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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71화 (70/556)

난 할 수 있어 71화

한태윤 대리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대찬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박태술 의원실을 나와 멀찍이 걸어가면서 한태윤 대리가 대찬에게 물었다.

“도대체 뭡니까?”

“예?”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언제 다 캐낸 겁니까? 아니, 정 비서 부인이 동화책 출판한 건 나도 모르는데…….”

“앞으로 맡게 될 업무에 조금 신경 쓴 것뿐입니다. 혹시 주제넘게 굴었나요? 그랬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일이 아니죠. 오히려 칭찬할 일이죠. 대단하시네요, 조대찬 씨.”

“민폐가 아니었다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대찬은 다른 의원실에 가서도 마찬가지의 퍼포먼스를 보였다.

그렇게 의원 회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박태술 의원실을 지나갈 때, 마침 국회 청소부가 그곳에서 나온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대찬이 그에게 다가가 공손히 물었다.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잠깐 쓰레기봉투 좀 봐도 되겠습니까?”

“허허, 뭐 잘못 버린 거라도 있어요?”

“아, 혹시 잘못 버려진 게 있지 않을까 해서요.”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대찬의 명함은 없었다.

그의 입가가 좌우로 더 벌어졌다.

그걸 보고 청소부가 물었다.

“잘못 버려진 거 찾았어요?”

“아뇨, 없네요. 안 버려졌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대찬의 목소리가 밝았다.

대찬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에 돌아왔다.

한태윤 대리는 송희근 과장에게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조대찬 씨 수완이 상상 이상입니다.”

“응? 그래?”

“네, 과장님. 그 박태술 의원실 수행비서 정성진 아십니까?”

“가물가물한데…….”

송희근 과장은 누구더라, 하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대관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다.

박태술 의원실은 대외협력 3팀이 집중 관리하는 의원실 중 하나였다.

한태윤 대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장님은 정 비서도 잘 모르시는데, 조대찬 씨는 정 비서 부인이 동화책 출판한 거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그래?”

송희근 과장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겨우 출근한 지 이틀 된 신입 사원의 치밀함에 내심 놀랐다.

정성이나 노력 정도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였다.

‘회장님 아들 친구라더니 빽이라도 쓴 건가…….’

송희근 과장의 상상력은 딱 그가 가진 세계만큼 좁았다.

천원석 대리 역시 내색하진 않았지만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그 역시 대관 업무에 여러 해 매달린 까닭으로 박태술 의원실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박태술 의원실에 신입이 쳐들어가서 내밀한 소식을 살뜰히 챙기기까지 했다니.

‘무슨 용을 썼는지는 몰라도 대단하네. 배짱도 있고.’

대찬을 보는 천원석 대리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유백기의 속이야 백 번도 더 뒤틀렸다.

유백기는 입사한 지 만 1년이 되었는데도 박태술 의원실 직원들과 말 한번 제대로 섞지 못한 처지였다.

자존심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겼다.

송희근 과장은 대찬을 바라보며 어설픈 미소를 보였다.

“신입, 수고했어. 수완이 아주 대단해?”

“감사합니다, 과장님.”

대찬은 우쭐하지 않았다.

같은 궤도를 두 번째 걷고 있다.

남들보다 월등한 건 당연하다.

그는 주변에서 들리는 꿀 발린 말에 취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내딛는 걸음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데 만족했다.

대찬은 담배를 피우러 사옥 8층에 마련된 간이 정원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와이셔츠 차림의 샐러리맨들이 매캐한 연기를 한 줄기씩 올려 보내고 있었다.

상사에게 깨지고 한 개비.

일 못하는 부하 직원 때문에 한 개비.

고액 과외 시켜 줬더니 성적 떨어진 자식 때문에 한 개비.

월급 가져다 바쳤더니 한 달에 용돈 10만 원 주는 마누라 때문에 한 개비.

한 개비마다 근심,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거기서 대찬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허운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대찬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 담뱃불을 붙였다.

“세상 혼자 짊어진 것처럼 뭐 그렇게 심각해요?”

“아, 조대찬 씨.”

“걱정 있어요?”

허운은 한숨을 푹 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대찬 씨는 걱정 하나 없나 봐. 신입 사원 얼굴이 어떻게 그리 태평해.”

“무슨 일이에요? 저한테 털어 놓기라도 해 봐요.”

허운은 입 안 가득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가 내뿜으며 말했다.

“왜긴 왜겠어요. 팀에서 1인분을 못하니까 그러지.”

“이제 출근 이틀째예요. 어떻게 1인분을 해요. 애기 밥만큼만 해도 대단한 거지.”

“그런데 내 보스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봐요. 오늘은 생전 처음 보는 서류 던져 놓고는 1시간 있다가 왜 여태 안 됐냐면서 짜증을 낸다니까.”

허운의 말을 듣고 나니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 겪었던 대외협력 2팀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2팀은 어중간한 부서였다.

1팀이 양지에서의 대외협력 업무를, 3팀이 음지에서의 대외협력 업무를 담당한다면, 2팀은 음도 양도 아닌 어중간한 짬뽕이었다.

대체적으로 ‘업무 지원’이라고 뭉뚱그려 표현됐는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정해진 업무가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업무 지원이라면 대외협력지원팀이 별도로 있지 않은가.

그런 까닭에 2팀의 업무는 1팀과 3팀보다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그러니 심심한 상사들은 부하 직원을 들들 볶는 것으로 무료한 일상을 달랬다.

부하 직원 입장에서는 하등 중요하지도 않은 업무로 사람을 못 살게 구니 스트레스가 2배였다.

‘그러고 보니 2팀 직원들 성격 자체가 까칠하고 옹졸했지.’

그런 틈바구니에서 활달하면서도 허술한 구석이 있는 허운이 버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는 한껏 도와줘야겠네.’

허운은 답답한지 줄담배를 물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허운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 짜증내는 거, 천성이 그래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거 말고도 따로 이유가 있어요.”

“이유 있을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내가 일 못하니까 그런 거지.”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것만은 아닐걸요. 혹시 오늘 퇴근하고 시간 있어요?”

“개인 약속은 없고, 팀 회식은 금요일에 한다고 하니까 오늘 시간 되긴 해요.”

대찬은 기가 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회식을 금요일에 잡아 놨어요? 하여튼 사람 못 살게 구는 덴 도가 트셨네, 상사들이.”

“뭐, 어째. 까라면 까야지. 근데 시간은 왜 물어봐요?”

“저랑 술이나 한잔하실래요?”

“마침 맥주가 엄청 당기던 참이에요.”

“그럼 끝나고 연락 줘요.”

“알았어요.”

대찬은 허운을 등지고 먼저 들어가려다 허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어깨 좀 펴시고.”

“알았어요.”

허운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신입 사원들에겐 정시 퇴근이 허락되었다.

밤늦게까지 회사에 묶어 둬 봤자 도통 쓸모가 없는 까닭이었다.

대찬과 허운은 주머니 가벼운 신입 사원이었다.

5천 원짜리 순댓국에 공깃밥 하나를 훌훌 말아먹어 배를 채우고,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에서도 뻑적지근한 안주는 언감생심이었다.

비쩍 마른 노가리에 마요네즈를 찍어 먹었다.

허운은 노가리를 사탕처럼 쪽쪽 빨면서 말했다.

“참 일할 맛 안 난다.”

“다른 직장이라고 다르겠어요.”

“하긴.”

허운은 허탈한 듯 노가리를 씹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떠올리고 배시시 웃었다.

“아, 나 그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오늘 국회 다녀오셨다면서요? 신입답지 않게 떳떳했다던데.”

“별건 아니고요.”

대찬은 마른 웃음을 지었다.

허운은 한숨을 팍 쉬었다.

“3팀 송 과장님이 그 얘기를 우리 팀장한테 막 떠벌렸잖아. 그러니까 우리 팀장은 약이 바짝 올라갖고 나 더 갈구고.”

“본의 아니게 폐 끼쳤네요.”

“폐는 무슨 폐. 일 못하는 내가 등신이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자책할 일 아니라니까.”

“조대찬 씨는 인턴도 안 해 봤다면서 어쩜 그리 빠삭해?”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회사 같은 부서에서 10년 일해 봤다면, 믿어 줄래요?’

대찬은 속으로만 물었다.

대찬이 아무 말이 없자 허운은 노가리를 좌우로 흔들며 웃었다.

“아니, 비꼬는 건 아니고. 그냥 능숙해 보여서요. 나 같은 얼치기랑은 다르게.”

“피차 뭐가 다르겠어요.”

“면접 때 조대찬 씨 덕분에 기회 다시 받고, 연수 때도 그래요. 어느새 나도 모르게 조대찬 씨한테 의지를 하고 있더라니까? 똑같은 신입인데.”

“저도 허운 씨한테 많이 의지했어요.”

“그짓말.”

어느새 허운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혀가 풀렸다.

의외로 술이 센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허운 씨 좀 많이 취한 거 같네요.”

“에이! 이제 시작이에요. 조대찬 씨, 우리 연수원도 같은 조였고, 이제 여기서 오래 같이 일할 텐데, 우리 말 놓읍시다.”

“그래요. 말 편하게 해요.”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나이도 모르네요. 조대찬 씨, 나보다 동생이죠? 나 80이거든. 조대찬 씨는 취업하는 데 이렇게 오래 안 걸렸을 거 같아서.”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네. 83이에요.”

“크으, 휴학 한 번 안 하고 다이렉트로 취직했네. 그럼 대찬이라고 불러도 되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아, 말 편하게 하라고!”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알았어.”

“너는 진짜 내가 봐도 멋있어. 운동 잘하지, 명문대 나온 데다 벌써부터 상사들한테 싹싹하지.”

“갑자기 비행기는 왜 태워?”

“거기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어요.”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인물은 형이 더 잘났는데.”

허운은 크크 웃었다.

“아무튼 네가 내 동기라서 좋다.”

“아, 낯간지러운 말은 그쯤 하고 술이나 먹읍시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허운도 경쾌하게 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고 허운이 말했다.

“근데 아까 담배 피우면서 말이야.”

“응?”

“상사들이 나 못 살게 구는 거, 내가 일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했지.”

“그랬지.”

“그럼 뭐야? 뭐 때문에 상사들이 나한테 그러는 건데?”

“궁금해?”

“궁금해 뒤질 거 같아.”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 팀 사람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써요.”

“술?”

“네, 2팀 오 과장, 고량주 사러 중국 가고 맥주 사러 체코 가는 사람이야. 딴엔 고급 취향이라고 거들먹거리는데 아주 못 봐 줄 지경이거든?”

“네가 그걸 어떻게…….”

“박 대리는 또 어떤데. 잘난 거라곤 주량 하나뿐이라 그걸로 엄청 으스대.”

“마, 맞아.”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해 주고, 반대로 술 잘 마시는 사람은 언제 봤다고 복숭아나무 아래서 맹세한 사이처럼 군다니까요.”

“…….”

막힘없이 2팀 상사들의 내밀한 사정을 읊어 대는 대찬을, 허운은 홀린 듯이 바라만 봤다.

“그리고 형 바로 위에 있는 곽 주임, 그 사람도 초록 동색이야. 술 못 마시고 죽은 귀신이 씌었나.”

“아니, 네가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아는데?”

대찬은 이제 자질구레하게 변명을 대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런 시시콜콜한 거 알아서 뭐하려고. 암튼 그 사람들 술 상대나 잘해 줘. 그럼 실수 몇 번쯤은 너털웃음으로 넘어가 줄걸.”

“정말이야?”

“정말.”

대찬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허운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이 첫 번째 삶에서도 별 인연이 없던 2팀 직원들의 사정을 자신 있게 말하는 건, 그들의 주벽이 오죽한 정도를 넘어서는 까닭이었다.

술에 심취한 오 과장은 회사 관두고 주점을 차렸다가 쫄딱 망해 버렸다.

술을 물처럼 마시던 박 대리는 나이 사십이 안 돼서 간암에 걸렸다.

그 옆에서 맞장구를 치던 곽 주임도 대찬의 기억에 생생했다.

이런 작자들이니 기억에 남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찬은 걱정을 담아 허운에게 말했다.

“대신 그 사람들 따라서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몸 상하니까.”

“알았어. 고맙다, 대찬아.”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 떼고 이름만 부르지 마. 닭살 돋는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둘은 한동안 거푸 술을 마셨다.

상사들과 통하는 열쇠가 술이란 걸 알게 된 허운은 일부러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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