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5화
“누구세요?”
“여기 조대찬이라고 있는가?”
“제가 먼저 누구시냐고 여쭸잖아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허허, 어른한테 말버릇 한번 맵다.”
후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못마땅해하는 이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부를 정도의 외양이었다.
작은 소란에 대찬의 시선도 문 쪽으로 쏠렸다.
“어?”
대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골목에서 만났던 리어카 노인이었다.
대찬은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르신, 여긴 어떻게 아시고…….”
“아, 아시는 분이에요?”
“어, 알긴 아는데…….”
대찬의 긍정에 후배는 겸연쩍게 웃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찬은 노인의 방문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밤중에 잠깐 봤기에 얼굴도 익지 않았다.
얼굴을 안다고 한들 대찬의 이름도, 신분도 모르는 그가 에피니키온 부실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노인은 그런 대찬의 당혹감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까?”
“…네. 어차피 저도 나가는 길이었으니…….”
대찬은 여전히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얼굴로 노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노인은 리어카를 끌던 밤과는 달리 말쑥한 차림이었다.
대찬과 노인은 다방으로 향했다.
아직도 서울 시내에 이런 다방이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촌스러웠다.
곰팡내 비슷한 꿉꿉한 냄새가 가득했다.
믹스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둔 자리에서 노인은 대찬을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대찬은 슬슬 피했다.
“눈 피하지 말아 봐.”
“…네?”
“상이 좋아.”
뜬금없이 상 타령이야.
대찬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눈썹이 특이하구먼.”
“눈썹이라뇨?”
“중간에 한 번 끊어진 눈썹은 천하에 재수가 없는 놈이거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져. 그런데 끊어진 부분에 다시 털이 나기 시작했어. 혹시 심었나?”
오광훈 사장과 똑같은 얘기를 한다.
중간이 끊어진 눈썹은 어지간히도 재수 없긴 한 모양이었다.
대찬은 어설픈 웃음을 걸쳤다.
“…아뇨.”
“허, 그렇다면 지독한 불행이 점점 아물고 있단 건데. 재밌군.”
“관상이 취미십니까?”
대찬의 물음에 노인은 역정을 냈다.
“취미라니. 그런 싸가지 없는 말이 어디 있나?”
“그렇게 버릇없는 말이었나요?”
“당연하지!”
노인은 씩씩거리면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었다.
대찬은 명함에 적힌 글자를 발음했다.
“사주, 궁합, 관상, 택일 전문… 만몽철학원 만몽거사…….”
“내가 만몽거사야.”
노인은 히죽 웃었다.
“나중에 들르게. 은인한테 제대로 접대 한번 해야지.”
“괜찮은데요…….”
철학원의 벌이가 좋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밤중에도 리어카 끌면서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리어카 한 번 끌어 준 게 접대씩이나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은 극구 방문을 권했다.
“아니, 근데 일단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고, 에피니키온에 소속된 건 어떻게 아셨는지부터…….”
겨우 본론으로 돌아온 대찬이 노인, 만몽거사에게 물었지만 만몽은 웃으며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철학원에 방문하면 말해 주겠네.”
“은근히 남 괴롭히기 좋아하는 스타일이셨군요.”
대찬은 한숨을 쉬었다.
대찬의 시선은 허름한 건물에 머물렀다.
그렇잖아도 바쁜 일상이었다.
만몽의 초대에 응하지 말까 고민했다.
그래도 만몽의 말이 내내 신경 쓰이는지라 대찬은 만몽철학원 앞에 섰다.
“음, 만몽철학원, 맞네.”
대찬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그러자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그를 맞았다.
“예약하셨어?”
“예, 예약이요?”
“사주 보러 온 거 아녀?”
“사주는 아니고요. 만몽거사님이 초대해 주셔서…….”
그 말에 여성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아아, 그 리어카 뽀이.”
“아, 예…….”
‘리어카 보이는 뭐야, 맘대로 별명 붙이기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럼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실래요? 녹차? 커피?”
“녹차 부탁드립니다.”
흡연자에게 믹스 커피는 쥐약이다.
본인도 감당 못할 입 냄새를 풍기는 법이다.
대찬은 녹차를 홀짝이면서 접대실에서 만몽거사를 기다렸다.
‘겉은 후줄근하더니 속은 제법 삐까뻔쩍한걸…….’
일개 철학원 주제에 접대실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것부터가 그랬다.
접대실에 들여놓은 무슨 조각상 하며 수석, 자개장 따위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찬이 녹차를 다 비울 즈음 만몽거사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등장했다.
“어, 자네 왔어? 많이 기다렸나?”
대찬은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아닙니다.”
“갑자기 웬 다나까?”
“아…….”
대찬은 자신의 비열한 속성을 새삼 확인했다.
그로 하여금 깍듯한 태도를 취하게 만든 건 접대실과 그 안의 조각상, 수석, 자개장이었다.
그리고 예약하셨냐는 중년 여성의 물음이었다.
만몽거사가 겉과 달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대찬의 태도가 본능적으로 달라졌다.
아직 그저 그런 샐러리맨의 속성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그였다.
대찬은 씁쓸하게 자조했다.
“자, 내가 감사 표시를 한다고 했으니 밥 한번 거하게 사지. 일식 좋아하나?”
“없어서 못 먹죠.”
“좋아. 그럼…….”
만몽거사가 얇은 외투를 걸치고 나서려는데 중년 여성이 그를 붙잡았다.
“거사님, 오늘 그분 오시기로 돼 있는데요.”
“아차!”
“아무리 평소에 거사님이 제멋대로라고 해도 그분하고의 약속은 지키셔야 해요.”
만몽거사는 히유, 한숨을 쉬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몇 시 예약이지?”
“지금인데 그분 스타일로 보면 20분쯤 있다가 오시겠죠.”
만몽거사는 대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데…….”
대찬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저 그럼 나가서 담배라도…….”
“아, 그럼그럼. 담배는 미루면 안 되지.”
대찬은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입에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갔다.
칙칙, 라이터를 켜서 담뱃불을 붙이고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고급 세단이 만몽철학원 앞에 멈춰 섰다.
차가 멈추자마자 운전석의 기사가 내려 쪼르르 뒷좌석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비대한 몸집의 중년 남성이 내렸다.
그는 익숙한 듯 에스코트를 받으며 철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담배를 피우면서 그쪽을 흘끗 곁눈질로 살폈다.
‘뭐야… 저 사람 곽동성 아니야?’
대찬에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필래기획의 곽동성 전무.
웜샤인과의 협업과 서청수 회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대찬은 필래그룹의 사옥을 종종 드나들었다.
그래서 필래그룹 중역들의 얼굴을 종종 볼 기회가 있었다.
말은 못 섞어 봤지만 대찬은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굳이 두 번째 삶의 경험을 반추하지 않아도 대찬은 그를 잘 알았다.
첫 번째 삶에서, 필래그룹의 곽동성은 나중에 필래유통의 사장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필래유통에서 10년을 썩어 본 경험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곽동성이 왜 이런 델…….”
만몽거사가 말하던 그분이 곽동성이었던 모양이다.
냉철한 계산에 움직여야 할 회사의 중역이 믿음에 근거한 사주팔자를 신용한단 말인가.
“별일이네.”
대찬은 담배를 다 태우고 접대실에 들어가 한참을 기다렸다.
만몽거사는 곽동성과 30분 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는 접대실로 오면서 대찬에게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 기다렸지?”
“아, 아니에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대신 점심은 죽이는 데로 가자고.”
만몽거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대찬에게 물었다.
“자네, 면허 있나?”
“네. 경험은 많이 없지만.”
말단 사원 때는 면허가 없는 게 큰 걸림돌이 된다.
상사를 따라 이리저리 출장을 다니기 마련이다.
면허가 없으면 상사를 고생시킬 수밖에 없다.
상사도 당장은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짜증이 쌓인다.
그게 애먼 구석에서 표출된다.
넘어갈 일인데도 트집을 잡히고 야단을 맞는다.
면허가 없어서 그렇다.
그렇기에 대찬은 진즉에 면허를 따 두었다.
“벌써 면허까지 따 뒀단 말야? 의외로 옹골차군.”
“의외라는 말씀은 굳이 안 하셔도 되는데요.”
“내가 차는 있는데 면허가 없어서 먼지만 쌓아 두고 있거든. 자네가 운전 좀 하면 되겠구만.”
“그럴게요.”
먼지만 쌓아 두기에는 제법 값나가는 승용차였다.
이 양반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다고 대찬은 생각했다.
그는 만몽거사가 말하는 대로 모처의 일식집으로 향했다.
만몽거사는 일식집 사장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은 널찍한 방으로 안내했다.
대학생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 낼 코스 요리가 등장했다.
만몽거사는 그것에 어울리는 술도 주문했다.
“이제 2신데 더 일 안 하세요?”
“오늘은 샷다 내렸으!”
“장사가 잘되시나 봐요.”
만몽거사는 대찬을 흘끗 보고는 회를 집어 씹었다.
“그걸 어찌 알아?”
“접대실도 따로 있고, 예약도 따로 해야 하고, 또 그 따로 일 봐주시는 여성분까지 두고 있으니.”
“아, 말숙이? 걘 내 이거야.”
만몽거사는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대찬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만몽거사가 킬킬 웃었다.
“오피스 와이프지.”
“사모님이 들으시면 참 좋아하시겠어요.”
“걱정 마. 우리 마누라 30년 전에 하늘나라 갔어.”
“…….”
“유언으로 얼른 다른 여편네 만나라고 했단 말이야. 그래야 나 좋았던 줄 알 거라면서.”
“아, 죄송합니다…….”
“됐어, 됐어. 술맛 떨어지는 얘기는 그만하고.”
만몽거사는 대찬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대찬은 공손하게 받고 이어서 만몽거사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오른손으로 병을 쥐고 상표는 감싸고.
샐러리맨의 몸에 밴 예절이었다.
“대학생답잖게 쓸데없는 격식을 차리는구먼.”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받는 쪽에서는 기껍지. 주는 쪽에서 불편하고.”
“저는 이게 편합니다.”
“편한 대로 하시게.”
낮술이 몇 잔 돌자 대찬이 슬쩍 말했다.
“그런데 아까 곽동성 전무 아닌가요? 필래기획.”
“자네가 곽동성이를 알아?”
만몽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네, 잘 알진 않지만요.”
만몽은 흐흐 웃었다.
“변태구먼. 보통 서청수는 알아도 그 계열사 전무까지 꿰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이야.”
“사주팔자 보시는 분이 그런 걸 꿰고 있는 게 더 변태 같습니다만.”
만몽거사는 킬킬 웃었다.
“모르는 소리. 이쪽 업계야말로 정보가 생명이야. 프로들은 사주나 관상을 안 봐. 대신 그 사람을 보지.”
“…네?”
“내가 자네 관상이나 한번 봐 줄까?”
만몽거사는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대찬을 봤다.
“이마가 깨끗해 초년에 큰 불운은 없지만, 그렇다고 부모 덕을 봐서 출세할 것 같지는 않군.”
“몸 성히 낳고 이때까지 길러 주셨으니 감사하긴 하지만, 부모님 덕에 출세하긴 어려울 것 같긴 합니다.”
“눈썹은 말했으니 넘기고, 천 냥 관상 중에 눈이 90냥인데, 눈깔이 호랑이 눈깔이니 정의롭고 적극적이니 좋은 눈이야.”
만몽거사는 대찬의 미간에 검지를 콕 갖다 대고 콧대를 타고 스르르 내려갔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 영 개운한 느낌은 아니었다.
“산근이 눈두덩에 비해 살짝 높고, 준두가 윤택하니 코도 그만하면 좋고. 산근에 진한 점이 있으니 좋든 싫든 일복은 터져 나가겠군.”
“일복은 타고났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피부가 희면 부모를 죽인다는데.”
“아무리 못 배워 먹었어도 그렇진 않죠…….”
“그래. 그건 잡소리일 뿐이고, 희면 좋은 피부야. 예쁘니까.”
“감사합니다.”
한참을 진지하게 대찬의 관상을 보던 만몽거사는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