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8화
“그럼 네놈이 직접 환불해 주든가!”
“환불은 무슨 환불이에요. 도로 갖다준다고 받을 거 같아요?”
“그럼 어쩌라는 거냐! 시끄럽게 쫑알거리기만 하고.”
만몽은 그렇게 툴툴거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씩 웃었다.
그는 대찬 앞에 놓은 20만 원을 더 가깝게 밀었다.
“그럼 네가 도와줘라.”
“네?”
“20만 원 너 줄게.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네가 도와줘. 이건 그 품삯으로 챙기고.”
만몽은 대찬의 말을 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졸지에 20만 원이 대찬의 몫이 됐다. 그리고 예상하지 않았던 부담 또한 그의 몫이 되었다.
대찬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20명의 세종대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찬은 동네 피시방으로 향했다.
옷차림도 정석이었다.
물 빠진 푸른 추리닝에 삼선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금세 노근기를 발견했다.
그는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찬이 지나가는 듯 넌지시 보니 딱 그 나이대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RPG게임을 하고 있었다.
군주, 기사, 요정 따위가 나오는 게임이었다.
대찬은 그의 게임 속 닉네임을 봐 뒀다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노근기에게 대화를 걸었다.
뽀대왕자재한 : 님
이문동비룡 : ?
뽀대왕자재한 : 중국요리 잘해요?
이문동비룡 : 뭔데, 갑자기.
한때 이 게임에 열을 올렸던 최재한의 계정을 빌려서 대찬의 아이디가 저 꼴이었다.
뽀대왕자재한 : 비룡님 혈맹원이 그러시던데요. 원래 중식 요리사시라고.
이문동비룡 : 시비 털지 말고 하던 거나 해라.
뽀대왕자재한 :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대찬은 노근기에게 고가의 아이템을 공짜로 주었다.
만몽에게 받은 20만 원으로 산 아이템이니, 실상은 노근기의 돈으로 산 것이었다.
이문동비룡 : ? 왜 줘요……?
뽀대왕자재한 : 이거 드렸으니까 저랑 잠시만 얘기해요.
반말이 존대로 바뀌었다.
이문동비룡의 건조한 텍스트에서 당혹감이 느껴졌다.
그는 왜 주냐면서도 냉큼 받았다.
계속 고고하기에는 너무나도 비싼 아이템이었다.
노근기는 순순히 대찬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현실에서의 20만 원과 게임에서의 20만 원어치 아이템은 가치는 같아도 느낌이 달랐다.
일상을 게임으로 보내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현찰을 들인 아이템은 더 귀중하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뽀대왕자재한 : 제가 공익을 추구하는 회사에 다니는데, 이번에 진행하는 사업에 요리사 한 분이 필요해요. 비룡님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문동비룡 : 널린 게 요리산데 왜 게임에서 사람을 찾아요.
뽀대왕자재한 : 그래도 같은 게임 하는 사람들끼리 그런 게 있잖아요. 끈끈한 유대감, 의리, 신뢰, 뭐 그런 거.
이문동비룡 : 댁네는 공익을 추구하는지 몰라도 나는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사람입니다.
뽀대왕자재한 : 물론이죠. 대가는 충분히 지불합니다. 현찰로도, 아이템으로도.
대찬의 말에 이문동비룡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조작하지 않은 그의 캐릭터는 우두커니 서서 정해진 모션만 취했다.
짧지 않은 시간 침묵한 이문동비룡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올랐다.
이문동비룡 : 얼마 줄 건데요?
뽀대왕자재한 :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나누시죠.
대찬은 이문동비룡에게 에피니키온 회장을 지내는 후배의 전화번호를 남기고 접속을 종료했다.
그는 게임을 끈 채로 노근기의 자리를 넌지시 건너다봤다.
잠깐 멍하니 앉아 있던 노근기는 벌떡 일어나 피시방 밖으로 나갔다.
“먹혔다.”
대찬은 씩 웃으면서 유유히 피시방을 빠져나갔다.
후배인 에피니키온 회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선배, 황금루랑 계약서 썼어요.”
“잘했어.”
황금루는 노근기가 운영하는 중국집 이름이었다.
에피니키온과 웜샤인은 황금루와 함께 ‘사랑의 자장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웜샤인에서 제공한 푸드트럭으로 전국의 보육원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무료로 자장면과 탕수육을 맛보게 하는 프로젝트였다.
노근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웜샤인은 황금루에 정가의 3분의 2가격으로 값을 치렀다.
에피니키온에서는 무상으로 인력을 제공하는 대신,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뜻깊은 자원봉사의 기회를 얻었다.
웜샤인도 자선 단체는 아니었다.
그쪽도 노리는 바가 확고했다.
-자막>반경 1km 내 중국집.
자막>0곳.
나레이션>탕수육과 자장면.
나레이션>모심원의 아이들은 그 맛이 궁금했습니다.
나레이션>이제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VIDEO>보육원 앞에 멈춘 푸드트럭, 뛰어오는 아이들.
아이들>와아!
VIDEO>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봉사자들, 요리사 표정 클로즈업, 입가에 자장을 묻히며 웃는 아이들.
자막 : 필래그룹은 황금루 노근기 사장님과 경북 청도 모심원에서 63번째 사랑의 자장면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나레이션>필래가 아이들을 찾아갑니다.
나레이션>필래로 필래, 필래그룹.
VIDEO>필래그룹 로고. 끝.
필래그룹은 이 프로젝트를 영상 광고로 제작해 내보냈다.
웜샤인, 정확히 말하면 모회사인 필래그룹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광고로 프로젝트를 활용했다.
유명 연예인에게 값비싼 모델료를 지불하지 않고 싼값에 광고를 찍었다.
첫 광고가 나가는 날, 대찬도 모처럼 에피니키온 부실에 행차했다.
후배들과 함께 광고를 시청했다.
“어, 저기 나 나온다!”
“아씨, 나는 잘렸어!”
후배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그와 함께 광고를 보던 최재한이 대찬에게 물었다.
“저건 중국집 사장님한테도 좋은 일인데 그냥 면전에서 물어보면 됐잖아. 굳이 내 아이디까지 빌리지 않아도. 아이템 사는 데 돈이나 쓰고 말야.”
“달라. 아마 내가 찾아가서 하자고 했으면 거절했을 거야.”
“왜?”
“철학원 알바생이 자기 어려운 사정을 듣고 발 벗고 도우려 한다는 거잖아. 그 양반이 무슨 생각부터 들 거 같아?”
“모르겠는데.”
대찬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나 진짜 엿 됐구나.”
“그런 거친 생각부터 한단 말이야?”
“잘나가던 내가, 이제 고작 철학원 알바생 나부랭이한테 동정받는 처참한 신세가 됐구나, 하고 말이야. 아마 뻥 차였을걸.”
“그래도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양반이…….”
“사람한테는 끝까지 꼭 쥐고 안 놓는 최후의 자존심이 있기 마련이잖아.”
최재한은 꽁한 표정을 지었다.
“영감님 같아.”
“홍시 껍질은 물러서 쉽게 까져도 씨앗은 딱딱하거든. 꼭 그거 같은 최후의 자존심. 그걸 건드려선 안 되는 거야.”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말하고 있어.”
“너보단 오래 살았거든.”
대찬의 말에 최재한이 광분했다.
“야! 생일 나보다 겨우 한 달 빠른 주제에 무슨!”
최재한의 항변을 대찬은 웃음으로 넘겼다.
광고 효과는 확실했다.
황금루에 손님들이 몰렸다.
노근기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졌다.
“거사님, 부적이 진짜 효과가 있나 봐요. 어떻게 이러지?”
“어, 어어? 그런가?”
만몽은 어설픈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노근기는 만몽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진짜 용하셔, 용하셔!”
“그만해. 쑥스럽게.”
좀체 부끄럼을 모르는 만몽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중에 꼭 우리 가게 들러 주세요. 샥스핀 대접할라니까!”
“오, 샥스핀 좋지.”
노근기는 만몽의 뒤에 얌전히 앉은 대찬에게도 말했다.
“기분이다! 학생도 와! 학생 친구들도 데려와!”
“감사합니다, 사장님.”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노근기는 철학원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오전부터 예약 손님이 있다고 했다.
그는 헤벌쭉 웃으며 전례 없는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를 떠나보내고 만몽이 슬그머니 대찬을 바라봤다.
“다 네 덕분이라고 안 떠벌렸어? 입이 근질거리지도 않아?”
“에이, 자기 입으로 떠벌리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어디 있다고요.”
“허어?”
만몽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노 사장님도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제 후배들 입이 좀 싸야 말이죠.”
“요령 있는 체하기는.”
만몽은 피식 웃었다.
노근기가 은인을 몰라 뵀다며 대찬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건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대찬의 예상보다 한참 늦은 시점이었다.
후배들의 침묵이 예상보다 길었다.
“자식들, 생각보다 입이 무겁네, 쓸데없이.”
대찬은 그렇게 툴툴거렸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게 만몽의 부적이 아니라 대찬의 조력 덕분이란 걸 안 노근기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진즉 말해 주지 그랬어! 난 그것도 모르고 여태 부적이 용하다고 주변 사람한테 괜히 철학원 홍보만 했잖아!”
“따지고 보면 다 부적 덕택 아니겠어요? 어쨌거나 시작은 거사님이 사장님께 바가지를 씌운 것부터니까.”
“망할 노인네 같으니라고!”
대찬은 웃으면서 그를 달랬다.
“좋은 게 좋은 거죠. 어쨌든 다 잘됐잖습니까.”
“고마워. 정말 고마워, 조 선생!”
“선생이라니요. 아직 학생 딱지도 못 뗐는데요.”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노근기는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이 은혜는 평생 걸려도 못 갚아. 내가 도울 일이 있거든 꼭 말해 줘. 알았지? 무슨 일이든 다 할 테니까 말이야.”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말씀만이 아니야! 난 신세 지고 못 사는 성격이야!”
“알았어요.”
대찬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꼭이야, 꼭!”
노근기는 한참을 신신당부했다.
대찬 덕분에 에피니키온 부원들은 황금루를 영원히 공짜로 이용할 기회를 얻었다.
대찬도 종종 철학원 업무가 끝나면 혼자 가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에 염치는 있어야 했다. 손님들이 없을 마감 시간에 주로 이용했다.
그럴 때면 노근기는 중국집의 강한 화력에 까무잡잡하게 익은 얼굴로 주방에서 나와 대찬과 함께 늦은 식사를 했다.
그는 대찬의 그릇을 보고 툴툴거렸다.
“비싼 것 좀 먹으라니까. 맨날 짜장이야.”
“짜장이 제일 맛있어요.”
“다음부턴 짜장 금지야. 시키더라도 앞에 삼선 붙은 걸로 시켜.”
“부담스러워서 오겠나요, 어디.”
“조 선생이 짜장만 먹으면 오히려 내가 부담스러워.”
대찬은 가볍게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건물주가 뺏은 예전 가게는 장사가 잘된대요?”
“뭐, 업력이 쌓인 곳이니까 내가 있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손해는 안 보는 거 같더군.”
노근기는 못마땅한 듯 콧잔등을 씰룩였다.
“밥맛 떨어지게 그 얘긴 왜 해?”
“그래도 한 방 먹여야 하지 않겠어요?”
“먹일 수 있었음 한 방만 먹였겠어? 반 죽여 놨지, 아주.”
대찬은 빙긋 웃었다.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대찬의 말이 실제로 이뤄진 건 한참 후, 정확히는 3년 후의 일이었다.
첫 번째 삶의 공무원이 아니라 기자의 삶을 선택한 최재한은 건물주의 횡포를 기사로 다뤘다.
그리고 황금루 노근기 사장의 일화가 그 대표적인 예시로 실렸다.
건물주는 여론의 극심한 질타를 받았다.
결국 그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했다.
그때까지도 황금루는 이름다운 황금기를 구가하는 와중이었다.
대찬은 만몽을 통해 노근기를 알았다.
최재한의 게임 캐릭터로 그에게 접근했다.
웜샤인을 통해 그를 도왔고, 에피니키온이 그를 돕는 웜샤인을 도왔다.
도움을 받은 노근기는 언제든지 대찬을 돕겠다고 틈만 나면 떠들어 댔다.
노근기가 대찬의 인맥이 되었다.
* * *
“잘 배웠습니다.”
대찬은 꾸벅 만몽에게 절을 올렸다.
만몽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허례허식 관둬.”
“진심을 담은 절이었는데요.”
“절에 담지 말고 술에 담아. 나중에 올 땐 좋은 술이나 한 병 받아 와.”
“옙, 스승님.”
만몽은 못마땅한 듯 대찬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픽 웃었다.
그는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