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62화
“면접관님 말씀이 심하셨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시죠?”
“…….”
“떨어뜨리려면 떨어뜨리십시오.”
대찬이 배짱을 튕기는데도 면접관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서원웅이 면접관에게 말했다.
“면접관님, 외람되지만 저희한테 다시 질문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준비한 부분을 제대로 못 보여 드린 것 같습니다.”
대찬이 서원웅처럼 말했다면, 아무리 기가 눌린 면접관이라지만 격하게 분노를 쏟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서원웅의 말에 면접관은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면접관은 안경을 고쳐 쓰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시 허운부터 면접이 시작되었다.
압박 면접이 아니라 민원 상담을 하는 듯 면접관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조대찬 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필래 가족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리엔테이션 관련 사항은 차후 별도로 안내될 예정입니다.
대찬은 면접에 가뿐히 합격했다.
서청수 회장을 등에 업을 생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셈이 되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노라 대찬은 합리화했다.
‘애초에 너무 등신 같은 면접이었어.’
서원웅도 당연히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다시 제대로 답변할 기회를 부여받은 허운은 어떤 결과를 받았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신입 사원 연수 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찬은 대학생의 신분을 벗고 필래그룹의 신입 사원이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내 길은 회사원인가 보다.’
대찬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직장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샐러리맨의 길을 다시 택했다.
하지만 비굴한 굴종과 노예 같은 근무, 그 결과물인 병마까지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추호도 없었다.
‘병마로 인한 사망은 더더욱 사양.’
대찬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합격 소식에 대찬 본인보다도 가족들이 더 기뻐했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부모님은 내내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
최종 합격 통보가 날아오고 나서야 부모님은 진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노력이 결실을 맺는구나. 축하한다.”
“뭘요, 이제 시작인데요.”
아버지는 먼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선배로서 조언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어수룩했다간 살아남지 못해.”
“네, 그럴게요.”
대찬은 아버지의 조언을 새겨들었다.
어수룩해서 살아남지 못한 산증인이 다름 아닌 아버지 본인이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가족은 조촐한 맥주 파티를 열어 대찬의 합격을 축하했다.
누나인 조수진이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친구들한테 대기업 다니는 동생 생겼다고 자랑해야겠다! 네가 나보다 낫다. 나는 고작 사서 나부랭인데.”
“말을 뭐 그렇게 해? 사서가 어떻다고.”
문헌정보학과를 나온 조수진은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다.
천방지축인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다지 어울리는 직장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직업 뒤에 나부랭이 운운하는 건 인정해 줄 수 없었다.
“누나는 도서관에서 작업 거는 놈팡이만 조심하면 돼.”
“뭐?”
대찬은 첫 번째 삶의 매형을 떠올렸다.
조수진이 도서관에서 구닥다리 수법으로 수작을 걸어 결혼까지 성사시키고 내내 조수진을 못살게 군 말종.
그걸 알 턱 없는 조수진은 영문을 몰랐다.
“암튼 그렇다구. 사서가 얼마나 좋은 직업인데. 그렇게 툴툴거리지 말란 말이야.”
“예예. 어련하실까요, 잘나신 동생님 말씀인데.”
대찬은 싱겁게 웃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한창 고기를 굽던 어머니는 남매를 째려보면서 집게로 고기를 집어 나란히 입에 물려주었다.
“둘 다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했으니까 어디 가서 사위, 며느리나 물어와. 엄마는 이제 그거면 됐어.”
“언제는 취직만 하면 그걸로 됐다더니,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니까.”
조수진이 고기를 우물거리며 항변하자 어머니는 집게를 휘둘러 위협했다.
“이년이, 네가 제일 급해! 빨리 아무 놈이나 물어와!”
“엄마! 제 말씀을 뭘로 들으셨어요. 아무 놈이나 잡아 오면 안 된다니까.”
왁자지껄한 자리는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챙기는 주말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필래그룹은 신입 사원을 채용한 후, 합격자에게 각자 원하는 계열사에 지원하도록 했다.
필래 컬처인더스트리처럼 합격자들에게 인기가 좋은 계열사에는 사람이 몰렸는데, 이 경우 채용 과정에서 산출된 임의의 점수를 활용했다.
그런데 서원웅과 대찬에게는 이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비서실장을 통해 둘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회장님께선 두 사람을 유통으로 보내실 생각이야.”
이제 필래그룹의 신입 사원이 된 둘에게 비서실장도 말을 낮췄다.
그 말에 대찬의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유, 유통으로 말입니까?”
“어, 유통.”
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두 번째 삶을 시작했을 때, 필래유통으로 들어갈 마음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 마음은 점점 무뎌졌다.
굳이 다시 거기로 기어들어 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필래그룹 안에서도 더 좋은 계열사를 고를 수 있었다.
필래유통의 사장은 서청규다.
서청수 회장과 후계자 다툼을 하다가 패배하고 일개 계열사의 주인 노릇에만 만족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룹에서 나갈 배짱도 없고 심통만 부리는 터.
그런 서청규 사장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건 영 마뜩찮은 일이다.
대찬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서원웅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굳이 서청수 회장의 그늘을 벗어나 서청규 사장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 갈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대찬은 뚱한 얼굴로 서청수 회장을 원망했다.
순간 비서실장과 대찬의 눈빛이 마주쳤다.
대찬은 얼른 표정을 감췄다.
하지만 이미 들킨 듯, 비서실장은 웃음을 흘렸다.
“너무 원망하지는 마. 다 생각이 있으셔서 그러신 거니까.”
“아, 원망은 안 합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비서실장이 떠나자 대찬과 서원웅은 동시에 참았던 한숨을 뱉었다.
“하아.”
서원웅은 머리를 감쌌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말이다.”
대찬도 의자에 멋대로 널브러진 채 목을 뒤로 젖혔다.
서청수 회장은 왜 필래유통으로 보내는 걸까.
‘첫 번째 삶이나 두 번째 삶이나 내 직장은 필래유통이라는 건가.’
그런 운명론으로 서청수 회장의 의중을 재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위해서 그를 선택한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들인 서원웅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필래유통으로의 발령 역시 서원웅을 위한 결정일 것이다.
대찬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서원웅을 보며 말했다.
“너한테 가장 이로운 길인지도 모르겠다, 필래유통으로 가는 게.”
“나한테 가장 해로운 건 아니고?”
“응.”
“필래유통으로 가는 게 왜 나한테 이로운데?”
“필래유통으로 가야 무시 안 당해.”
“…무시? 오히려 필래유통으로 가면 완전히 무시당할 거 같은데.”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그런 계열사에 들어가서 그저 그런 퍼포먼스를 보여 주면, 나중에 큰코다칠 수도 있지.”
“어째서?”
“회장님이 천년만년 사시는 게 아니잖아.”
“아…….”
일순 서원웅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서원웅에게 내키지 않는 말임을 대찬도 알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찬은 서원웅을 지그시 바라봤다.
“회장님이란 우산이 있으니 지금은 괜찮아. 그런데 우산이 사라지면? 그저 그런 상태로는 쏟아지는 천둥번개, 우박을 이겨 낼 수 없어.”
“…….”
“그러니까 회장님이 계실 때 미리 비를 맞아 두라는 생각이신 거 같아.”
“미리 비를 맞으라니?”
“네가 필래유통에 들어가면 서청규 사장이 괴롭히긴 하겠지. 그런데 회장님이 계시는 한 다칠 순 있어도 죽지는 않아.”
“그렇게 단련을 해 두라는 거지? 아버지가 계실 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2019년까지 필래유통에서 근무했다.
일개 대리였지만, 필래의 오너인 서씨 가문의 대체적인 동향쯤이야 대찬도 어깨너머로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찬의 보스였던, 그리고 이제 보스가 될 서청규 사장은 잔혹했다.
잘못한 직원을 가차 없이 쳐 내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리고 그는 서청수 회장의 장남이자 필래그룹의 암묵적인 후계자인 서승학과 가까웠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부자 관계인 서청수 회장보다 가깝겠냐고 하겠지만, 서승학은 서청수 회장보다 서청규 사장과 심정적으로 가까웠다.
서청수 회장은 엄한 아버지였다.
이른바 손찌검 황태자 사건으로 구설에 오를 때, 서승학에게 단호한 조처를 취한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부자 사이의 틈을 서청규는 교묘히 파고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청규는 서승학에게 달콤한 말과 용돈으로 일관했다.
아버지 백을 믿고 친구를 두들겨 패고 온 서승학을 서청수 회장이 손찌검까지 하며 호되게 야단친 일이 있었다.
그러면 서청규는 방문을 잠근 서승학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눈물을 닦아 주고 사내가 그럴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 역성을 들어 주었다.
당장 몇 년 전 손찌검 황태자 사건 때도 부하 직원 야단 좀 친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던 게 서청규 사장이었다.
그러니 서승학에게 삼촌이 아버지보다 미더웠다.
“서청규와 서승학은 한 몸이야. 너는 이 둘하고 싸워야 해. 회장님이 계실 때 체급을 키워 놓지 않으면 당하고 말아.”
“꼭 싸워야 해? 나는 야심 같은 거 없어. 그냥 1인분만 하고 살고 싶어. 다른 회사원들처럼.”
서원웅의 말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그러고 싶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아.”
“상황이라니?”
“네가 회장님 핏줄을 타고난 이상, 회장님이 가진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생기잖아. 회장님이 네 존재를 극구 숨기신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니까.”
“결국 유산 다툼에 휘말릴 수도 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유산 정도에서 그치면 다행이지.”
“유산이 아니면?”
“경영권.”
대찬의 말에 서원웅의 동공이 전례 없이 확장됐다.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나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너는 그렇게 생각해도 서청규, 서승학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같은 바늘이라도 손톱 밑에 있는 바늘은 거슬리니까.”
“말 들어 보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서원웅은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대찬은 웃으면서 서원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온실이 아니라 들판으로 나와야 돼.”
“들판…….”
“거기서 확실한 퍼포먼스를 보여 줘야 네 가치가 증명될 거야. 그러면 서청규, 서승학도 함부로 쥐고 못 흔들 정도로 성장할 수 있어.”
“…도와줄 거지?”
“당연하지. 나도 너 없으면 이 회사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그 말에 서원웅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대찬과 서원웅은 필래유통으로 발령을 받았다.
계열사 배치 문자를 받은 대찬은 기분이 오묘했다.
‘그땐 진짜 기쁨을 주체 못했는데…….’
첫 번째 삶, 번번이 입사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던 대찬은 3년간의 취업 준비 끝에 필래유통에 합격했다.
그때는 부모님과 누나를 얼싸안고 강강술래까지 췄더랬다.
그만큼 취업에 절실했고, 필래유통을 위해서라면 헌신할 각오가 돼 있었다.
그리고 유백기에 의해 각오 이상으로 부려졌다.
그러던 첫 번째 삶의 느낌과 지금은 퍽 달랐다.
제발 한 곳만 걸려 달라며 마구잡이로 이력서를 뿌리는 일은 없었다.
황송해하면서 입사하지 않고 총수의 스카우트를 받아 입사했다.
‘이 정도면 처음의 각오대로 잘 실천한 거겠지?’
대찬은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생각에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그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전장은 그대로지만 거기에 뛰어드는 대찬의 몸과 마음은 완전히 달랐다.
대찬은 심호흡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회사 생활의 시작은 신입 연수였다.
아침 일찍부터 햇병아리들이 한데 모였다.
충청도 모처에 마련된 연수원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일찌감치 서원웅과 만난 대찬이 버스에 오르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익숙한 얼굴도 대찬을 알아봤다.
“어?”
“오, 허운 씨.”
대찬은 웃으면서 허운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