구석이 있어야 다시 해 오는 보람이 있지.”
서원웅이 속한 1팀의 분위기는 번번이 험악해졌다.
유채경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혼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간이 정원에서 대찬과 마주친 유채경은 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서원웅 씨 때문에 미치겠어요, 진짜.”
“원웅이 때문에요?”
“네! 맨날 서원웅 씨랑 엮여서 잘못 없는 저까지 혼난다니까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원웅이 때문일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제 탓이란 뜻이에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애먼 채경 씨가 무슨 잘못이야.”
“그럼요?”
“원웅이가 정말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대학 내내 붙어 다닌 제가 봤을 때 그건 아닌 거 같거든요.”
유채경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뭐… 서원웅 씨랑 업무를 완벽하게 공유하는 건 아니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걸출하진 않아도 제 몫은 하는 친구예요. 근데 왜 상사들이 원웅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요?”
“그, 글쎄요?”
“회장님 아들이니까. 윗선에서 닦달했을 거예요, 못 살게 굴라고.”
“아… 그래서…….”
유채경도 서청수와 서청규의 알력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채경 씨 마음 잘 알아요. 나는 잘하는데 괜히 엮여서 혼나면 짜증나지. 그래도 원웅이만 미워하진 말아요. 내가 괜히 찔리거든.”
“서원웅 씨 미워하지 않을게요. 근데 왜 대찬 씨가 찔려요?”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사실 내가 원웅이더러 유통으로 가자고 꼬신 거거든.”
“에에? 그럼 지금쯤 서원웅 씨는 죽어라 대찬 씨 욕하고 있겠는데요?”
“그러려나……?”
대찬은 서원웅이 당장의 시련에 잡아먹혀 주저앉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서원웅의 시련은 당장 대찬이 도와줄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허운의 경우야 간단히 해답을 줄 수 있었지만, 서원웅의 경우는 달랐다.
윗선에서 작정하고 목을 조르는데 잔머리나 붙임성은 효용이 없었다.
다만, 대찬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로 혹은 격려의 말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힘들지?”
“안 힘들다고 하면 믿어 줄래?”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푸석푸석해졌어.”
“견디기가 녹록하진 않네.”
힘내.
대찬은 그 말만큼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만큼 무책임한 위로는 없다.
게다가 어쨌거나 대찬이 필래유통을 고집했기에 겪는 시련이었다.
힘내, 그런 위로는 제3자나 쉽게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대찬은 당사자였다.
“노력할게. 지금 이 고생이 꼭 제대로 결실을 맺도록.”
“그래. 책임져.”
서원웅은 툭, 가볍게 대찬의 어깨를 쳤다.
그의 주먹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찬은 안쓰러운 웃음으로 그를 다독였다.
하지만 대찬도 마냥 남의 위로나 해 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서청규의 메인 타깃은 서원웅이었지만 대찬 역시 타깃이었다.
굳이 거창하게 서청규를 들먹이지 않아도, 당장 직속 선배인 유백기는 대찬에게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
그가 돌파해야 할 장애물과 함정 역시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 생활이 매일 가시밭길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둬 키우는 가축에게도, 잡아 가둔 죄수에게도 밥은 주는 법이었다.
갑갑한 회사 생활 와중에도 소소한 기쁨은 존재했다.
가장 큰 기쁨은 누가 뭐래도 월급이었다.
그 피로, 그 굴욕, 그 압력, 그 갑갑함을 감내하는 건 순전히 월급 때문이었다.
첫 월급이 대찬의 급여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월급날이라 그런지 사무실 사람들의 표정이 한 달 중 가장 활짝 피었다.
허운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대찬의 자리를 찾아왔다.
꾸벅, 송희근 과장 이하 상사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대리님.”
그의 넉살에 송희근 과장도 알은체를 해 주었다.
“어, 2팀 신입.”
“잠깐 조대찬 좀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해. 조대찬 씨, 보고서 수정 얼추 끝냈지?”
대찬은 한창 업무 중에 찾아온 허운이 쉬파리만큼 귀찮았다.
“예. 다 해 가긴 하는데 좀 더 손봐야 합니다. 더 있다 쉬겠습니다.”
“됐어. 급한 것도 아닌데 바람 좀 쐬고 와.”
송희근 과장의 말에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최후의 저항으로 앉은 채 허운을 째려보자, 허운은 대찬의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일어나. 가자.”
대찬은 깊은 숨을 토하고는 허운의 뒤를 따랐다.
“형, 넉살 많이 좋아졌다.”
“아, 이게 조대찬 도사님의 비방 덕분 아니겠습니까요.”
“비방은 무슨…….”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그러면서 허운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근무 중에 불러내?”
“오늘이 무슨 날이냐.”
“무슨 날이긴, 4월 25일이지.”
“에헤이, 우리 첫 월급날이잖아.”
“근데.”
“근데는 무슨 근데! 이런 기념비적인 날을 그냥 보낼 거야?”
대찬은 허운의 꿍꿍이속을 훤히 내다보고 선제 타격했다.
“나 오늘 술 안 마실 거야.”
“아, 왜!”
“말했잖아. 형이랑 다신 술 안 마신다니까.”
“진짜 섭섭하게 이럴 거야?”
“당신이 먼저 섭섭하게 토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 없었어.”
허운은 애걸복걸했다.
“나 이대로 어두침침한 자취방으로 들어가기 싫어. 살려 줘.”
“동기가 나밖에 없어? 원웅이, 채경 씨 두고 왜 내 바짓가랑이만 붙잡는데?”
“안 그래도 이미 섭외 끝내 놨지. 너만 오면 돼.”
“미안한데 나 진짜 안 돼.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갈 거야.”
“네가 이렇게 중증 집돌이일 줄은 몰랐다.”
“그럼 이제부터 알면 되겠네. 첫 월급날이라고 이미 집에다 약 쳐 놨단 말이야. 담에 먹자. 알았지?”
허운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더 할 말이 없네.”
“그래. 술 좀 적당히 먹고. 나 없는 자리에서 뻗으면 그 비루한 몸뚱이 누가 치워 주겠어.”
지은 죄가 있는 허운은 대찬의 날 선 경고에도 일언반구 토를 달지 못했다.
대찬의 판정승으로 둘의 대화는 종결되었다.
대화는 별로 숨길 것도 없었다. 시시하고 가벼운 내용이었다.
그런 둘의 얘기를, 마치 적진의 군사기밀이라도 캐는 양 누군가 숨죽인 채 엿듣고 있었다.
대찬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는 후다닥 급하게 꽁무니를 뺐다.
대찬의 일거수일투족에 안테나를 바짝 세우는 사람은 이 회사에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유백기.
대찬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어쩜 저리 발전이 없어.’
대찬은 유백기의 꿍꿍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그 사람의 꿍꿍이를 짐작할 땐 그 사람의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멍청이의 꿍꿍이는 직선이고, 평범한 사람의 꿍꿍이는 한 번 꼬인다.
똑똑한 사람의 꿍꿍이는 두 번, 세 번 꼬인다.
대찬은 멍청이 유백기를 기준으로 그의 속내를 짐작했다.
그리고 그의 꿍꿍이가 실현되지 않도록 먼저 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