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7화
대찬은 얼마 전 철학원을 방문했던 곽동성에 관한 부분을 펼쳤다.
-곽동성
-1956.4.24 生/경기 광주
-고원대 전자공학/동대 석사/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박사
-필래그룹 경력직 입사 필래유통 개발팀 총괄팀장 전략실장 필래기획 전무이사
-부친 : 작고 / 모친 : 생존 / 장인 : 윤동인(前정보통신부 차관) / 부인 : 윤정이(주부) / 1남 2녀
-서청규 파벌, 서승학이 ‘삼촌’이라고 부름, 서승학 등극 시 일등 공신 예감.
-저돌적, 두뇌 명석, 언변 부족, 감이 좋음, 여자문제 깨끗, 돈 관리 철저, 의외로 파격적, 실패에는 칼.
-거짓말할 때 광대가 떨림. 허풍이 있는 편. 초조할 때 넥타이를 고쳐 맴. 당황할 때 말의 허점이 많아짐. 제안을 할 때 상대방이 아쉬운 입장에서 먼저 말을 꺼내게 함.
-유통기한 : 10년+
-기타 : 커피 말고 녹차, 중국요리·빼갈에 환장, 마누라 욕을 자주하는데 남이 맞장구 쳐 주면 기분 나빠함.
그 밑으로도 만몽거사의 날리는 글씨로 적은 세세한 내용이 지면을 메웠다.
대찬은 오랜 세월 관리해 온 흔적을 보고 새삼 놀랐다.
창고의 문서를 더 뒤져 보고 싶었지만 근무시간이 임박했다.
창고에서 나오는 대찬을 보고 만몽거사가 불렀다.
“어이, 물고추.”
비윤리적인 호칭에 대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몽이 다시 대찬을 불렀다.
“물고추가 귀까지 물이 찼나. 안 들려?”
“여기 물고추란 사람은 없는데요.”
“쯧. 조대찬!”
대찬은 그제야 부름에 응답했다.
“네.”
“오늘 곽동성 올 거야. 긴장 좀 해.”
“넵. 그렇잖아도 창고에서 곽동성 자료를 좀 봤습니다.”
“훌륭한 자세야.”
“그런데 자료에 유통기한 10년 이상으로 돼 있더군요. 유통 기한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기는. 적어도 10년은 승승장구할 거란 얘기지. 그때까진 우리한테 도움이 될 거란 뜻이야.”
“확신하시나요?”
“당연하지! 저놈이 멧돼지 같긴 해도 여자랑 돈 문제는 깨끗해. 수완도 있어. 아마 사장까지는 무난할 거야.”
대찬은 만몽거사의 감각에 놀랐다.
대찬의 첫 번째 삶에서 2018년까지도 곽동성은 승승장구한다.
사장까지는 무난하다는 말이 사실로 증명된다.
인류의 모든 조직은 피라미드형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진다.
그럼에도 만몽거사는 편안하게 곽동성의 승승장구를 예측했다.
그저 그런 약장수가 아니라는 걸 대찬은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지했다.
“곽동성이 오면 자네도 내 옆에 앉아. 그리고 곽동성의 관상을 봐.”
“저는 관상 볼 줄 모르는데요.”
“그건 헛관상이고, 진짜 관상을 보란 말이야.”
“진짜 관상이요?”
“사람의 마음이 표정으로, 행동으로 드러날 때의 그 순간적인 관상. 쿠세.”
‘거짓말할 때 광대가 떨림. 허풍이 있는 편. 초조할 때 넥타이를 고쳐 맴. 당황할 때 말의 허점이 많아짐. 제안을 할 때 상대방이 아쉬운 입장에서 먼저 말을 꺼내게 함.’
이것이 만몽거사가 말하는 진짜 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곽동성이 만몽철학원을 찾아왔다.
“거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양복 차림의 곽동성이 안으로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만몽거사도 헐렁한 웃음을 지었다.
“어어, 곽 사장님 어서 오쇼.”
“이제야 전무 달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좀 있으면 사장 달 건데, 뭐. 중사 진도 중사님이라고 하는 거 모릅니까?”
“거사님 사탕발림에 실실 웃다 보면 빤스까지 다 벗겨져 있으니 적당히 좋아할랍니다.”
‘아부에 약함.’
만몽거사는 초장부터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찬은 곽동성에게 꾸벅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못 보던 얼굴에 곽동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숙이 아줌마 어디 가고 잘생긴 총각이 있어.”
“방학 동안 평일 근무 대신하게 됐습니다.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녹차 한잔 드릴까요?”
“오, 이 친구 뭘 아는군. 고맙네. 한잔 부탁하지.”
대찬도 만몽을 따라갔다.
‘커피 대신 녹차.’
점수는 디테일에서 따는 법이었다.
대찬은 충실히 만몽을 도와 곽동성의 비위를 맞췄다.
덕분에 곽동성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돌아갔다.
대찬은 그를 제법 멀리까지 배웅하고 돌아왔다.
곽동성이 떠나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대찬이 만몽에게 물었다.
“거사님, 곽 전무가 서청규 사장과 돈독하다고 하셨죠. 곽 전무 덕분에 거사님도 서청규 사장의 인심을 얻었고.”
“응.”
대찬은 의아했다.
“그런데 서청수 회장님도 거사님을 신뢰하는 거 같은데, 좀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한가?”
만몽은 다 아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서청규 사장은 서청수 회장하고 껄끄럽지 않습니까.”
“…자네, 제법 서 회장님하고 깊은 대화를 나눴나 봐.”
“그냥 짐작입니다.”
“그렇다면 감이 좋군.”
대찬은 짐작이라 둘러댔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대찬의 첫 번째 삶, 서청수 필래그룹 회장은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과 반목한다.
서청규는 극렬히 반발하면서 서청수를 필래그룹 대표이사에서 끌어내리는 안을 이사회에 회부한다.
그러나 서청규는 끝내 패배하고, 필래유통을 필래그룹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회사를 차린다.
잠깐의 불화가 아니라 케케묵은 감정이 폭발한 결과라고 봐야 옳았다.
“그런데 거사님은 서청수 회장님, 그리고 서청규 사장 두 분의 손을 모두 잡고 있군요.”
“난 골 아픈 사내 정치엔 관심 없어. 둘 다 내 고객일 뿐이야.”
그럼에도 온도 차는 느껴졌다.
서청규는 철저히 비즈니스, 서청수하고는 비즈니스 그 이상.
그렇지 않다면 대찬을 굳이 철학원에 들이지 않았을 거다.
대찬은 말하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대찬은 만몽철학원에서 많은 걸 배웠다.
만몽철학원에는 모든 인간 군상이 있었다.
기업가만 오는 게 아니었다.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학생에게 괄시받는 교사.
남편이 바람피우는데 생활비 때문에 이혼하지 못하는 중년 여성.
고기가 맛있는 스님.
길몽을 꿨는데 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지 궁금한 아저씨.
상관을 쏴죽이고 싶은 부사관.
열 번째 선거에 도전한다는 늙다리 정치 지망생.
만몽의 고객에는 남녀노소가 없었고, 귀천이 없었고, 빈부가 없었다.
대찬은 만몽의 옆에서 그들의 관상, 진짜 관상을 살폈다.
“잘 봐 둬. 사람들의 표정, 몸짓, 말투, 단어 선택.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짜인지. 겉으로 드러난 게 거짓이라면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
일에 있어서 만몽은 진지했다.
대찬은 만몽이 만든 인간 군상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처럼 자신만의 요령으로 고객들의 정보를 적어 나갔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부족한 건 경험이야. 여긴 그 부족한 경험을 속성으로 채울 수 있는 학원이지. 물론 속성엔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하루는 멸치처럼 마른 중년 남성이 철학원을 찾았다.
그의 후줄근한 베이지색 재킷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다크 서클은 광대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올 때, 만몽은 대찬에게 귀띔했다.
“우리 단골이야. 잘 봐 둬.”
대찬은 눈짓으로 알은체를 했다.
남자는 한숨과 함께 만몽의 앞에 앉았다.
남자는 익숙한 듯 담배를 물며 말했다.
“여기는 되죠? 실내 흡연. 맘 놓고 필 데가 없습니다. 마누라도 성화고.”
“여기 조수도 골초긴 하지만, 다음 손님도 있으니 잠시 나갔다 오시죠.”
대찬은 틀린 사실은 곧장 바로잡았다.
“골초는 아닙니다.”
“실례할게요.”
남자는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만몽이 대찬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아?”
“힘들어 보이던 걸요.”
“그게 다야?”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났어요. 그냥 나는 정도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쩐내.”
만몽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런 쩐내가 날 정도의 공간은 많지 않아요.”
“안방에서 뻑뻑 피워 댈지도 모르잖아?”
“그분, 들어오면서 마누라 성화 때문에 못 피운다고 말했잖아요.”
만몽은 흐뭇하게 웃었다.
“눈도 퀭하니 피곤해 보이시고, 그럼 한 군데밖에 없어요.”
“어디?”
“피시방. 거기 가면 그런 분들 많아요.”
“옳거니.”
거기까지 얘기하는 순간 남자가 다시 들어왔다.
대찬은 입을 다물었다.
과연 대찬의 말대로 남자는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근에서 큰 중식당을 경영했다고 한다.
직접 주방을 맡으면서 맛으로 입소문이 났다.
15년간 경영하면서 동네 주민 중 그 집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단골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한 칸짜리 가게가 어느덧 건물 한 층 전부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순탄하기만 하던 남자의 살림이 한순간이 풍비박산이 났다.
어느 날, 건물주가 대뜸 월세를 2배로 올려 버렸다.
남자는 버티지 못했다.
권리금도 건지지 못하고 남자는 15년간 버텼던 업장을 정리했다.
건물주는 남자가 나간 식당을 직접 경영했다.
남자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그 옆에 새로 식당을 차렸다.
모은 돈은 가게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 고스란히 들어갔다.
알음알음 단골들이 찾아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려웠다.
다달이 적자만 기록했다.
자가를 전세로 옮기고, 벤츠를 소나타로 바꿨다.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의 남자는 15년 전과는 달랐다.
씀씀이는 커질 대로 커졌고, 그만큼 나이도 먹어 체면치레를 중시하게 됐다.
15년의 세월이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허탈감과 상실감, 남자는 무기력해졌다.
일을 점점 손에서 놨다.
아마추어 주방장을 싼값에 부리고, 자신은 피시방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허송세월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니 이해가 필요 없는 공간을 찾았다.
만몽철학원이었다.
“거사님, 암만 해도 내 팔자가 사납고 사나워서 그래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어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예?”
“그럼! 우리 노근기 선생 잘못한 건 하나도 없지.”
만몽은 그를 잘 달랬다.
남자의 이름은 노근기였다.
“내 팔자 독하고 독해서 이런 거잖습니까. 맞죠?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죠?”
“응. 딱 지금 복장 뒤집힐 일이 첩첩산중으로 있는 팔자요.”
“역시! 역시 팔자 때문이야!”
노근기는 만몽의 대답에 차라리 후련한 표정이었다.
“거사님, 부적이나 한 장 써 주쇼.”
“저번에 써 줬잖아?”
“물먹는 하마도 두 달이면 갈아줘야 돼요. 그 부적은 이미 약발이 다한 거 같아.”
“뭐, 써 달라면 써 주지. 노 선생은 단골이니까 30만 원만 받음세.”
만몽의 말에 대찬은 속으로 경악했다.
30만 원이라니!
스스로 사주팔자나 관상 따윌 비과학이라고 말하는 만몽이었다.
효험이 전혀 없는 걸 알면서도 30만 원짜리 부적을 팔아먹는 그를 대찬은 멍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삼십은 너무 비싼걸요. 반값에 해 줘요.”
“아, 그럼 이십으로 하지. 너무 싸구려는 효과가 없어요.”
만몽은 기어코 이십을 받아 냈다.
노근기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다시 집으로, 정확히는 피시방으로 돌아가는 노근기의 싱글벙글한 웃음을 보고 대찬은 소름이 돋았다.
저건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인 만족, 감정의 마취일 뿐이었다.
노근기의 저 웃음은 채 2시간을 못 갈 것이다.
아마 게임상에서 누군가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것보다 이를 터.
2시간의 마취를 위해 그는 20만 원을 기꺼이 지불한 것이다.
“거사님, 실망이에요.”
“뭐? 뭐가 실망이야?”
“이 와중에 장사나 하고 말이에요.”
“장사해야지, 그럼. 나는 뭐, 땅 파서 먹고사나?”
“사주팔자나 보고 마셔야지, 무슨 부적까지 써 주냔 말이에요.”
대찬의 따가운 질책에도 만몽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써 달라잖아? 써 주면 돈 주겠다잖아. 돈 준다는데 그럼 됐다 그래?”
“실망이에요.”
“실망은 니미럴. 저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이 불쌍하냐? 데리고 살 거 아니면 쓸데없는 동정은 관둬라. 그게 더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하지만……!”
만몽은 입술을 씰룩이며 불쾌감을 표했다.
“나도 좋고, 그 양반도 좋고, 다 좋게 끝났어. 왜 네놈만 입술이 삐죽 나와서 흥을 깨느냐고.”
“됐어요.”
대찬이 단단히 토라지자 만몽은 기가 찬 듯 허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노근기로부터 받은 20만 원을 대찬의 앞에 턱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