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56화 (55/556)

난 할 수 있어 56화

“아랫도리에 점이 있으면 정력이 좋다던데. 어디, 한번 확인해 봐?”

“어, 없거든요!”

“물고추구만.”

“거사님!”

만몽거사는 대찬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마저 웃었다.

“이 중에 내 말이 얼마나 맞을 거 같은가?”

“좋은 말씀만 해 주셨으니 다 맞으면 좋겠군요.”

물론 마지막의 사족은 빼고 말이다.

“얼마나 맞을지는 나도 몰라. 왜냐, 난 자네를 잘 모르니까.”

“잘 모르는 사람의 사주나 관상을 보고 잘 알게 되는 거 아닌가요?”

만몽거사는 히죽 웃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물론 대강의 감이란 게 있기는 하지. 근데 백지 상태에서는 무용지물이라고.”

“그럼 관상, 사주팔자란 게 왜 있습니까?”

“궁지에 몰린 논리의 유일한 도피처거든.”

대찬은 만몽거사의 말을 찬찬이 짚어 봤다.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온 곽동성이. 내가 가진 빨대 중에 하나야.”

“빨대라뇨?”

“정보원. 필래가 내 주요 거래처 중에 하나거든. 곽 전무가 필래 윗대가리들 신상을 줄줄이 나한테 고해 바치지.”

“곽동성 전무 약점이라도 쥐고 있어요? 그 사람이 왜 거사님께 순순히…….”

“그 사람도 내가 필요하니까. 곽동성이가 언제 한 번 서청규를 데려온 적이 있어.”

“서청규요? 서청수 회장 동생이요.”

대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즈음 필래유통 사장을 지내고 있을 거다.

대찬이 사원으로 있던 5년 동안 서청규가 필래유통 사장을 지내고, 그 바통을 곽동성에게 넘긴다.

그러니 대찬도 서청규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청수와 서청규 형제의 알력다툼은 매스컴에서도 왕왕 다뤄지는 소재였다.

1대 회장인 창업주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청수와 서청규는 음으로 양으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곤 했다.

만몽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유통 사장이잖아요? 곽동성은 필래기획 전무인데 둘이 친분이 있나요?”

“곽동성이 필래기획으로 넘어오기 전에 필래유통 상무였거든.”

“아하.”

대찬은 그런 자질구레한 역사는 까먹고 있었다.

만몽거사가 말을 이었다.

“비서랑 섬씽이 있는데 자기랑 궁합을 봐 달래. 더럽지 않나? 사람은 무릇 애인을 둬도 주름살 개수가 똑같은 애인을 둬야 하는 법인데.”

대찬은 만몽의 말에 동의하는 웃음을 보였다.

“비서가 많이 어렸나 보군요.”

“대학 졸업장에 잉크도 안 말랐다고 했지. 스물다섯이라고.”

“저런.”

대찬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래서 봐 줬지. 사실 개판이었어. 사주 아니라 민증만 봐도 알 일이지. 52년 용띠랑 77년 꽃띠랑 어떻게 사랑을 하나?”

“못하죠.”

“그런데 그 소릴 하면 안 돼. 잘될 거라고 해 줬지. 두루뭉술하게 말고 디테일하게. 물론 곽동성이가 넘겨준 정보들이었지.”

“또 뭐라고 하셨나요?”

만몽거사는 술을 부으면서 말을 이었다.

“대체로 좋은데, 걸림돌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했어. 사랑의 시련이 있을 거다.”

“퇴로를 열어 두신 거로군요. 잘 안 될 경우에 공연히 불똥이 튀니까.”

“그렇지. 교활한 토끼는 굴을 3개 파 놓는다지만, 나는 그 정돈 아니라 하나만 판 거지.”

“충분히 교활하세요.”

“칭찬인지, 욕인지.”

“극찬이죠. 또 뭐라고 하셨나요?”

“시련을 잘 넘겨라. 그러면 꺾은 꽃도 질리기 전까진 생생할 거다. 그렇게 말해 주니 좋아하더군.”

“사랑이 아니라는 걸 거사님도, 서청규 본인도 알고 있었군요.”

만몽거사는 쓴웃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암튼 그때부터 곽동성이랑 나랑은 파트너야. 서청규가 만족하고 돌아갔거든. 그때부터 서청규가 종종 들르더군. 구실은 사주인데 기실은 카운슬링이었어.”

“서청규의 비선 조언가가 된 거군요.”

“비선 조언가라, 자네 말 짓는 투가 대학생 애 같지 않은데.”

“칭찬으로 들을게요.”

“뒷이야기는 밥 먹고 나서 하지. 일단 들어. 말만 했더니 비싼 회에 침 다 묻었겠군.”

둘은 식사를 마치고 지하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만몽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서청규가 종종 철학원에 들르게 된 이후로 곽동성이 자기 말발만으로 안 될 땐 날 찾았어. 곽동성이 촉은 좋은데 말발이 달리거든.”

“거사님 말발로 곽동성 뒤를 받쳐 주시는 거고요.”

“몸은 늙었어도 아직 혓바닥엔 모터가 달달달 잘 돌아가거든. 그렇게 해서 곽동성 주장이 먹혀서 사업이 잘되면 내 장사도 좋아지는 거야.”

“곽동성 말대로 했는데 사업이 잘 안 되면요?”

만몽거사는 씩 웃었다.

“잘 안 될 리가 없어. 내가 유일하게 관상 써먹을 때가 언제인 줄 알아? 빨대 고를 때야. 근데 그게 제법 잘 맞거든.”

“철학원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줄은 몰랐어요.”

“큰손들 상대하려면 이래야 살아. 데이터베이스를 갖춰 놓고 말발로 조져서 빨대를 늘려 나가지. 그것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아.”

“예를 들면?”

“내 머리 하얗지? 이거 염색한 거야, 일부러. 머리가 하얄수록 신뢰가 가거든. 그렇다고 누구처럼 봉두난발하지는 않아. 그건 더러우니까. 수염도 딱 3센티까지만, 기름 발라서.”

“프로시군요.”

“옷도 무채색 개량 한복만 입어. 무게감이 생기거든. 저 허름한 건물도 돈 없어서 쓰는 게 아냐. 적당히 비밀스럽고 적당히 전통 있어 뵈지.”

의외였다.

허술하고 실없기만 하던 만몽이 대찬의 눈에 달리 보였다.

한참 얘기하던 만몽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심했다. 그러더니 대찬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내가 어떻게 자네의 신상을 꿰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만몽의 말에 빠져들다 보니 대찬은 자신의 원래 물음을 잊고 있었다.

‘아, 맞다.’

대찬은 그제야 원론으로 돌아왔다.

“네. 지금 보니 밤중에 리어카를 끌고 계신 것도 궁금해지네요. 그 정도로 궁핍한 살림은 아니실 텐데.”

만몽은 웃음을 머금었다.

“서 회장님이 분부하신 일이야.”

“예? 서청수 회장님이요?”

만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 회장님은 자네를 크게 쓰길 원하시네.”

“저를요? 이해가 안 되네요. 서 회장님이 저를 쓰겠다는 게, 그것도 크게 쓰겠다는 게.”

“알면서 그러나.”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만.”

“이런. 서 회장님은 자네 친구인 서원웅 군을 필래에 들이실 생각이야.”

“그건 예상하고 있습니다.”

만몽은 대찬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예?”

“자네 역시 필래그룹에 채용하실 생각을 갖고 계신단 말이야.”

“몰랐군요.”

서청수가 대찬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자기 회사에 채용하겠다는 생각일 줄은 몰랐다.

“자네를 서원웅 군을 받칠 동량으로 생각하고 계시네.”

“좋은 말로는 동량, 나쁘게 말하면 이몽룡 모시는 방자죠.”

“이왕이면 좋게 생각하게. 매사에 좋게 생각하는 게 좋은 인생을 사는 방법이지.”

대찬은 그때 서청수의 저택에서 둘이 술을 마시며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원웅이 일이라면 뭐든지 성심껏 돕겠다는 말. 그 말, 똑똑히 기억해 두겠네.’

그런 의미였나.

대찬은 뒤늦게 말의 의미를 곱씹고는 웃었다.

잘된 일이다.

어차피 필래유통에 입사하겠다고 처음부터 결심을 굳혔다.

그러던 차에 필래그룹의 수장이 대찬을 채용하겠다고 생각하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실례 되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서 회장님이 자넬 쓰겠다는 거랑, 별 볼 일 없는 사주쟁이가 자넬 찾아온 거랑 무슨 관계냐는 거지?”

“별 볼 일 없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만.”

만몽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 시간 비는 날엔 여기 와서 일하게.”

“예? 일이요?”

거푸 이해될 수 없는 말에 대찬은 묘한 표정만 지었다.

“이를 테면 인턴이랄까.”

“철학원 인턴은 살다 살다 처음 듣습니다.”

“자네가 인생을 덜 살아서 그렇지.”

만몽은 미지근한 커피로 목을 축였다.

“서 회장님의 당부야. 여기서 배울 게 많을 거야.”

“사주팔자를 배우는 게 회사 생활 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사주팔자를 배우란 게 아니야.”

“그럼……?”

만몽은 자신의 눈 주위를 가리켰다.

“사람 보는 눈을 키우란 거지. 이건 학교에서도 안 알려 줘요.”

“사람 보는 눈이요?”

“응. 그래야 성공해. 서 회장님이 특별히 나더러 자네 과외를 시켜 주라는군.”

대찬은 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공부 하기도 바쁜데 철학원에서 무슨 이런 과외를 받으란 건가.

대찬은 속으로 필래유통에 들어가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그 결심을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다.

그런데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앞날을 멋대로 정해 버렸다.

당사자의 의중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필래에 넣어 주겠다면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벌벌 떨 줄 알았나.’

대찬은 괜히 한 번 튕겼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필래에 들어갈 생각도 없고, 거사님한테 과외를 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

만몽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서 회장님 뜻대로 하는 게 좋을걸. 그분을 너무 물렁하게 봐선 안 돼.”

“물렁하게 안 봅니다만, 저도 제 뜻이 있잖습니까.”

만몽은 자세를 편하게 바꾸며 말했다.

“서 회장님이 참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조조가 한 말이야.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

대찬은 불안했다.

조조가 했다는 말 중에 대찬에게 좋게 들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사람을 버릴지언정, 사람이 날 버리게 하지 않겠다.”

“무서운 협박이네요.”

“진정성 있어서 더 무섭지.”

대찬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만몽은 덤덤한 눈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서 회장님의 눈에 든 건 행운이지만, 자네처럼 삐딱선 타면 고달픈 불행이야.”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자네도 너무 모가지 꼿꼿할 거 없어. 하란 대로 하게.”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리어카는 왜 끌고 계셨습니까?”

“내 딴엔 자네 시험해 보려고 한 거지. 끙끙거리는 노인네를 돕나, 안 돕나.”

“갈 길 바쁜 젊은이가 노인을 안 돕는다고 비도덕적인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자네가 날 쌩 지나치면 한번 쓰러져 볼 작정이었어. 그래도 안 도와주면 인간 실격이지. 그럼 나도 자네한테 볼일 없었을 거야.”

대찬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인연의 기회는 도둑처럼 몰래 찾아온다.

그게 바로 가식과 위선이 필패로 귀결되는 이유다.

대찬은 만몽의 뜻대로, 궁극적으로는 서청수 회장의 뜻대로, 더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뜻대로 만몽철학원에서의 근무를 시작했다.

학교를 마치는 대로 만몽철학원으로 향했다.

만몽철학원은 한가로이 팔자나 보는 곳이 아니었다.

‘비과학적 컨설팅 업체랄까.’

만몽의 말이 모두 옳다면 많은 것을 배우는 현장이 될 수 있다.

어쩌면 회사보다 더 회사다운 곳일지도 모르겠다.

만몽이 오피스 와이프라고 부른 중년 여성이 대찬에게 철학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의 이름은 왕말숙이었다.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이름과는 다르게 일처리는 꼼꼼하고 야무졌다.

“여기가 우리 철학원 보물 창고야.”

왕말숙은 철학원 깊숙이 자리한 문을 열었다.

문서가 빼곡히 꽂힌 서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여긴 부모, 자식한테도 말하면 안 돼. 탑 시크릿이야.”

“저게 다 뭔가요?”

“빨대가 물어다 준 정보들. 그리고 거사님이 일일이 수기로 정리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거기에 내가 백업 좀 했고.”

왕말숙은 씩 웃으면서 대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믿고 맡겨도 되겠지?”

“예. 보안은 믿으셔도 됩니다만, 여사님만큼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거사님도 나만큼 할 거라곤 생각 안 하실 거야. 적당히만 잘해, 적당히.”

대찬은 이때는 왕말숙의 넘치는 자신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훗날 알게 되었다.

왕말숙은 모 대기업의 임원 출신이었으며 만몽거사의 첫 번째 빨대이자 사업이 이만큼 번창하도록 한 일등 공신이라는 걸.

만몽거사와 왕말숙은 이 공간을 창고라고 불렀다.

대찬은 창고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내로라하는 기업 임원들의 연락처와 신상 명세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만몽거사의 메모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