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70화
흘러간 세월도 생각나고 아들이 대견하기도 해서 아버지답지 않게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이가 안 어울리게 눈물은.”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도 덩달아 촉촉해졌다.
그 물기가 대찬에게도 옮았다.
“앞으로는 제가 좀 더 짐을 짊어질게요. 그동안 저 길러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부모님은 뭉클한 시선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다음 날.
대찬은 첫 출근 날과 마찬가지로 팀에서 가장 먼저 출근 도장을 찍었다.
전과가 있는 유백기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서 두 번째로 출근했다.
“선배, 오셨어요?”
대찬의 살가운 인사를 유백기는 외면했다.
대찬은 피식 웃기만 했다.
이어 양동식 부장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 발을 들였다.
대찬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어, 좋은 아침이네, 조 사원.”
유백기도 이에 뒤질세라 일어나 인사했다.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
양동식 부장은 유백기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쌩 지나갔다.
첫 회식 이후로 양동식 부장은 유백기에게 한없이 싸늘해졌다.
‘저건 최소 3개월 감이다.’
대찬은 그렇게 직감했다.
양동식 부장에게 미운털이 한번 박히면 좀체 벗어나기가 힘들다.
천원석 대리는 양동식 부장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걸 보고 큭큭 웃었다.
“백기 씨 엿 됐네.”
“…….”
유백기는 남을 허물 잡을 수도 없어 입술만 우물거리며 분을 삭였다.
꼼짝 못하는 유백기가 우스워서 천원석 대리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천원석 대리가 내놓고 유백기를 조롱해도 누구 하나 비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 대리의 그런 능글맞은 면모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한태윤 대리 또한 입을 다물었다.
송희근 과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한태윤 대리는 곁눈으로 흘끗 유백기를 바라봤다.
그는 씩씩거리며 대찬에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한태윤 대리가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응?”
“제가 조대찬 씨 데리고 업무 가르치겠습니다.”
“뭐? 조 사원 이제 출근 이틀째야. 아직 유 사원이 가르칠 게 산더밀 텐데.”
“어제 보니 벌써 신입 매뉴얼은 다 익힌 것 같던데요. 유백기 씨가 더 가르칠 건 없을 겁니다.”
“그,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지.”
송희근 과장은 선선히 한태윤 대리의 뜻을 들어주었다.
한태윤 대리는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대찬 씨, 바로 나 따라서 업무 투입돼도 괜찮죠?”
“예, 대리님.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대찬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이건 한태윤 대리의 호의였다.
그는 이미 심통이 날 대로 난 유백기가 대찬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뻔히 알았다.
그렇기에 대찬을 유백기의 손에서 떼어놓고자 했다.
물론 대찬이 빨리 신입 매뉴얼을 뗐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천원석 대리는 김샜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입술을 비틀었다.
한태윤 대리는 단김에 쇠뿔 빼듯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조대찬 씨 데리고 국회 좀 다녀오겠습니다.”
“명함도 아직 안 나왔는데 벌써?”
“명함, 나왔습니다. 우리 팀은 다른 팀보다도 명함이 중요하잖습니까. 경영지원부에 미리 신청을 해 뒀습니다.”
“아무튼 한 대리 싹싹한 건 알아줘야 돼. 그래, 다녀와.”
송희근 과장은 혀를 내둘렀다.
대찬 역시 이런 한 대리의 능력을 속으로 인정했다.
한태윤 대리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와요.”
“네, 대리님.”
한태윤 대리는 대외협력부 몫으로 할당된 회사 차량에 몸을 실었다.
“대리님,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그러다 사고 나면 골치 아파져요.”
“운전에 서투르진 않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한태윤 대리는 선선히 대찬에게 운전석을 양보했다.
책상물림이 일하는 데 운전면허가 왜 필요하겠냐고 하겠지만, 의외로 회사 차량을 이용할 일이 많았다.
면허가 없으면 상사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상사의 불쾌감도 불쾌감이거니와 얻어 타는 쪽에서도 이런 가시방석이 없다.
그렇기에 몰고 다닐 차도 없는데 벌써 면허를 딸 필요가 있겠냐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찬은 면허를 따 두었다.
이미 첫 번째 삶에서 숱하게 차를 운전한 대찬은 부드럽게 운전했다.
한태윤 대리도 싫진 않은 표정이었다.
“제법 능숙하네요.”
“감사합니다, 대리님.”
대찬과 나란히 앉은 한태윤 대리가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채 말했다.
“제가 아까 과장님께 드렸던 말씀, 무슨 뜻인지 압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팀에게 유독 명함이 중요하다는 거.”
대찬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한태윤 대리는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제가 아는 것을 과시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남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는 그 자체를 좋아했다.
대찬은 한태윤 대리의 몇 안 되는 낙을 뺏고 싶지 않았다.
그걸 가로채 봤자 자신에게 득 되는 일도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국회로 가고 있잖습니까.”
“네.”
“국회 산자위 소속 의원실에 들를 겁니다.”
산자위, 즉 산업자원위원회는 국회의 위원회들 중에 기업들이 유독 촉각을 곤두세우는 곳이었다.
기업의 이익과 직결되는 법안들을 만드는 위원회였다.
한태윤 대리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 조대찬 씨도 뻔질나게 드나들 겁니다. 얼굴도장을 잘 찍어놔야 합니다. 모름지기 첫인상이 중요해요.”
“뇌리에 잘 새겨 두겠습니다.”
“인색해 보여선 안 되고, 물렁해 보여서도 안 돼요. 아시겠죠?”
“네, 대리님.”
“조대찬 씨는 보는 눈, 듣는 귀 있는 사람이니까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찬은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보는 눈, 듣는 귀로 시작되는 레퍼토리는 한태윤 대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찬사였다.
단 하루 만에 그에게 인정받았다.
첫 번째 삶의 대찬은 2년 차가 되어서야 겨우 한 번 들었던 말이었다.
한태윤 대리의 건조한 칭찬은 강남에서 여의도 사이 올림픽대로에서의 지긋지긋한 교통 체증마저도 즐거움으로 만들어 주었다.
연녹색 돔을 얹은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그 옆의 의원 회관이 대찬과 한태윤 대리의 목적지였다.
그곳에서 법안을 만드는 기초 공사가 진행되었다.
국회의원들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었지만, 이들의 체급에 고작 대리와 신입 사원을 상대하지 않았다.
한태윤 대리와 대찬을 맞아 주는 이들은 의원실에 소속된 직원들이었다.
그나마도 가장 높은 4급 보좌관들은 이들을 백안시했다.
7급 비서나 9급 비서 정도가 주로 상대했다.
한태윤과 대찬은 한 의원실 앞에 섰다.
‘아, 오랜만이네. 박태술 의원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당 소속의 박태술 의원은 산자위 소속 의원들 중에서도 가장 독하고 불친절했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소속 의원실 직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한태윤 대리도 대찬에게 귀띔했다.
“가장 까다로운 곳입니다. 긴장하세요.”
“네, 대리님.”
‘안 그래도 잔뜩 겁먹고 있다고요.’
대찬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마음은 편안했다.
그들이 까다로운 상대라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경험해 본 상대냐, 그렇지 않은 상대냐는 건 마음가짐에 있어 큰 차이였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 그들에게 뼈저리게 당했다.
뼈저리게 당한 만큼 그들을 잘 알았다.
똑똑똑.
한태윤 대리는 공손하게 의원실의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어, 한 대리님 오셨네. 윤희 씨, 커피 한 잔 드려.”
한태윤 대리를 보는 의원실 직원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대찬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대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의원실 직원들은 절대 갑이었다.
저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대외협력팀 직원들의 밥줄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대외협력팀 직원들이 그들에게 줄 것이라고는 잦은 식사 대접과 이따금의 술대접이 고작이었다.
굳이 의원실 직원의 허물을 잡을 문제도 아니었다.
기분 나빠 할 일도 아니었다.
‘저 사람들한테 우리는 잡상인 정도일 뿐이니까.’
지금이야 차분하게 저들의 푸대접을 인내하지만, 첫 번째 삶의 대찬은 그 푸대접에 비분강개했다.
의원도 아니고 의원실 나부랭이들이 사람을 무시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의원실 나부랭이들은 국회의원이 주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산다.
대외협력팀 직원들은 그 부스러기의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산다는 먹이사슬을 인정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땐 피가 끓었지.’
대찬은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곤 씁쓸하게 웃었다.
“아, 오늘 여기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고…….”
한태윤 대리는 긴장한 목소리로 대찬을 소개하려고 했다.
꼿꼿한 성격의 그에게도 의원실 직원들은 어려웠다.
한태윤 대리가 주춤거리며 대찬을 소개하려는 찰나, 대찬이 먼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필래유통 대외협력 3팀 신입사원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눅 들지 않은 씩씩한 인사를 제아무리 의원실 직원이라도 묵살하기 어려웠다.
“어, 어어… 그래요. 잘 부탁해요.”
“조금만 더 시간 뺏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명함입니다.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찬은 4급 보좌관부터 9급 비서, 그 밑의 인턴과 무급의 입법 보조관에게까지 명함을 돌렸다.
보통 신입의 명함은 받는 즉시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신입과 알고 지내 봤자 득보다 실이 많았다.
신입이 무럭무럭 자라 쓸 만해진다 싶으면 십중팔구 의원실 직원이 일을 관두거나 저 신입이 일을 관둔다.
그렇기에 신입은 옷깃 스치는 정도의 인연일 뿐이니 명함을 애지중지 보관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때 되면 다시 돌리는 게 명함이었다.
그런데 대찬은 명함을 돌리면서 한 마디씩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보좌관님, 이번에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주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일 하셨습니다.”
“그, 그걸 그쪽이 어떻게…….”
“훌륭한 일을 하시니까 저 같은 말단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찬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권영식 4급 보좌관.
박태술 의원의 최측근이며, 그런 까닭에 첫 번째 삶의 대찬이 끈질기게 공략을 시도했던 상대였다.
그런 만큼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그는 틈만 나면 자기가 전자상거래법 몇 조 몇 항을 개정해서 이 나라 전자상거래 발전의 초석을 놨다며 떠들어 대기 일쑤였다.
별 대단하지도 않은 사실을 침소봉대하여 화랑무공훈장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대찬이 그런 그의 자부심을 초면에 치켜세워 주니 권영식 보좌관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훈웅 5급 보좌관.
“오 보좌관님, 득남 축하드립니다.”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훈웅 보좌관은 어이없다는 듯 두 눈을 껌뻑거리기만 했다.
정성진 7급 수행비서.
“정 비서님, 사모님이 이번에 동화책 출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꼭 사서 읽어 보겠습니다.”
“아, 네…….”
‘그러고 쫄딱 망했지만 말입니다.’
대찬은 지금 시점에서 미래에 벌어질 결과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최윤희 9급 비서.
“최 비서님, 이번에 박 의원님 의원실 들어오셨죠? 저도 오늘이 두 번째 출근이에요.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래요…….”
최윤희 비서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찬이 끝내 과장 진급에 실패한 10년 차에 벌써 4급 보좌관이 되어 커리어를 활짝 꽃피운 사람이었다.
박윤석 인턴.
“박 인턴님, 의원님께서 그렇게 자랑스러워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시민 단체에서 일하시겠다는 포부를 들었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대찬이 인턴까지 기억하는 건, 박윤석 인턴이 박태술 의원의 차남이기 때문이었다.
제 애비 성질머리를 빼다 박아 버르장머리를 밥 말아먹은 녀석 비위를 맞춰 주느라 간이며 쓸개며 다 녹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패션 삼아 시민 단체에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소리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지껄이는 녀석이었다.
대찬은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박윤석 인턴의 비위까지 맞춰 주었다.
이렇게 한 명, 한 명 맞춤으로 인사를 건네며 명함을 내미니, 이들은 찜찜한 마음에 명함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권영식 4급 보좌관은 어중간한 웃음을 지으며 한태윤 대리에게 말했다.
“우리 한 대리가 신입 교육을 아주 빠삭하게 시켰나 봅니다.”
“아, 저는 그런 적이 없…….”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한태윤 대리가 곧이곧대로 말하려 하자, 대찬이 나서서 한태윤 대리의 입을 막았다.
“대리님 덕분에 말단 주제로 보좌관님부터 인턴님까지 무사히 명함을 드리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그래요.”
권영식 보좌관은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