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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9화 (58/556)

난 할 수 있어 59화

“노인네 심술 받아 주느라 고생 많았다.”

“인내심도 기르고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망할 자식!”

대찬은 큭큭 웃고는 만몽에게 말했다.

“오늘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제가 살게요.”

“어, 나도 그러고 싶다만 그럴 수가 없어.”

“왜요, 약속 있으세요?”

만몽은 고개를 저었다.

“난 없어. 네놈이 있지.”

“네? 저도 없는데요.”

대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철학원 안으로 양복 차림의 남성이 들어왔다.

대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서청수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다.

“조대찬 군, 회장님과 점심 식사 같이 하시죠.”

“아, 네…….”

서청수의 뜻을, 취업 준비를 앞둔 4학년이 거역할 순 없었다.

대찬은 넌지시 만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럼 거사님도 같이…….”

“회장님은 독대를 원하세요.”

비서실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만몽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따라나서라는 눈빛을 보냈다.

대찬은 만몽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비서실장을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검은색의 고급 세단이 주차돼 있었다.

대찬은 종종걸음으로 차로 향했다.

뒷좌석의 창문이 서서히 열렸다.

서청수가 빙긋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찬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서청수는 한 한정식집으로 대찬을 데려갔다.

비서실장도 물리고, 단둘이 마주앉았다.

아무리 여러 번 본 사이라지만 서청수의 사회적 지위에 대찬은 잔뜩 위축되었다.

몇 마디 말로 풀릴 긴장이 아니란 걸 서청수도 알았다.

그러기에 그도 미소만 지을 뿐, 굳이 대찬의 긴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백자로 된 주전자에 담긴 맑은 술을 대찬의 잔에 따랐다.

대찬은 공손히 받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은 채로 단정히 서청수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로 목을 축인 뒤에 서청수가 말했다.

“이제 취직해야지.”

“예. 여러모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서청수는 대찬의 대답이 마뜩치 않은 듯 미간을 좁혔다.

“여러모로 알아볼 게 뭔가. 이미 자네 진로는 정해지지 않았나?”

“필래로 말입니까?”

“그래. 난 또 만몽 선생이 말을 안 전한 줄 알았군. 다 알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회장님만 믿고 멍청하게 손 놓고 있으면 그것도 한심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더 한심한 일이 뭔 줄 아나?”

대찬은 정답을 알았지만 말하지 않고 침만 꼴깍 삼켰다.

서청수가 흐흐,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필래 말고 딴 회사 들어가는 거야. 그건 진짜 한심한 일이지.”

“하하…….”

식은땀이 대찬의 등에 송골송골 맺혔다.

“필래가 무슨 뜻인지 알지? 반드시 필, 올 래. 자네는 반드시 와야 해.”

“회장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호의가 아니야. 강요일세.”

서청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대찬도 이 이상으로는 주눅 들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왜 저를 필래에 들이고 싶으십니까? 저 같은 학생은 흔합니다.”

“흔하지 않아. 2가지 이유로.”

대찬은 서청수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침묵으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 자네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많아. 하지만 자네처럼 뭘 제대로 해낸 학생은 매우 드물지.”

서청수는 수영실업에서의 일화부터 미네소타에서의 일까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주지사 만들려고 일부러 맞는 거 카메라로 찍었지? 이 여우 같은 자식!”

“알고 계셨군요.”

“뒷조사를 좀 했어. 고2 때 비약적으로 성적이 올랐더군. 독종이란 뜻이지. 독종에 실천가. 이런 경력을 가진 학생이 흔하다고? 3명만 내 앞에 데려와 봐. 그럼 자넬 풀어 주지.”

서청수는 곱게 계란물을 입힌 호박전을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둘째, 자네는 원웅이의 둘도 없는 친구야. 그렇지?”

“네.”

“그것만으로도 나는 자네가 필요해.”

“원웅이를 그저 적당히 쓰실 생각이라면 굳이 제가 필요하진 않잖습니까. 설령 필요하더라도 이렇게 회장님께서 직접 시간을 내진 않으실 겁니다.”

서청수는 빙긋 웃었다.

“그렇지.”

“그렇다면 원웅이를…….”

크게 쓰시겠다는 겁니까?

대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청수가 손을 내저었다.

“아아, 앞서가진 말게. 원웅이를 후계자로 삼겠다, 그런 건 아니니까.”

“예. 저도 거기까진 생각 안 하지만…….”

“다만, 원웅이를 그저 그런 샐러리맨으로 살도록 두고 싶진 않아. 적어도 계열사 한 군데 정돈 맡길 생각이야.”

“…그렇군요.”

“그러려면 유능하고 믿음직한 친구를 곁에 둘 필요가 있지.”

대찬은 고개를 숙였다.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부디 날 불안하게 만들지 마. 내가 다 얘기를 해 놓을 테니 편한 마음으로 입사하면 돼.”

“하지만 그건 어렵습니다.”

서청수의 눈에서 불빛이 튀었다.

“뭐야?”

“필래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그 말이면 충분해. 그 이상은 사족이야.”

서청수 회장의 말에도 대찬은 그 이상을 얘기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제 입사를 돕지 말아 주십시오.”

“어째서지?”

“남들처럼 이력서 내고 면접 보고 당당히 합격하겠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정의감인가?”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는 속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서청수의 도움 없이도 너끈히 합격할 수 있다.

필래가 대기업이라곤 하지만, 취업 준비생들이 열광할 정도로 선망하는 직장은 아니었다.

삼라그룹이나 대연그룹 같은 대기업 중에서도 일류를 우선적으로 원했다.

대찬은 자력으로 입사할 자신이 있었다.

학벌이 모자라지도 않았고, 경력 역시 차고 넘쳤다.

필래와 오래 협업해 왔으니 다른 지원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강점도 분명했다.

구태여 서청수 회장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입사 시험도 통과 못할 정도의 바보 천치를 굳이 아드님 곁에 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서청수는 입술을 비틀며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 역시 대찬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청수는 대찬의 잔에 술을 채웠다.

“좋아. 그렇게 하게. 자네라면 아마 넉넉히 합격할 거야. 미리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대찬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았다.

그리고 잔을 부딪친 뒤,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뜨끈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배 속으로 내려갔다.

대찬은 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

대찬의 표정은 비장했다.

2008년 2월.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이즈음의 대학 졸업생들의 표정은 면면이 달랐다.

취업에 애를 먹는 쪽은 백수 생활을 하루라도 줄이려고 취업 준비에 열을 올렸다.

공무원 시험이나 임용고시, 기타 등등의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은 독서실에 콕 틀어박혀 사각사각 펜대만 놀렸다.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에 해외여행이나 실컷 하겠다는 자유인도 있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 타겠다고 서울에서 아웅다웅하기 싫다며 귀농을 선택한 또 다른 의미의 자유인도 있었다.

취업이고 뭐고 부모 건물 물려받아 빈둥빈둥 세월이나 낚겠다는 부러운 자유인도 있었다.

일찌감치 취업을 해결한 대찬은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학생 신분을 즐겼다.

다른 또래와는 달리 특별한 자격으로 회사 생활을 누려 본 대찬이었다.

잠이 귀하다는 걸 체감했기에 어떤 날은 종일 늘어지게 잠만 잤다.

그게 또 어머니의 잔소리감이 되었다.

“얘는, 나가서 운동이라도 좀 해라. 어휴, 홀아비 냄새! 환기도 좀 시키고!”

“아직 날 추워요. 이불 속이 제일 안전해.”

대찬이 그렇게 말하며 온몸을 이불로 둘둘 말자 어머니는 그의 등짝을 찰싹 내리쳤다.

“너 요즘 살쪘더라. 졸업식 사진 예쁘게 나와야지! 나가서 뜀박질이라도 해서 살 좀 빼라.”

“졸업식 그거 안 가면 안 돼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너한테는 대단하지 않아도 엄마, 아빠한테는 대단해. 너 학사모 씌우려고 집안 기둥뿌리 뽑았다, 얘.”

“알았어요, 알았어요.”

대찬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대꾸했다.

“졸업식에 서청수 회장님도 오신다니?”

“에이, 그러겠어요?”

“하긴, 서자 졸업식 갔다고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를 테니. 재한이 엄마는 오겠구나.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

“괜찮으시면 다 같이 식사할 수 있도록 약속 잡아 볼까요? 원웅이도 그 편이 좋을 거 같고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약속 잡히면 바로 알려 줘. 식당은 내가 예약하마.”

“예, 그럴게요.”

대찬은 즉시 서원웅과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재한의 부모님이야 대찬의 부모님과 옛날부터 안면이 깊었다.

대찬의 말을 들은 최재한은 되레 면박을 주었다.

“야, 그럼 너희 가족 따로, 우리 가족 따로 밥 먹으려고 했어? 섭섭하게 진짜.”

“미안, 미안. 확인차 물어본 거야. 부모님 두 분 다 오신대?”

“어. 아빠도 어떻게든 휴가 내 보시겠대.”

“예전에는 휴가 잘 못 내시더니 요새는 그래도 고참 대우 단단히 받으시나 봐.”

“소방위 되신 지도 한참이야. 6급 공무원이니까 아들 졸업식 정도야 자유롭게 오실 수 있지.”

“어머님은 자주 뵀는데 아버님은 자주 못 뵀었잖아. 멋있게 차려입고 가야겠네.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거니까.”

그 말에 최재한은 피식 웃었다.

“네 졸업식이니까 당연히 차려입고 와야지. 친구 아빠 때문에 차려입겠다는 건 주객전도지.”

“기자 준비하더니 말꼬리 잡는 요령만 늘어서는. 암튼 졸업식 때 보자.”

대찬은 최재한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서원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원웅 역시 대찬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머니도 가급적 밖에 안 나가는 편이시라 졸업식 때 나 혼자거든. 챙겨 주면 나야 고맙지.”

“덩그러니 너만 남겨 두면 회장님이 뭐라 하시겠어. 입사 전부터 회사 생활 고달프기 싫어. 졸업식 때 보자고.”

“그래.”

임무를 마친 대찬은 다시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때 한 가지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대찬은 벌떡 일어나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왜 또 전화해?”

“너희 아버지, 중부소방서에서 근무한다고 하셨지.”

“어. 왜? 우리 아빠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냐?”

“별건 아니고, 아니, 별거다.”

“뭐야. 뭔데 조대찬답지 않게 중언부언이야?”

대찬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숭례문 있잖아.”

“숭례문? 남대문 말하는 거냐? 왜?”

“누가 불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

대찬의 기억으로 이즈음, 숭례문 방화 사건이 벌어진 때였다.

그리고 그곳의 담당 관청이 최재한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중부소방서였다.

물론 최재한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기우로 들릴 뿐이었다.

최재한은 풋 웃었다.

“야,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재수 없게.”

“불길한 느낌이 들어. 아버지께 꼭 말씀드려. 신경 좀 써 주시라고.”

대찬은 단언하지는 못했다.

첫 번째 삶의 기억이 두 번째 삶에 높은 확률로 반복되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기억으로 숭례문의 소실은 국민으로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다.

대찬은 당부 정도로 기억을 가진 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생각이었다.

“만몽거사님이랑 어울리더니 너도 점쟁이 다 됐네.”

“허투루 하는 소리 아니야. 알잖아.”

“그래. 내가 널 모르냐. 알았어. 아빠한테 말씀드려 놓을게.”

“고맙다. 꼭 말씀드려, 꼭.”

대찬은 당부를 남겨 놨지만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2월 10일.

-속보입니다. 국보 1호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소방 당국이 긴급 진화에 나섰습니다. 소방 당국은 발화 원인을 방화로 추정하며, 관할 소방서의 인력을 총동원해 화재 진화에 만전을…….

뉴스 속보를 보던 대찬은 뒷목이 뻐근해졌다.

‘결국 비극이 반복되는구나.’

지상파 3사는 화재 현장을 생중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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