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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67화 (66/556)

난 할 수 있어 67화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도 점잖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첫 출근한 신입 사원 조대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패기는 좋지만 악을 쓰면 안 된다.

아침부터 신입 사원의 꽥꽥 질러 대는 소리를 반가워할 상사는 없다.

“어, 자네가 이번에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이구나. 반가워.”

인사를 받은 상사는 대찬에게 악수를 권했다.

대찬은 상사의 손을 맞잡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슬쩍 얼굴을 봤다.

‘아는 얼굴이네.’

아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저 사람을 필두로 출근하는 모든 사람이 익히 아는 얼굴일 까닭이 높았다.

아무리 나비효과가 있다지만, 대찬의 달라진 인생이 첫 번째 삶의 상사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을 확률은 미미했다.

가장 먼저 출근한 상사는 송희근 과장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도 필래유통 대외협력 3팀 팀장을 맡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대찬은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걸 입술을 악물어 참았다.

송희근 과장은 한마디로 새가슴이었다.

윗선 눈치를 보는 것은 물론 부하 직원 눈치까지 봤다.

물론 부하 직원의 기분을 맞춰 주는 건 상사로서 훌륭한 덕목이다.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부하 직원들이 송희근, 그의 이름 석 자를 비틀어 송호구라고 할까.

대찬은 이 졸장부의 손을 잡고, 눈칫밥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속으로 잠깐 위로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음? 내 소개를 했던가? 내가 과장인 줄 어찌 알아?”

“우리 팀이라고 하셨으니 3팀 상사님일 테고, 저희 팀 팀장님이 과장님이란 말씀을 들었거든요. 느껴지는 여유가 당연히 팀장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허허, 똘똘한 친구가 들어왔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대찬의 사소한 공치사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평소 들어 보지 못했을 테니 사소해도 그에겐 뜻깊을 거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의 기억을 불현듯 떠올렸다.

언젠가 송희근 과장은 팀원들에게 헤벌쭉 웃으며 떠벌렸다.

십수 년 만에 만난, 자신이 짝사랑하던 동창을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가 송희근 과장의 넥타이를 칭찬했다고.

그만큼 송희근 과장은 칭찬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그를 보자니 오랜만에 측은지심이 들었다.

송희근 과장은 대찬과 오래 마주하지 않았다.

대찬이 속으로 연민을 느끼긴 하지만, 엄연히 서열이 하늘과 땅이었다.

신입 사원을 가르칠 정도의 연차는 아니었다.

대찬은 다시 자리에 앉아 다음에 올 사람을 기다리며 출입문을 곁눈질했다.

8시 22분.

‘한태윤 대리.’

송희근 과장과 여러모로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다부진 체격, 날카로운 눈매까지 전형적인 FM 중대장 스타일이었다.

일처리가 야무진 정도를 넘어 냉혹할 지경.

까다롭고 깐깐한 만큼 부하 직원에게 크게 인망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하 직원들은 불만이 있어도 함부로 항의하지도 못했다.

이미 한태윤 대리는 부하에게 요구하는 것 이상의 몫을 해내는 까닭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아부도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발군의 업무 능력을 보여 주는 것만이 그의 호감을 얻는 방법이었다.

대찬은 송희근 과장 때보다 더 긴장된 모습으로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대외협력 3팀에 배치된 신입 사원 조대찬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은 한태윤 대리에게 무소용이기에 대찬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한태윤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 정도만 했다.

“그래요. 열심히 하세요.”

차가운 존댓말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대찬은 오기마저 생겼다.

첫 번째 삶, 10년 동안 마음이 단 1센티미터도 가까워지지 못한, 난공불락의 직장 상사의 마음을 어떻게든 무너뜨려 보리라.

8시 34분.

사무실을 공유하는 대외 협력 1팀, 2팀의 자리들도 점차 채워졌다.

서원웅도 출근해서 대찬과 눈인사를 나눴다.

허운, 유채경도 그랬다.

마찬가지로 신입의 입장에서 그 이상의 정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8시 38분.

‘천원석 대리.’

한태윤 대리의 동기였다.

동기 사이였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

한태윤 대리가 FM 중대장이라면, 천원석 대리는 뱃속에 구렁이 10마리는 들어 있을 것 같은, 정석대로가 아니라 요령으로 모든 걸 돌파하는 말년 병장이었다.

적당히 능글맞은 그는 한태윤 대리보다 주변에서 인기가 좋았다.

첫인상은 그렇지만, 그를 오래 봐 온 대찬은 오히려 천원석 대리 쪽이 더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웃는 얼굴은 가면에 불과하고, 그 뒤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송희근 과장, 한태윤 대리, 천원석 대리.

아직 출근하지 않은 대외협력 3팀 직원은 하나뿐이었다.

유백기, 유백기 사원.

8시 57분에 그가 출근했다.

‘간당간당 세이프 하던 버릇은 아직 못 고쳤군.’

대찬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유백기는 상사들에게 ‘꾸벅’보다는 끄덕이는 느낌으로 인사를 건네고 착석했다.

대찬은 그를 향해 몸을 틀면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대외협력 3팀으로 출근하게 된 신입 사원 조대찬입니다.”

유백기는 대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고는 옆 자리의 천원석 대리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천 대리님, 커피 드셨습니까?”

“어? 아직. 백기 씨 커피 할 거면 나도 한 잔 부탁해.”

“넵, 알겠습니다.”

유백기는 싹싹하게 대답해 놓고 대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찬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싸늘, 그 자체였다.

“조대찬 씨, 탕비실에서 커피 두 잔 타 와.”

“…알겠습니다.”

대찬은 군말 없이 탕비실로 향했다.

그걸 보고 천원석 대리가 유백기에게 슬쩍 말했다.

“백기 씨, 오늘 출근한 신입한테 왜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그래.”

“이런 건 신입이 해야죠.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해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뭐, 그런가.”

애초에 천원석 대리는 대찬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유백기가 있으니 사수 노릇 할 일도 없다.

빼먹을 거 없는 신입하고 주저리주저리 말 섞을 이유도 없었다.

유백기는 대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유백기가 바라는 풍경은 대찬이 멍청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며 탕비실이 어디입니까, 자신에게 되묻는 것일 테다.

하지만 대찬은 그의 바람과 달리 터벅터벅 탕비실로 가서 커피 두 잔을 대령했다.

믹스 커피가 어디 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대찬은 천원석 대리에게 한 잔, 유백기에게 한 잔 커피를 올렸다.

천원석 대리는 커피를 보고 흠칫 놀랐다.

“조대찬 씨.”

“예, 대리님.”

“나 머그컵에다 먹는 거 어떻게 알았어?”

대찬은 천원석의 커피는 머그컵에 따라 올렸다.

그는 물을 마시든 커피를 마시든 사무실에서 항상 자신의 머그컵을 이용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탕비실에 CWS라고 적힌 머그컵이 있어서요. 대리님 이니셜이라 여기에 커피 탔습니다. 혹시 제가 실수했습니까?”

“아니, 아니, 정확히 맞혔네요. 눈썰미가 대단한데요.”

“다행입니다.”

천원석 대리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러고는 다시 놀랐다.

“나 믹스 커피에 설탕 빼고 먹는 건 어떻게 알았지?”

“하하, 왠지 그냥 그럴 거 같아서…….”

“신내림이라도 받지 않고서야……. 아무튼 고마워요.”

천원석 대리는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찬은 유백기에게는 종이컵에 커피를 타 주었다.

유백기가 종이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대찬에게 컵을 내밀었다.

“조대찬 씨가 먹어 봐.”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유백기에게서 커피를 넘겨받았다.

그와 손가락을 닿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신중하게 받았다.

대찬은 보란 듯이 커피를 홀짝 마셨다.

‘내가 네놈 새끼 심중을 모를 줄 알고.’

유백기는 대찬이 커피를 타면서 가래침을 뱉지 않았을까 의심한 것이다.

대찬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너냐.’

대찬이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마시자 유백기는 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조대찬 씨가 먹어요.”

“네. 대리님 거 다시 타 드릴까요?”

대찬은 주위가 다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물었다.

주위 상사들이 흘끗,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유백기는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네. 그럼.”

대찬은 종이컵을 들고 제자리를 찾아갔다.

대찬이 큰소리로 물어본 건 유백기에게 커피를 다시 타 오라고 시키지 말라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타 오라고 하면 유백기는 주위 상사들에게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첫날부터 신입 군기 잡는 놈으로 인식될 것이다.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해서 상사들의 눈총을 자청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최소한의 눈치가 없다면 더 고마운 일이고.

대찬은 건너편의 유백기가 들으라는 듯 후루룩, 소리 내서 커피를 마셨다.

유백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천원석 대리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유백기와 대찬을 번갈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자질구레한 승강이에 관심이 없는 송희근 과장은 일 얘기를 했다.

“어, 조대찬 씨가 새로 왔으니까 누군가 맡아서 교육을 좀 시켜 줘야겠는데.”

천원석 대리가 바로 말을 받았다.

“백기 씨가 적격이죠, 뭐.”

“그런가? 그래도 유백기도 아직 업무 전반에 대한 이해는 떨어지지 않아?”

“본격적인 업무 투입되려면 시간 많이 남았는데요, 뭐. 일단 기초적인 것부터 익혀야죠. 그런 건 백기 씨가 맡아서 했으니 저희보다 되레 더 잘 알죠.”

“그, 그런가?”

송희근 과장은 천원석 대리의 말에 제 주장을 접었다.

천원석 대리가 유백기에게 말했다.

“백기 씨가 대찬 씨 맡아서 잘 가르쳐. 기본적인 것들에서 빵꾸 안 나게. 알았지?”

“알겠습니다, 대리님.”

유백기는 천원석 대리에게 깍듯이 말하고는 대찬을 바라봤다.

“조대찬 씨, 따라와요.”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유백기를 따라 연달아 있는 회의실 중에서도 가장 외진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문을 닫자 유백기의 눈빛이 돌변했다.

사무실에서는 유백기도 한낱 말단이었지만, 회의실 문이 닫힌 이상 유백기는 상급자고 대찬은 하급자였다.

유백기는 폐쇄된 공간에서 나오는 권위에 어깨가 잔뜩 올라갔다.

그는 대찬에게 적개심 가득한 눈빛을 뿌렸다.

“야.”

“네.”

“너 뭐냐?”

“예? 뭐가요?”

“너 왜 이 회사 들어왔어?”

그 말에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왜 들어왔겠어요, 먹고살려고 들어왔지.”

“개수작 부리지 마. 너 정도면 얼마든지 다른 회사 들어갈 수 있는데 왜 하필 여기냐고.”

“칭찬이죠? 고마워요, 높게 평가해 줘서.”

대찬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에 유백기는 대찬의 멱살을 잡았다.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개소리 늘어놓지 마.”

“나도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이거 좀 놓지.”

대찬은 멱살을 쥔 유백기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이 새끼가…….”

“상사 대우 해 줄 때 제대로 받아. 짓뭉개지고 나서 찔찔 짜지 말고.”

“이 개새끼가!”

“한 번만 더 분별없이 욕지거리 싸대면 그땐 진짜 재미없다.”

분명한 경고에 유백기도 더 덤비지 못했다.

대찬은 푹 한숨을 쉬면서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배우는 입장이니까, 잘만 가르치시면 우리 사이 그렇게 안 나빠도 됩니다.”

“…건방 떨지 마. 회사는 대학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말 안 해도 알고 있어요, 아주 잘.”

대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첫 번째 삶에서 10년간 뼈저리게 겪었다.

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할 작정이었다.

유백기가 대찬의 교육을 맡았지만 교육은 형편없었다.

애초에 유백기의 가르치는 능력이 좋은 편도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성의였다.

유백기의 가르침에는 성의가 아예 없었다.

대찬이 미우니 당연히 성의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미운 까닭은 아닐 것이다.

유백기는 대찬의 업무 능력이 탁월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실수도 저지르고 상사들에게 욕도 먹고 사고도 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자신의 가르침이 무성의해야 한다고 여겼다.

‘단세포동물도 아니고.’

유백기의 무성의가 대찬의 입장에서도 반가웠다.

애초에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녀석과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게다가 이미 다 아는 내용을 굳이 재탕, 삼탕으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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