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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64화 (63/556)

난 할 수 있어 64화

“필래란 고객을 반드시 오게 만든다는 뜻의…….”

대찬 역시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번째 하는 일이었지만 생각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생각과는 별개로 대찬의 입술은 창업주 선대회장님의 고귀한 뜻을 줄줄 읊었다.

그런데 단순한 낭독이 아니었다.

손으로 잡히는 두께가 어림잡아도 서른 쪽은 돼 보였다.

게다가 글자 크기는 8포인트.

이 속도로 읽는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분량이었다.

신입 모두가 일정한 박자로 읽어야 하므로 낭독은 더욱 더뎠다.

‘젠장…….’

이라크 파병으로 단련된 신체에도 장시간의 기마 자세는 버티기 어려웠다.

하물며 선천적 약골인 서원웅은 오죽할까.

여자인 유채경 역시 버티기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1시간쯤 지나자 이탈자가 발생했다.

첫 이탈자의 불명예는 서원웅이 가져갔다.

서원웅은 입에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낭독을 하는 신입들의 목소리는 점점 힘에 부쳤다.

잘 버티던 허운도 비지땀을 흘리다 뒤로 우당탕 넘어져 버렸다.

“안타깝습니다. 올해 신입들은 패기가 부족하네요.”

사회자는 혀를 끌끌 차며 얄밉게 쏘아붙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티고 선 신입들은 복장이 뒤집어졌다.

“강인한 체력을 갖춰 강인한 정신력으로 회사에 보탬이 되는 인재로 더 성장하길 바랍니다. 정독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우선 숙소로 돌아가 잠깐 휴식을 취하겠습니다.”

톡톡 쏘는 말에 허운이 이를 갈았다.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성질 같아서는 확 그냥!”

“신입이 성질 부려서 득 될 거 하나 없어요. 일단 가시죠.”

대찬은 그렇게 허운을 다독이고 몸을 못 가누는 서원웅에게 다가갔다.

“걷기 힘들지? 업혀. 내가 숙소까지 같이 가 줄게.”

“너도 힘들 텐데…….”

“힘들어. 그래서 얼른 숙소에 너 갖다 버리고 나도 퍼질러 있으려고.”

서원웅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대찬에게 순순히 업혔다.

키도 작고 비쩍 마른 서원웅을 대찬은 수월하게 업었다.

그걸 보고 배운 바가 있는지 허운이 주춤주춤 유채경에게 다가갔다.

“채경 씨, 업혀요.”

그러자 유채경이 허운을 빤히 올려다봤다.

“제가 왜요?”

“네? 아, 아녜요…….”

허운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찬의 뒤를 따랐다.

짧은 휴식 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해가 졌다고 일과가 끝난 게 아니었다.

사회자인 인사팀 직원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에, 오늘 정독 시간에 보인 여러분의 부실한 모습에 임원분들께서 많이 실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예정된 간담회를 취소하고 다른 일정으로 변경했습니다.”

대찬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신입 모두가 그런 표정이었다.

“저녁 식사 후 야간 산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야간 산행?”

신입들은 웅성거렸다.

정독이니 뭐니로 잔뜩 기진맥진시켜 놓고 야간 산행이라니.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신입들의 얼굴 가득 불만이 떠올랐다.

“야간 산행이 어려운 분들은 미리 말씀하시면 열외가 가능합니다.”

“전 열외할 겁니다.”

허운이 호기롭게 말하고 나서려 했다.

그러나 사회자인 인사팀 직원은 조건을 달았다.

“물론 열외하시는 분들은 연수원 성적이 좋을 수 없겠죠? 같은 대우를 받을 순 없으니까요.”

그 말에 허운은 다시 엉덩이를 주저앉혔다.

그의 볼은 잔뜩 부어 있었다.

모두들 불만이었지만 열외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독으로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된 서원웅도 몸을 일으켰다.

“나도 야간 산행 할래.”

“안 돼. 하지 마.”

대찬은 서원웅을 도로 주저앉혔다.

서원웅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인사팀 선배가 말하는 거 못 들었어? 야간 산행 안 하면 대우를 제대로 안 해 주겠다잖아.”

“저거 다 허세야. 야간 산행은 네 회사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없어.”

대찬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단호할 수 있는 건 경험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서원웅은 불안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어?”

해 봐서 안다고 할 수는 없기에 대찬은 논리적인 이유를 들었다.

“야간 산행은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야. 당연히 점수에 들어갈 리가 없지. 걱정 붙들어 매고 그냥 쉬어.”

“…그래도 될까?”

“응.”

“그럼 너도 굳이 안 가도 되잖아?”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도 다 요령껏 해야지. 조 전체가 빠져 버리면 곤란해.”

서원웅은 대찬의 말을 듣고 야간 산행에서 열외하기로 결정했다.

나머지는 이를 악물고 야간 산행에 참여했다.

대찬도 속에서 부아가 일었지만 꾹 참았다.

산행도 힘든데 야간 산행은 더 힘들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조심스러웠다.

신경이 곤두서니 정신력의 소모도 심했다.

그렇지 않아도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파른 산을 오르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체력이 괜찮은 편인 대찬도 헉헉, 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허운은 아예 넋이 나가 버렸다.

유채경도 견디기 힘든 눈치였지만, 이를 꾹 악물고 야무지게 대찬의 꽁무니에 붙었다.

대찬은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채경 씨, 할 만해요?”

“죽을 거 같아요.”

“너무 힘들면 말해요. 인솔자한테 가서 중간에 빠진다고 할 테니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럼 처음부터 단단히 찍힐 텐데.”

그 말에 대찬은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적당히 시늉만 하고 끝날 줄 알았던 산행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유채경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

“채경 씨, 어디 다쳤어요?”

유채경은 앉은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발목 접질린 거 같아요.”

“허운 씨, 채경 씨 좀 잠깐 봐줘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앞선 동기의 등을 두드렸다.

“여기 부상자가 발생해서 그런데, 앞에 좀 전달해 주시겠어요?”

“에? 에.”

동기는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앞에 선 이에게 건성으로 전달했다.

그게 선두의 인솔자에게까지 닿을 거 같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앞질러 선두까지 가기엔 길이 너무 좁았다.

대찬은 숨을 흡 들이마시고 외쳤다.

“부상자 발생했습니다! 잠깐 멈춰 주세요!”

그의 외침에 일부가 잠시 주춤해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흘긋흘긋 뒤를 보던 이들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산행은 계속 이어졌다.

‘이것들이 진짜…….’

야속하게 멀어져 가는 행렬을 보고 대찬의 인내심도 고갈되었다.

이미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동기들이었다.

적극적인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매정한 태도는 원망스러웠다.

대찬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인솔자 선배님! 부상자 발생했다고요! 좀 멈춰 줘요!”

행렬은 다시 잠깐 멈췄다.

맨 앞에서 건성의 대답이 들려왔다.

2기수 선배라는 인솔자는 귀찮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럼 알아서 빠져요!”

그걸로 끝이었다.

대찬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는 유채경에게 다시 돌아왔다.

“내려갑시다.”

“…밤길인데…….”

“그냥 내려가라고 하니 내려가야죠, 별수 있습니까. 진짜 이 정도로 야만적일 줄이야.”

대찬은 퉁퉁 부은 발목을 잡고 있는 유채경을 내려다봤다.

“못 걸으시죠?”

“…네.”

유채경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낙오하지 않아도 되는 대찬과 허운이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찬은 유채경을 등지고 무릎을 굽혔다.

“업혀요.”

“네? 조대찬 씨도 힘들 텐데…….”

“안 업히면 우리 여기서 밤새워야 돼요. 아직 힘 좀 남았으니까 얼른 업혀요.”

그러자 유채경은 마지못해 대찬의 등에 업혔다.

그러자 허운이 뒤에서 툴툴거렸다.

“채경 씨, 아까는 나한테 안 업히더니…….”

으차, 유채경을 업은 대찬이 허운에게 쏘아붙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업으시든가요. 체력이 되시면.”

“…됐어요.”

허운은 심통 난 얼굴로 산을 걸어 내려갔다.

역시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힘들었다.

게다가 어둠 때문에 랜턴까지 비추려니 더했다.

고생도 이런 생고생이 없었다.

“많이 무겁죠. 죄송해요…….”

“네. 무릎 아작 날 거 같아요.”

대찬의 솔직한 말에 유채경은 잔뜩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정말! 저 때문에…….”

“그래도 동기 좋다는 게 뭡니까.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요.”

“그럼요, 사야죠! 당연히 사야죠. 비싼 걸로 살게요.”

둘의 모습을 보고 허운의 아랫입술이 더욱 튀어나왔다.

“아주 정분나겠네, 정분나겠어!”

“저, 정분이라뇨!”

유채경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허운은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맞네, 정분.”

당황한 유채경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녀는 겨우 다시 대찬의 목에 팔을 걸었다.

유채경의 몸이 대찬의 등에 꽉 밀착했다.

은은한 온기가 전해졌다.

유채경은 대찬의 등에 뺨을 댄 채 허운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허운 씨, 그런 말 하지 마요. 대찬 씨가 싫어하시잖아요…….”

“아, 왜 저는 허운 씨고, 조대찬 씨는 대찬 씹니까? 성 떼고 부르기 있습니까?”

“허운 씨는 이름이 외자니까 그렇지!”

“와, 이제 반말까지?”

티격태격하는 그들 때문에 피로가 더 쌓이는 대찬이 한숨을 쉬었다.

“조용히 좀 갑시다.”

“그래요! 조용히 좀 가요.”

유채경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허운과의 대화를 종결했다.

남녀에게 두들겨 맞은 허운은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산을 다 내려왔을 즈음에는 대찬도 완전히 방전돼 버렸다.

숙소로 돌아온 대찬 일행을 본 서원웅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찬아, 무슨 전쟁터 다녀온 사람 같아.”

“응, 차라리 전쟁터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대찬은 유채경을 내려놓고 바로 대자로 뻗어 버렸다.

“아으, 죽겠다…….”

“그래, 얼른 쉬어라. 수고했어.”

서원웅의 말에 웅얼웅얼 불분명한 대답만 남기고 대찬은 바로 뻗어 잠들었다.

새벽 2시쯤 웅성거리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기들 같았다.

어렴풋이 쌍시옷과 지읒으로 시작하는 욕설들이 낮게 들려왔다.

그들의 마음을 대찬도 충분히 이해했다.

아침이 되자 다시 강당으로 모였다.

전날의 극심한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 인사팀의 아무개가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들 야간 산행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회사 생활에 있어 강인한 체력은 필수라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듣는 신입들은 죄다 뭐 씹은 표정이었다.

그들의 표정에도 인사팀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사장님과의 간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간담회라고 했지만, 사장인 서청규로부터의 일방적인 훈계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서청규는 신입들에게 불만을 쏟아 냈다.

“어제는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정독 시간은 우리 필래유통의 오랜 전통인데, 지금껏 이렇게 허약했던 기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야간 산행을 지시한 겁니다.”

신입들의 표정이 더 썩어 들어갔다.

“요즘 젊은이들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지요. 책상물림으로 공부만 하니까 체력이 달리는 겁니다. 체력이 달리면 야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서청규는 그 후로도 한참을 체력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전날의 피로가 그대로 남은 신입들의 귀에는 잡소리도 이런 잡소리가 없었다.

20분가량을 쏟아 낸 뒤에야 서청규는 말에 대한 욕구가 해소된 듯했다.

그는 빙긋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명색이 간담횐데 나만 주저리주저리 떠들 순 없지요.”

서청규는 좌중을 죽 둘러봤다.

“나한테 할 말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 뭐든 좋아요. 상욕만 안 하면 돼.”

사장이 그렇게 말해 봤자 신입들은 손을 들지 못했다.

잠잠한 신입들을 보고 서청규는 끌끌 혀를 찼다.

“이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정말 할 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까?”

이에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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