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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63화 (62/556)

난 할 수 있어 63화

허운도 대찬과 서원웅을 반겼다.

허운은 면접장에서 물정도 모르고 멋대로 떠들어 댄 걸 기억하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면접장에선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고마웠어요.”

“뭘요. 허운 씨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대찬은 허운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허운 씨도 유통으로 발령 받으셨네요.”

“예. 불운하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운이 필래유통으로 발령 받은 걸 불운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지나치진 않았다.

필래유통은 필래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룹의 서열 2위인 서청규 사장의 힘이 응집된 계열사다.

필래유통은 단일 계열사로는 필래그룹 내에서 가장 덩치가 거대하고, 자금 흐름의 규모도 컸다.

하지만 직원들은 필래유통을 기피했다.

서청규 사장의 경영 철학 덕분이었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수직적 회사 문화.

상대적으로 적은 봉급과 열악한 복지.

잦은 야근과 회식을 지나치게 선호하는 풍토.

직원들이 충분히 꺼릴 만했다.

그걸 10년이나 겪어 본 대찬이었으니 허운의 불평이 투정으로 들리진 않았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허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우리 하기 나름이잖아요.”

“그것도 한계가 있죠. 하고 많은 계열사 중에 하필 유통이라니.”

허운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본성은 안 나쁜데 입이 지나치게 솔직한 스타일이네. 고생 좀 하겠어.’

대찬은 속으로 허운을 동정했다.

한참 한숨을 쉬던 허운은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그래도 뭐, 할 말은 없어요. 붙은 게 용하거든요. 사실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음? 면접장에선 저한테 그렇게 훈수 두시더니?”

허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하룻강아지가 요란하게 짖는 거예요. 지방대 출신에 변변한 경력도 없어요, 저.”

“인턴 한 번 안 해 봤다고 꼬집으시더니.”

“인턴, 딱 한 번 해 봤죠. 그것도 이름 한 번 못 들어 봤을 곳에서. 미안해요. 면접 때 자신감 얻으려고 블러핑 좀 해 봤어요.”

대찬은 씩 웃었다.

“그렇게 초장부터 주눅 들 건 없잖아요. 안 그래도 상사들이 주눅 들게 해 줄 텐데.”

“그건 그렇네요. 아무튼 고마웠어요. 조대찬 씨 아니었으면 나 이 회사 못 들어왔어요.”

“면접관이 엉망이었잖아요. 면접관이 보통 정도만 됐어도 허운 씨는 넉넉히 합격했을 겁니다.”

허운은 대찬의 말에 웃음을 짓고는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조대찬 씨랑 서원웅 씨는 좀 의외네요.”

“뭐가요?”

“유통 말고 다른 데로 발령 받을 줄 알았거든요. 특히 서원웅 씨는 회장님 아드님이라고 했는데… 역시 두 분도 지방대 출신의 벽을 못 넘은 건가요?”

“멋대로 넘겨짚지 마요. 그래도 사대문 안에서 학교 나왔으니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근데 왜 필래유통으로 발령 받은 거죠?”

대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겠습니까. 까라면 까는 거지.”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좋네요.”

허운은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동기잖아요.”

“물론이죠. 동기 사랑, 나라 사랑.”

대찬도 웃으면서 기꺼이 악수를 받아 주었다.

서원웅도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요.”

“아이고!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도련님!”

대찬은 허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양반도 나사 몇 개 풀린 게 우리 과네.’

신입 사원 연수는 2주간으로, 그곳에서 숙식했다.

대찬은 서원웅, 허운과 한 조가 되었다.

한 조는 4명으로 구성되는데, 나머지 1명은 셋과는 달리 여자 신입 사원이었다.

그를 보고 대찬과 서원웅, 허운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와, 예쁘다…….’

그건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고 연수원에 있는 누구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품은 생각이었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미인이었다.

“유채경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아, 잘 부탁…….”

그의 이름을 듣고 대찬은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유채경은 대찬을 지금 처음 보지만, 대찬은 그를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유채경은 대찬의 선임이었다.

유채경은 대찬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에 성공한 까닭이었다.

‘저 사람도 유백기한테 원한이 많았지.’

훌륭한 외모의 유채경을 유백기는 가만두지 않았다.

유백기는 스토킹에 가까운 구애를 벌였다.

당연히 유채경에게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유채경이 여러 차례 단호히 뿌리치자, 유백기는 돌변하여 그녀를 쥐 잡듯이 잡았다.

그건 대찬이 유백기의 공식 노예로 낙인이 찍히기 전까지 이어졌다.

유채경은 익명으로 진행되는 직원 평가에서 유백기의 이런 악행을 낱낱이 고했지만, 윗선에선 이를 묵살했다.

도리어 미운털이 박힌 유채경은 더 버티지 못하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말았다.

대찬만큼이나 고달픈 회사 생활을 했던 그녀였다.

대찬은 자연히 유채경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품었다.

안쓰러운 선임을 동기 자격으로 만나게 되니 마음이 묘했다.

대찬이 빤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유채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미모에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찬은 얼른 시선을 거둬 그 오해를 불식시켰다.

연수원에 도착하고 잠깐 쉬는 시간에 대찬과 서원웅, 허운은 화장실로 갔다.

일을 보고 허운은 대찬의 어깨를 짚었다.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손도 안 닦고 어디에 손을 올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유채경 씨 봤죠?”

“시력 멀쩡하거든요. 당연히 봤지.”

허운이 대찬의 귀에 대고 은밀히 속닥거렸다.

“예쁘죠.”

“예쁘던데요.”

서원웅도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허운은 살짝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계속 속닥거렸다.

“내 거예요.”

“에?”

“내가 침 발라 놨으니까 건들지 마시라고요.”

대찬은 어깨에 올라간 허운의 손을 탁 쳐서 떨어뜨렸다.

“건들 생각 없었고요. 제가 안 건드린다고 해서 채경 씨가 허운 씨한테 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지금 나 무시하는 거예요? 이래 봬도 나 여자 여럿 울렸어요.”

“여자 때리고 그러면 안 돼요.”

“아, 진짜!”

대찬은 허운 보란 듯이 세면대에서 손을 꼼꼼히 씻으며 말했다.

“허운 씨 연애 사업 훼방 놓을 생각은 없는데요, 괜히 무리수 둬서 팀 분위기 해치지는 말아요. 그땐 아주 그냥!”

“그냥 뭐!”

“암튼 그런 일 없게 해요.”

대찬은 손에 묻은 물기를 허운의 배에 슥슥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일 보고 손 안 씻는 남자 딱 질색해요.”

대찬은 툭 던지듯 말하고 화장실을 나갔다.

서원웅도 큭큭 웃으며 뒤따라 나갔다.

“재수 없어.”

투덜거리던 허운은 슬금슬금 세면대로 향해 손을 씻었다.

대찬은 신입 사원 연수가 싫었다.

이미 경험해 봤기 때문에 얼마나 후진적인 시스템으로 진행되는지 훤히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걸 모르는 햇병아리들은 자신이 이제 진정한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이 순간을 즐기고 만끽하는 눈치였다.

허운만 해도 그랬다.

그는 대찬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왜 이렇게 울상이에요?”

“울상까진 아니고요…….”

“훈련소 들어가는 입대 장병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지금.”

“아마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거 같아서.”

허운은 픽 웃었다.

“머리 빡빡 안 민 것만 해도 입대보단 낫네요.”

그 말에 대찬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당하기 전까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으니까.

필래유통의 신입 사원들이 강당에 도열했다.

앞에는 서청규 사장을 비롯한 필래유통의 임원진이 자리를 꿰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신입 사원들과는 달리 따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입 사원을 앞에 세워 두고 서청규가 환영사를 했다.

“필래유통의 새로운 가족이 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의 눈은 시종 서원웅에게 향해 있었다.

서청규 사장 역시 서원웅이 왜 하필 여기로 굴러왔는지 의아했다.

도대체 무슨 객기로, 객기가 아니면 무슨 꿍꿍이로 범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온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서청규의 눈빛은 온기라곤 전혀 없이 싸늘했다.

서원웅은 초면인 삼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대찬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청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유백기가 대찬에게 소악(小惡)이라면, 서청규는 거대한 악이었다.

이제는 서원웅과도 엮이게 되었으니 그를 향한 칼끝을 더욱 벼려야 했다.

“여러분은 필래유통의 새로운 엔진입니다. 열심히 뛰어 주길 바랍니다.”

서청규는 환영사를 짧게 마무리했다.

그러자 신입 사원들은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그들을 먹고살게 해 줄 주인님이니 박수는 아무리 열렬해도 부족했다.

연수라고 해서 물렁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조별로 나누어 교육을 받고 과제를 수행했다.

게다가 밤마다 술자리까지 벌어지니 쪽잠은 기본이고, 피로는 가실 새가 없었다.

피곤하다고 늘어져라 하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매의 눈을 한 선배들이 신입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점수 안 깎이고 무사히 연수를 마치려면 일거수일투족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날이 지날수록 점점 기강이 흐트러졌다.

신입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연수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사회를 맡은 인사팀의 아무개가 말했다.

“지금부터 정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신입들에게 각각 한 뭉치의 종이가 주어졌다.

허운이 대찬에게 귓속말을 했다.

“정독? 정독이 뭐야? 조대찬 씨 알아요?”

대찬은 마른웃음을 지었다.

“있어요, 엿같은 거.”

“…엿같은 거?”

허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곧 정독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회를 맡은 인사팀의 아무개는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자랑스런 필래의 창업주이신 서광구 회장님께서는 우리 필래 가족들에게 천금 같은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서광구는 서청수의 아버지였다.

서광구는 작은 쌀가게에서 시작해 6·25 이후 싼값에 빵 공장을 인수했다.

필래그룹의 모체인 필래제과의 시초였다.

필래제과는 괜찮은 맛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 정도 규모의 회사는 지천에 널려 있었다.

필래그룹을 굴지의 대기업으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은 서청수였다.

그럼에도 서광구는 창업주 대접을 받았다.

이를 테면 조선을 세운 건 태조 이성계지만, 이성계가 즉위하고 나서 증조할아버지까지 왕으로 추증하고 용비어천가를 지어 찬양한 것과 비슷했다.

“모두 나눠 드린 책자를 보십시오.”

대찬을 포함한 신입들은 아무개의 주문에 따랐다.

책자의 가장 위에는 ‘필래인으로 산다는 것’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필래는 필래다. 필래란 고객을 반드시 오게 만든다는 뜻의 必來, 한 떨기 꽃처럼 피어나겠다는 다짐의 필래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훈인 필래로 필래는 고객 유치의 필래, 개화 경영의 필래인 것이다. 우리는 필래인으로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책자에는 교장 선생님 훈화 같은 시시콜콜한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고리타분한 궁서체가 글을 읽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했다.

“창업주 선대 회장님의 고귀한 말씀입니다. 마땅히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바른 육체에 바른 정신이 깃드는 법. 여러분은 제 자세를 따라해 주십시오.”

아무개는 그렇게 말하고 무릎을 한껏 굽혀 기마 자세를 했다.

그리고 책자를 쥔 손을 ‘앞으로 나란히’로 뻗었다.

신입들은 부랴부랴 그 자세를 따라했다.

영락없는 얼차려였다.

신입들이 따라하자 아무개는 얼른 편한 자세로 돌아왔다.

“자, 이 자세로 정독을 시작합니다! 큰 소리로, 시작!”

누워서 코딱지 파면서도 읽기 싫은 걸 기마 자세를 하고 읽으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런 의구심을 경험자인 대찬을 제외한 모든 신입 사원이 품었다.

서원웅에게는 사사로이 할아버지가 되는 분의 말씀이었지만, 그 역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신입들에게 항명의 권리는 없었다.

“피, 필래는 필래다!”

누군가 먼저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읽기 시작하자, 강당에 모인 신입들이 일제히 입을 크게 벌리고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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