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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69화 (68/556)

난 할 수 있어 69화

양동식 부장의 그랜저가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유백기는 헛기침을 하고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어, 그럴까? 오늘 잔뜩 마시고 내일 지하철로 출근하려고 했거든.”

“가시죠, 제 차로.”

유백기는 송희근 과장, 그리고 한태윤, 천원석 대리를 제 차로 모셨다.

하지만 대찬은 예외였다.

“조대찬 씨는 택시 타고 와.”

그 말에 한태윤 대리가 대찬을 대신해서 말했다.

원리원칙주의자인 한태윤 대리는 막내에게 불편을 강요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다 같이 가면 되지, 조대찬 씨는 왜 뺍니까?”

“다섯이 타면 아무래도 불편하잖습니까. 조대찬 씨도 아마 불편할 겁니다.”

“그래도……!”

한태윤 대리의 항변을 천원석 대리가 막았다.

“에이, 이건 백기 씨 말이 맞아. 우리끼리 가자고. 대찬 씨! 택시 타고 천천히 와.”

“…예, 알겠습니다.”

유백기는 방긋 웃으면서 대찬에게 쏘아붙였다.

“그러게 누가 회사 멀리 떨어진 곳에 예약하래?”

“…….”

유백기의 경차가 양동석 부장의 뒤를 따랐다.

대찬은 그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대로까지 나가 택시를 잡았다.

가장 늦게 도착한 대찬은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양동식 부장은 팀원 하나하나에게 직접 술을 따라 주었다.

대찬도 무릎을 꿇고 공손히 술을 받았다. 그리고 양동식 부장의 잔에도 술을 채워 주었다.

알맞은 높이로 찬 소주를 보고 양동식 부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자, 그럼 우리 신입 사원 조대찬 씨가 대표로 건배사 한번 할까?”

건배사의 세계는 오묘했다.

재기발랄해야 하는데 정도가 지나치면 곤란했다.

시중에 떠도는 흔한 것들이 대찬의 뇌리에 스쳤다.

지금은 2008년, 당대에 흔하게 회자되던 건배사들이 있었다.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줄여서 당나귀.

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걸러서 마시자, 줄여서 원더걸스.

이런 것들이 있었지만 대찬은 그것들을 말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촌스러웠다.

다소 투박한 건배사일지라도 신입다운 기백이 느껴지면 으레 받아 주기 마련이었다.

대찬은 잔을 내밀면서 힘차게 외쳤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외치면 오냐, 라고 받아 주십시오.”

신입의 귀염성이 느껴졌는지 본부장 이하 선배들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서렸다.

“잘하겠습니다!”

대찬이 선창하자 선배들도 잔을 맞춰 주었다.

“오오냐!”

다행히 점수가 깎이진 않은 것 같았다.

대찬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양동식 부장이 주도하는 회식은 템포가 빨랐다.

그가 워낙에 주당 기질이 있는 덕택이었다.

그렇기에 일찌감치 저마다의 광대에 붉은빛이 돌았다.

빠르게 몇 순배씩 술이 돌면서 불판 위의 곱창도 빠르게 동났다.

양동식 부장이 자신 있게 추천할 정도로 음식의 맛이 훌륭했다.

‘하기야 확실히 미식가 기질은 있었지.’

양동식 부장이 순탄하게 부장까지 올라갔던 건 그런 미식가적 자질 덕택도 있었다.

업무 능력이 탁월한 편은 아니지만, 양동식 부장은 술과 음식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하게 강점이 있었다.

대관 업무를 하면서 남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어야만 하는 대외협력부의 수장에게는 중요한 미덕이었다.

곱이 꽉 들어찬 한우 곱창.

아주머니가 맨손으로 슥슥 무친 부추.

둘을 곁들여 먹으니 소주가 절로 들어갔다.

모두가 음식을 즐기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만 그러지 못했다.

유백기였다.

그는 대찬이 이 솜씨 훌륭한 식당을 추천했다는 게 짜증나는 표정이었다.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수작이다.

대찬은 그에게 부러 공격 거리를 제공했다.

그가 양동식 부장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부장님, 전골 주문할까요?”

“어, 전골?”

양동식 부장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백기가 끼어들었다.

“조대찬 씨, 생각이 있어?”

술이 들어가니 말투가 더 날카로워졌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생각이 있냐니요?”

“당연히 2차로 옮길 타이밍 아니야. 아까부터 내가 계속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조대찬 씨 진짜 센스 꽝이네.”

“그런가요?”

대찬은 반박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할 말 있으면 더 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에 유백기는 더 따갑게 쏘아 댔다.

“그런가요는 무슨. 당연히 그렇지.”

“왜 그렇죠……?”

대찬은 유백기의 구체적인 악평을 슬슬 꾀어냈다.

유백기는 얼굴을 확 구겼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해력이 달려서.”

따따부따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유백기로 인해 양동식 부장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영문을 모르는 유백기는 계속 멋대로 떠들었다.

“애초에 회식 장소를 차로 갈 곳으로 잡은 것도 그렇고, 마실 만큼 마셨는데 곱창전골 운운하면서 말이야, 더 뭉개려고 그러는 것도 그렇고.”

“그렇군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반응이 없자 유백기는 더 의기양양해졌다.

“회식 장소를 개떡 같이 잡았으면 진행이라도 찰떡 같이 하든가 했어야지.”

“개떡 같아서 미안하군.”

그건 대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술기운이 오른 양동식 부장의 목소리였다.

“…예?”

“개떡 같아서 미안하다고.”

“왜, 왜 부장님이 사과를…….”

양 부장의 얼굴에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오늘 조대찬이가 나한테 식당 추천해 줄 곳이 없냐고 했거든?”

그 말에 술기운으로 붉어졌던 한 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양 부장의 목소리에는 갈수록 불편함이 깃들었다.

“싹싹하게 먼저 물어 오니 내가 추천해 줬지, 이 집이 먹을 만하다고.”

“…….”

아뿔싸.

유백기의 얼굴이 삽시에 흙빛이 되었다.

이게 대찬이 쳐 놓은 덫이란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덫이 그의 발목을 옭아맨 뒤였다.

양동식 부장은 잔뜩 부아가 치밀어서 쏘아 댔다.

“그런데 내가 또 개떡 같은 사족을 달았지, 뭐야. 곱창 한 판 거하게 먹고 전골 바글바글 끓여 먹으면 그게 또 술 도둑이라고.”

유백기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송희근 과장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양동식 부장을 바라봤다.

“부, 부장님…….”

“허허, 개떡 같은 회식 자리라 미안하게 됐네. 이런 자리는 빨리 파해 줘야지. 오늘은 이만하지.”

“부장님!”

송희근 과장이 재차 부르자 양동식 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게 자꾸 불러 대나! 난 집에 갈 테니 알아서들 귀가해!”

양동식 부장은 잔뜩 부아가 치밀어서는 주저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가면서도 대찬의 등을 가볍게 한 번 툭 쳤다.

“나 때문에 괜히 야단맞았군. 미안해.”

대찬에게 미안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배알이 단단히 꼬였다는 걸 유백기에게 끝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부장이 떠난 자리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유백기는 넋이 나갔다.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송희근 과장이 유백기의 팔을 흔들었다.

“유백기! 뭐 하고 있어! 빨리 나가서 사과드리지 않고!”

“…….”

“유백기!”

송희근 과장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유백기의 잘못은 비단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건 유백기를 제대로 지도 편달하지 못한 송희근 과장의 잘못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담이 작은 송희근 과장의 등줄기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유백기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바깥에서 부릉,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장인 회식 명소인 터라 대리운전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대리 기사는 바로 양 부장의 차를 몰고 떠났다.

천원석 대리는 허탈한 듯 피식 웃었다.

“이야, 이런 날에도 사고를 치는구나, 백기 씨는.”

유백기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찬과 눈이 마주치고 깨달았다.

대찬의 눈은 빙긋 웃고 있었다.

“너 일부러……!”

“네? 제가 뭘요?”

대찬은 입가를 올려 씩 웃고는 바로 얼굴을 뻣뻣하게 굳혔다.

자리가 이렇게 파했으니 양동식 부장이 떠난 자리에는 싸늘한 기운만 남았다.

대외협력 3팀 직원들은 그날 장사를 망친 보부상처럼 침울하게 가방을 챙겼다.

대찬만은 예외였다.

귀가하는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만하면 괜찮은 첫 출근이었지.’

신입 사원 매뉴얼을 반나절 만에 씹어 먹었다.

회식 자리에서 밭다리를 걸던 유백기에게 안다리를 걸어 짓뭉개 주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의 첫 출근을 떠올리려다가 관뒀다. 세세한 기억보다 비참한 느낌이 먼저 몰칵 떠오르는 까닭이었다.

대찬은 일찍 끝난 회식이 반가웠다.

첫 출근이다.

대찬에게 기념비적인 날은 가족에게도 그랬다.

그는 귀갓길에 케이크를 사려다가 관뒀다.

“옛날통닭 2마리 주세요. 맛있게 해 주세요.”

“네. 금방 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곧잘 통닭을 사 오곤 했다.

그때의 통닭이 이제는 옛날통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파는 곳도 많지 않아서 일부러 물어물어 찾아가야 살 수 있었다.

대찬은 굳이 옛날통닭 2마리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바싹 튀긴 닭고기를 감싼 종이봉투에 기름이 촉촉이 배어 나왔다.

대찬은 현관에 신발을 벗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어? 아들, 오늘 회식이라며?”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요.”

어머니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회사다, 야. 신입을 정신 말짱히 보내 주고.”

“그러게요.”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첫 번째 삶에서 대찬은 처참한 몰골로 귀가했다.

그건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토사물은 줄줄 흘러 관우 수염처럼 늘어지고, 풀린 눈은 흡사 좀비였다.

휴대폰은 어디에 던져 놨는지 온데간데없고, 넥타이는 힙합 가수의 금목걸이처럼 헐렁했다.

어머니는 신새벽에 그 몰골을 보고 울음을 참지 못했다.

그 울음에 술에 잠긴 정신이 번쩍 각성했다.

울던 어머니가 지금은 웃고 있으니 대찬은 역시 첫 출근은 성공적이었다며 거푸 자평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옛날통닭이 든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첫 출근 기념으로 통닭 사 왔어요.”

“어머, 네 아빠가 사 올 때나 먹던 건데, 오랜만이네.”

“이제는 제가 종종 사 올게요.”

“다 컸네, 우리 아들.”

“크기는 옛날에 다 컸죠. 누나는요?”

“놀러 나갔어.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더라.”

“하여튼 먹을 복은 더럽게 없다니까.”

“네 누나 있을 때 한 번 더 사 와.”

대찬에게서 통닭을 건네받은 어머니는 기름에 젖은 종이봉투를 찢고 소금을 종지에 담았다.

그러고는 안방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대찬이가 통닭 사 왔어요. 좀 먹어.”

어머니의 부름에 잠깐 눈을 붙이던 아버지가 기지개를 켜며 안방에서 나왔다.

“이 시간에 웬 통닭이야?”

“그래도 첫 출근 세레모니는 해 줘야죠.”

“하필 왜 이거야? 내가 퇴근하면서 사 올 때마다 입 삐죽 나와서 말라빠진 거 말고 양념치킨 사 달라고 아우성이더니.”

“그게, 직장인이 되면 달라지나 봐요.”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 대찬을 보고 아버지도 피식, 싱겁게 웃었다. 그의 대답이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대찬은 아버지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아버지는 감회가 새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첫 출근 해 보니까 어떠냐?”

“겨우 맛보기지만요, 남의 돈 빌어먹기 힘들 거 같더라고요.”

“그래?”

“벌써부터 은근히 견제하는 치도 있고요, 기본적으로 눈칫밥 먹어야 하니까.”

아버지는 빙긋 웃었다.

“그래. 녹록하지 않지, 월급쟁이 팔자란 게.”

“그러니까요.”

아버지는 회사 얘기를 하면서 아들이 장성했다는 걸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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