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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68화 (67/556)

난 할 수 있어 68화

유백기는 책상에 서류 뭉치 하나를 툭 던졌다.

“이거 신입 사원 업무 매뉴얼이야. 달달 외우면 더 배울 것도 없어.”

“감사합니다, 선배.”

“철두철미하게 다 습득했으면 나 불러. 간다.”

대찬은 웃으면서 서류를 챙겼다.

유백기는 서류만 던져 놓고 다시 회의실을 나섰다.

대찬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서류는 마술사가 카드 패를 추리듯 건성으로 한 번 보고 도로 쌓아 두었다.

대찬은 손목시계를 흘끔 보고 중얼거렸다.

“한 20분만 눈 붙여 둘까.”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 후, 대찬은 정확히 20분 뒤에 개운해진 몸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돌아온 그를 보고 유백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벌써 다 했어?”

“네, 다 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20분 만에 다 했다고?”

“네, 다 했습니다.”

“테스트할 거야. 나중에 혼나지 말고 지금 똑바로 말해.”

“다 했습니다, 선배.”

대찬은 시종 당당했다.

유백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신입 사원일 때는 천원석 대리에게 불호령을 들어가면서 꼬박 3박 4일을 지새웠다.

‘그런데 겨우 20분 만에 끝냈다고?’

건방도 적당히 떨어야지.

유백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원대생이라고 유난 떨 일도 아니었다.

유백기 자신도 고원대생이고 이 사무실에 있는 십중팔구는 명문대 출신이었다.

유백기는 대찬의 저 오만한 자신감의 근원이 궁금했다.

그는 대찬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 팀 내선 번호 몇 번이야?”

“2460이요.”

“부장님 자리는.”

“2451이요.”

“우편실.”

“3395요.”

“…….”

대찬은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물론 대찬도 회장실이나 감사실처럼 회사 생활 하면서 거의 써먹을 일 없는 번호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팀의 내선 번호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고, 우편실의 내선 번호 역시 알고 있었다.

신입 사원은 부서의 막중한 업무보다 허드렛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도 한다.

그러자면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편실의 번호는 당연히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

유백기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다시 대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무실에 비품이 떨어졌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비품 신청서 작성 후 경영지원부에 제출합니다. 당장 급할 경우에는 근처 부서에 양해를 구하고 빌려야 합니다.”

유백기는 꽁한 표정으로 영수증 한 장을 툭 던졌다.

“이거 영수증 처리 해 봐.”

대찬은 그 영수증을 받고 서류를 출력해서 풀로 붙였다.

영수증 붙이는 솜씨가 능숙한 도배공이 벽지를 바르듯 꼼꼼하고 야무졌다.

영수증을 붙인 서류에 정확히 펀치를 뚫고, 지출 증빙을 모아 놓은 서류철을 정확히 찾아 꽂아 놓았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이는 대찬이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걸 본 천원석 대리가 킬킬 웃었다.

“우리 신입 손끝이 아주 야무지네.”

“감사합니다, 대리님.”

“정말 다 숙지한 거 같은데? 조대찬 씨, 대단하네요? 백기 씨는 다 하는 데 일주일 내내 걸렸지, 아마.”

유백기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나흘입니다, 대리님.”

“우리 일주일에 닷새 출근하는데 나흘이면 일주일 내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리고 당장 저번 주만 해도 영수증 철 어디 있는지 몰라서 헤맸잖아?”

“…….”

천원석 대리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유백기의 속을 뒤집었다.

대찬은 천원석 대리의 행동이 마냥 달갑진 않았다.

천원석 대리는 타인의 갈등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부러 유백기의 속을 뒤집어서, 유백기가 자신에게 뺨 맞고 대찬에게 화풀이하기를 바랐다.

단합된 부하 직원보다 서로 갈등해서 자신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더 기껍다는, 그런 이성적이고 이기적인 판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천원석 대리가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지,

‘재밌으니까.’

천원석 대리는 대찬과 유백기를 번갈아 보면서 흐뭇이 웃었다.

대찬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아는 까닭에 속이 뒤틀렸다.

덕분에 유백기의 밸이 꼴릴 대로 꼴리는 건 고소한 일이긴 했다.

천원석 대리는 히죽 웃으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조대찬 씨.”

“네, 대리님.”

“이거 부장님께 드리고 와요. 얼굴도장 좀 찍을 겸.”

대찬은 그가 넘기는 서류를 넙죽 받았다.

“알겠습니다.”

“부장님 자리 알아요?”

“네, 압니다. 저기 파티션 높게 쳐진 자리 아닌가요?”

“맞아요. 뭐, 이제 하산해도 되겠네. 다녀와요.”

천원석 대리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찡긋했다.

천원석 대리가 칭찬할수록 유백기는 불쾌해졌다.

대찬이 부장의 자리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천원석 대리의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렸다.

“과장님, 새 식구도 왔는데 오늘 회식 한번 하는 게 어때요?”

“어, 그렇잖아도 부장님이 오늘 3팀 회식하라고 말씀하시더군. 신입 들어온 기념으로 팀 별 회식 자리에 한 번씩 참석하시겠다면서.”

“잘됐네요. 그럼 장소는…….”

유백기가 천원석 대리의 말을 가로챘다.

“신입 들어왔으니까 센스도 볼 겸 신입한테 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까? 작년 백기 씨처럼 맛대가리도 없는 LA갈비 구워 먹자고 하면 실망할 거 같은데.”

“그, 그건 아무것도 모를 때라…….”

유백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대찬은 듣고도 못 들은 척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부장 끼고 회식이라…….’

대찬은 씩 웃었다.

그는 곧장 부장의 자리로 갔다.

양동식 부장.

그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도 되었다.

누가 안 그렇겠냐마는 양동식 부장은 그야말로 상대방 하기 나름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야말로 신중해야 했다.

대찬에 대한 그의 평가는 하얀 도화지였다.

얼룩이라도 잘못 떨어뜨리는 날에는 고달파진다.

대찬은 양동식 부장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3팀 신입 사원 조대찬입니다.”

“어, 얘기 많이 들었어요. 기대가 큽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음, 그런데 무슨 용무지?”

“천원석 대리가 부장님께 인사도 드릴 겸 서류를 전달하라고 말씀하셔서 찾아뵀습니다. 이번 달 대(對)산업자원부 업무 경과 보고서입니다.”

양동식 부장은 대찬에게서 서류를 넘겨받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수고했네. 가 봐요.”

“예, 부장님.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외람되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의욕적인 질문은 신입의 미덕이지. 말해요.”

“혹시 이 근방에 부장님께서 좋아하시는 식당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양동식 부장이 풋, 웃었다.

“그건 왜 물어봐요?”

“우리 회사에서 오래 일하신 부장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면 정말 맛있는 식당일 거 같아서요.”

“틀린 말은 아니지.”

“나중에 동기들 데리고 가서 아는 척 좀 하려고 합니다. 너무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주제넘을 것까지야 있나.”

양동식 부장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다.

대찬이 주제넘지 않았느냐며 지레 밑밥을 던지자 양동식 부장은 이를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신입의 질문에 인색하게 구는 상사라는 평가를 피하고 싶은 까닭이었다.

양동식 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 비밀 맛집들을 소개해 줘야겠구만. 조 사원, 운 좋은 줄 알아. 아무한테나 알려 주는 게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부장님.”

양동식 부장은 대단한 기밀이라도 알려 준다는 양 목소리를 깔았다.

“사거리 골목 돌면 바로 있는 족발집, 옆 건물 지하에 있는 수제맥줏집, 어학원 맞은편에 있는 야끼도리집, 회사 뒤편에 있는 막횟집. 이 중에 아무 데나 골라잡아도 보통 이상은 가지.”

“신입이 쓸데없는 질문이나 한다고 혼내실 수도 있는데 친절하게 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동식 부장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이런 일로 신입 기를 죽여서야 쓰나. 앞으로 물어볼 게 있으면 기탄없이 물어봐. 아, 그리고 하나 더.”

“네?”

“최근에 죽이는 곱창집을 발견했거든? 회사에서 차 타고 가는 게 좀 번거롭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어. 곱창도 기가 막히고, 전골이 또 일품이란 말이야.”

대찬은 양동식 부장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부장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궁금해집니다.”

“그렇잖아도 송 과장한테 오늘 3팀 회식 어떠냐고 은근히 말해 놨는데, 여기로 가는 것도 좋겠군.”

“좋은 생각이십니다.”

대찬이 거푸 맞장구를 치자 양동식 부장은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럼 내가 말해 놓지.”

그렇게 말하고 송 과장의 자리로 전화를 걸려고 하자 대찬이 말했다.

“부장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부탁?”

“네. 정말 죄송하지만 그 식당, 제가 추천하면 안 될까요? 부장님 안목이시라면 상사들께 확실히 점수를 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양동식 부장이 껄껄 웃었다.

“하기야 그렇겠군. 나야 공치사 몇 마디 듣고 말겠지만 자네한테는 나름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어.”

“부장님 안목을 도둑질하는 것 같아 정말 송구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양동식 부장은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부장님.”

대찬은 미소를 띠며 양동식 부장 앞에서 물러났다.

서류만 놓고 오면 될 걸, 구태여 하늘처럼 높은 상사에게 구차하게 들러붙은 이유가 있었다.

유백기는 어떻게든 대찬에게 회식 장소를 추천하게 하려고 한다는 걸 어깨너머로 들어 알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을 굳이 떠넘긴다는 건 시커먼 속내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대찬이 회식 장소를 고르면 어떻게든 딴죽을 걸려는 심산이었다.

어딜 골라도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 대찬을 구박할 것이다.

대찬은 건너편의 유백기를 흘끔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널 모르냐.’

대찬이 끈질기게 양동식 부장에게 시시콜콜한 식당 얘기를 한 건, 이런 유백기의 공세에 대비해 그를 방패막이로 쓰고자 함이었다.

송희근 과장이 대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대찬 씨.”

“네, 과장님.”

“오늘 부장님 모시고 회식할 거야. 조대찬 씨 들어온 기념으로.”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송희근 과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대찬 씨가 괜찮은 식당으로 예약해 놔.”

“예? 제가요?”

대찬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래. 조대찬 씨 식당 고르는 센스 좀 보려는 거니까 선배들한테 묻지 말고 예약해. 기대할게.”

천원석 대리도 한마디 거들었다.

“신입 사원 매뉴얼도 하루 만에 씹어 먹었는데 회식 장소 정하는 건 껌이지?”

대찬을 띄워 주는 체하면서 압력을 넣었다.

대찬은 겉으로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오, 자신만만한데. 알아 둔 곳이라도 있나 봐?”

“아뇨. 그건 아니지만요.”

대찬은 부러 한 발 뺐다.

첫 출근 날이 첫 회식 날이 되었다.

양동식 부장은 3팀에 정시 퇴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시 퇴근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양동식 부장은 거들먹거렸다.

퇴근시간이 되고 가방을 챙기면서 유백기가 은근히 대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저, 여기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곱창집이 있거든요. 거기 예약해 뒀습니다.”

“뭐? 요 앞에도 널린 게 식당인데 뭐 그렇게 번거로운 곳을 잡아 놨어.”

유백기가 인상을 팍 쓰며 툴툴거렸다.

그러자 대찬은 부러 난처한 듯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가요.”

“쯧쯧, 괜히 너한테 맡겼다. 회식 장소 하나 제대로 못 정하냐.”

대찬은 바로 맞받아치지 않고 멋쩍은 웃음만 걸쳤다.

양동식 부장은 짐을 챙겨 나오면서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다들 차 타고 올 거지? 식당 앞에서 보자고.”

“예, 부장님. 따라가겠습니다.”

양동식 부장은 송희근 과장의 뒤에 선 대찬에게 눈을 찡긋했다.

대찬도 웃음으로 화답하며 허리를 꺾었다.

그걸 보지 못한 유백기가 양동식 부장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신입이 번거로운 곳에 예약을 해 놔서…….”

“뭐? …맛만 있음 그만이지, 거 빡빡하게 구는군.”

양동식 부장은 도리어 유백기에게 퉁을 놨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제 차로 걸어갔다.

도리어 꾸지람을 받은 유백기는 살짝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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