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66화
첫 번째 삶에서 소속되었던 부서와 같았다.
유백기가 근무하는 부서이기도 했다.
운명인지 무엇인지 대찬을 같은 환경으로 이끌었다.
서원웅 역시 대외협력부로 발령을 받았다.
보통 오너 가문의 자제라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는 핵심 부서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회사의 컨트롤 타워 격인 기획실이나 촉망받는 신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사업부 등이 그랬다.
그런데 서원웅은 대찬과 마찬가지로 대외협력부에 배치되었다.
서청규는 눈엣가시 같은 조카가 범의 아가리로 자청해서 굴러 들어온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작정이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사무친 후회를 안고 짐을 싸게 만들 작정이었다.
대외협력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서원웅이 대찬에게 물었다.
“대외협력부가 뭐 하는 부서야?”
“나도 너랑 마찬가지로 백지 상태야. 모르지, 나도.”
대찬은 대외협력부에서만 10년을 근무했다.
세세한 일이야 기억에서 가물가물했지만, 업무의 전반적인 틀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서원웅의 앞에서 알은체를 할 이유가 없었다.
대외협력부의 ABCD를 줄줄 읊어 봤자 잘난 체밖에 되지 않았다.
서원웅은 지금까지 대찬에게 의지해 왔다.
대학 시절, 대찬은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의지하면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모른다는 대찬의 대답은 서원웅을 덜컥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미지의 세계라는 뜻이다.
대찬도 이제는 더 이상 안전한 그늘을 드리워 주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침을 꼴깍 삼키는 서원웅을 보고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야. 필요 이상으로 겁먹을 건 없잖아.”
“그, 그렇겠지……?”
서원웅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필래유통은 택배부터 백화점까지 수많은 사업부를 거느린 공룡 계열사였다.
광범위한 사업을 한 지붕 아래 두는 건 서청규 사장의 자구책이었다.
필래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놓고 서청수 회장과 맞붙은 끝에 서청규 사장은 패배했다.
하지만 그가 물려받은 지분도 막대했는데, 서청규 사장은 이를 한 회사로 묶어 서청수 회장이 자신을 괄시하지 못하도록 덩치를 키웠다.
그렇기에 대찬과 서원웅이 배치된 대외협력부의 규모도 상당했다.
대외협력부장부터 말단인 대찬과 서원웅까지 전체 팀원의 숫자가 열댓 명에 달했다.
비대한 조직만큼 산하에 1팀, 2팀, 3팀과 대외협력지원팀을 거느렸다.
인사팀의 직원이 대찬과 서원웅에게 말했다.
“조대찬 씨는 대외협력 3팀, 서원웅 씨는 1팀에 배치됐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찬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필래유통의 대외협력부는 같은 이름 아래 묶였지만 팀 별로 성격이 판이했다.
대찬은 서청규 사장이 왜 자신을 3팀에 배치하고 서원웅을 1팀에 배치했는지 그 까닭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1팀은 속 빈 강정, 3팀은 늪.’
10년 동안 필래유통의 대외협력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대찬은 이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대외협력부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짧은 평가에 공감했다.
대외협력 1팀은 비교적 사소한 일에 동원되었다.
필래유통이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는 지역 단체와 사랑의 김치 담그기를 한다든지, 사업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지역사회, 경쟁 업체, 하청 업체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간담회나 때때로 술자리를 갖는다든지 하는 업무였다.
그 또한 가치 있는 업무였지만, 고속 승진이나 사내 위상하고는 동떨어져 있었다.
서청규 사장은 서원웅을 그런 한직으로 배치해, 발톱이나 이빨을 드러낼 기회를 원천 차단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대찬이 배치된 대외협력 3팀은 대찬이 가장 잘 알았다. 첫 번째 삶에서도 대외협력 3팀이었던 까닭이다.
대외협력 3팀은 1팀과는 판이한 업무를 해냈다.
소위 대관 업무라고 불리는 일이었다.
대관 업무란, 풀어 말하면 관청을 상대하는 업무였다.
여기서 관청은 정부 부처가 될 수도 있고, 국회가 될 수도 있다.
각 기업의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정부와 국회를 끊임없이 상대했다.
밥을 사고 술을 먹이면서 자기 회사에 필요한 정보를 캐고 회사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대한민국은 로비가 불법이다.
때문에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을 해냈다.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자신의 정보망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밥과 술을 사며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취재원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런 까닭에 대관 업무를 맡은 대외협력 3팀의 일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아래로 가라앉는 늪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요령이 출중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설픈 치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의 경계를 침범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도 대관 업무는 늪이었다.
이런 속사정을 알고 있으니 회사가 서원웅을 1팀으로, 자신을 3팀으로 보낸 까닭을 대찬은 능히 간파해 냈다.
서원웅에게는 한없이 가벼운 업무를 맡겨 출세의 기회를 아예 주지 않는 동시에 대찬에게는 대관 업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겠다는 수작이었다.
물론 대찬은 그들의 의도대로 쉽게 무너질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나를 3팀에 넣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대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허운과 유채경도 대외협력부에 배치되었다고 했다.
허운은 2팀, 유채경은 1팀이었다.
허운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어떻게 우리 전부 같은 부서에 배치된 거죠?”
“우연이라기보다는 의도된 결과겠죠.”
대찬의 대답이 허운은 의아했다.
“의도됐다뇨?”
“원웅이가 우리 사장님한테는 눈엣가시니까, 원웅이랑 잠깐이나마 정을 쌓았던 우리도 한데 묶어 놓은 거라고 봐야겠죠.”
허운은 펄쩍 뛰었다.
“그럼 우리도 찍힌 겁니까?”
“약간은?”
“아, 엿 됐네!”
허운의 반응은 과격했지만 솔직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를 다독였다.
“너무 그럴 것도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잔챙이니까.”
서청규 사장이 대찬은 의식할 수 있어도 허운이나 유채경까지 신경 쓰진 않을 것이다.
대찬의 위로에 허운의 마음이 금세 풀렸다.
대찬은 허운과 유채경의 처지를 걱정하진 않았지만, 그 둘까지 대외협력부에 배치했다는 것은 한 가지 우려할 만한 점을 시사했다.
서청규 사장의 견제가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긴장의 필요성은 분명했다.
첫 출근 전 마지막 주말.
대찬은 가까운 에피니키온 선후배를 모아 거창하게 취업 턱을 냈다.
최재한도 대찬의 부름을 받아 자리에 참석했다.
대찬의 강요로 최재한 역시 지갑을 열어야만 했다.
“네 취업 턱 내는데 왜 내 지갑까지 터는 거야?”
“너도 취업했잖아. 나만 한 것처럼 얘기하네.”
최재한은 툴툴거렸다.
“야, 기자 월급 쥐꼬리야.”
“그 정도면 메이저야. 눈만 높아가지고. 누군 쥐꼬리 아닌 줄 알아?”
“넌 대기업이잖아.”
대찬은 최재한의 항변을 묵살했다.
그는 최재한, 그리고 서원웅까지 끌어들여 판을 키웠다.
구름처럼 몰리는 에피니키온 사람들을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는 이미 취직해 자리를 잡은 민승기도 자리에 기웃거렸다.
대찬은 그를 보고 툴툴거렸다.
“선배는 돈도 많이 버시면서 기어코 제 주머니를 털어 가셔야겠어요?”
“너도 나 취직했을 때 털어 갔잖아.”
“취업 턱은 내리사랑이지, 역류하는 법이 없어요.”
민승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조대찬 대가리 많이 컸네. 옛날엔 콧물 찔찔 흘리던 게.”
“많이 컸죠, 그럼!”
대찬은 실실 웃었다.
민승기도 미간에 잡은 주름을 풀고 웃었다.
민승기를 비롯한 선배들도 여럿 왔고, 후배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참석했다.
대찬은 기분 좋게 주머니를 털었다.
다만, 불판 위의 고기에 핏기가 가시기 무섭게 해치우는 마강국을 보고서는 슬슬 지갑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야, 좀 천천히 먹어.”
“지금 천천히 먹고 있는데?”
대찬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민승기에게 슬쩍 귀띔했다.
“선배, 저도 내년에 마강국 취직하면 취업 턱 얻어먹으러 와야겠어요.”
“역시 당해 봐야 아는 거지.”
그날 모인 사람은 20명이었는데, 마강국의 활약에 힘입어 삼겹살 50인분을 해치웠다.
계산서에 바를 정 자 10개가 금방 채워졌다.
“마강국, 꼭 좋은 데 취직해라. 사흘 굶고 가려니까.”
“취업 턱은 내리사랑이지. 상식이 없어.”
마강국은 남산처럼 부른 배를 두드리며 대찬의 말을 일축했다.
“야, 민승기가 그러는데 너 어제 취업 턱 냈다며?”
“소식도 빨라요.”
김산하가 툴툴거렸다.
그녀는 아침이 되자마자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첫 출근 앞뒀으면 나한테 말을 해 줬어야지.”
“이역만리 타국에 있어서 취업 턱도 못 얻어먹을 텐데 말해 뭐해.”
“조대찬 싸가지는 불치병인가 봐.”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실실 웃었다.
“알았어. 다음부턴 무슨 일 있으면 1번으로 알려 줄게.”
“그렇게 나와야지. 부서 배치는 받았고?”
“응, 대외협력부.”
“필래유통 대외협력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거 같은데.”
김산하가 통 생각해 내지 못하자 대찬이 웃으면서 정답을 알려 주었다.
“유백기 선배가 거기 있잖아.”
“아, 유백기!”
의문이 풀린 김산하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시 얽히게 됐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운명이야.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 야.”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대찬의 의지가 분명히 작용했기에 김산하의 말은 틀렸지만, 대찬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피곤하게 됐지, 뭐.”
“당연히 너도 알겠지만 너한테 억하심정 있을 거 아니냐고. 지금까지 당했던 거 배로 풀려고 들 텐데…….”
김산하의 걱정에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또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이 아니잖아. 너무 걱정할 거 없어.”
“그렇긴 하지.”
대찬의 웃음이 김산하에게도 옮겨 갔다.
대찬의 말은 단순히 김산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말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생각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유백기지.’
그건 각오인 동시에 자기실현적 예언이었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됐다.
대찬에게는 여느 월요일과는 느낌이 달랐다.
첫 출근.
대찬은 갑갑할 정도로 넥타이를 맸다.
약한 질식감이 그에게 긴장을 불어넣었다.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 수도 없이 했을 인사를 부모님께 건넸다.
발가락 끝이 오므라질 정도로 느낌이 묘했다.
된장국을 끓이던 어머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어 대찬을 바라봤다.
“아침도 안 먹고 가니?”
“먹고 가면 늦어요.”
“하기야 첫날부터 지각할 순 없지. 우유라도 한 잔 마시고 가.”
대찬은 우유만큼은 사양하지 않고 단번에 죽 들이켰다.
미지근하게 데운 우유가 빈속에 얌전히 스몄다.
대찬은 우유가 묻은 윗입술을 손등으로 슥 닦으며 다시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요.”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는 아버지가 무심한 듯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성질 죽이고 고분고분하게 굴어라. 첫날부터 상사한테 대서면 회사 생활 꼬인다.”
“알았어요.”
대찬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버지의 당부를 따를 수 없었다.
상사가 다름 아닌 유백기였다.
성질 죽이고 고분고분.
이성적으로도 그렇거니와 본능마저 그걸 거부했다.
대찬은 집에서 나와 익숙한 풍경을 지나갔다.
마을버스를 타고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탔다.
6호선을 타고 내려가 3호선으로 갈아탔다.
3호선을 타고 가다가 다시 9호선으로 갈아탔다.
일찍 일어나 노곤한 몸이 출근길 지하철의 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출근만으로도 근무를 다한 것처럼 힘에 부쳤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대찬은 필래유통 사옥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은 9시.
대찬이 출입 게이트를 통과한 시간은 8시였다.
개미가 페로몬을 따라 거침없이 전진하듯 대찬은 높고 넓은 필래유통 사옥에서 대외협력부 사무실을 찾아갔다.
가장 먼저 출근한 대찬은 출입문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상사들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8시 15분.
누군가 출입문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인기척을 감지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이 공간에 있는 절대다수가 대찬의 상사였다.
대찬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