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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4화 (53/556)

난 할 수 있어 54화

대찬은 언론이 자신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수식어를 선사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학보사와의 짧은 인터뷰는 거푸 귀찮게 연락해 오는 언론을 떼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찬은 그것으로 시시콜콜한 가십에서 탈출했다.

다시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이 일은 미네소타 주지사와 안면 튼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거야.’

후일 마이크 햇치가 내 인맥이 될까?

대찬의 뇌리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일은 미네소타 주지사와 인연이 닿는 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햇치 주지사가 대찬의 인맥이냐는 질문에는 물음표가 붙었다.

어디까지나 인맥이란 서로의 이익이 합일돼야만 성립한다.

‘결국 나 하기 나름인 거지.’

대찬은 햇치 주지사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 정도의 인물이 돼야만 했다.

그러면 마이크 햇치는 분명히, 기꺼이 대찬의 인맥이 되어 줄 터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까지는 두 달여의 시간이 남았다.

대찬은 그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에피니키온은 이미 잘 굴러가고 있었다.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들은 인맥의 기본적인 토대가 될 터이기에 뜸하지 않게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협업이니 뭐니, 대찬의 머리를 손오공의 금고아처럼 꽉 조이던 일에서는 손을 떼기로 했다.

이미 궤도에 안착해 잘 굴러가던 참이었다.

잘되는 일에 굳이 손을 대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화룡점정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족이 된다.

대찬은 대학생으로서 남은 1년의 시간을 오롯이 자기계발만을 위해 쏟기로 했다.

“뭐 먹고사냐.”

이건 비단 대찬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이즈음의 나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었다.

대찬의 동기인 최재한, 서원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과 자리를 가지면 항상 나오는 말이 뻔했다.

“재한아, 넌 뭐 할 거냐? 회사?”

“회사는 무슨. 나 국문과야. 누가 뽑냐?”

최재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매년 단군 이래 최악의 취업난이었다.

국문과를 비롯한 순수 인문학은 이 취업 한파를 정통으로 맞았다.

기업들은 상경 계열 학생들을 선호했다.

인문학도들에게는 싸늘했다.

첫 번째 삶에서의 최재한 역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대찬은 최재한의 계획이 궁금했다.

과연 이번에도 공무원이 되겠다고 할지.

대찬은 최재한에게 물었다.

“그럼 뭐 하려고?”

“기자.”

최재한의 대답에 대찬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바뀌었다, 공무원에서 기자로.’

대찬은 천천히 입가를 벌렸다.

“기자?”

“응. 그 길이 좋을 거 같아.”

“왜 기자가 되고 싶은데?”

“멋있잖아. 다이나믹하고.”

최재한의 바뀐 선택이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공무원의 삶보다 기자의 삶이 더 피폐할 수 있다.

그 전에 언론사 입사에 낙방할지도 모른다.

다만, 대찬은 그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의 최재한에게 있어 바뀐 것은 오직 대찬 하나뿐이었다.

결국 대찬이 최재한 주무관을 최재한 기자로 바꿨다.

가볍지 않은 책임감이 그의 가슴을 눌렀다.

대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재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서원웅에게 물었다.

“원웅아, 너는?”

“나?”

“응. 너는 뭐 할 거야?”

최재한의 질문에 서원웅은 멋쩍게 웃었다.

“난 아마 아버지 회사 들어갈 거 같아.”

“아, 젠장.”

최재한은 괜히 물어봤다는 듯 이마를 탁 짚었다.

가뜩이나 취업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최재한은 지끈지끈 오르는 두통에 머리를 감쌌다.

“좋겠다! 아빠 회사가 그냥 회사도 아니고 필래라니.”

대찬도 웃으며 말했다.

“출세는 보장됐군.”

하지만 서원웅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취업 걱정이야 없지만, 나도 나름대로 고민이 많아.”

서원웅의 말에 최재한이 울컥했다.

“고민은 무슨 고민!”

“알잖아, 나 서자인 거.”

서원웅의 적나라한 말에 최재한의 화가 금방 식어 버렸다.

최재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쩔 줄 몰랐다.

“아, 그, 그거…….”

“차라리 필래 안 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몰라.”

서원웅의 말은 진심이었다.

언제까지나 서청수가 필래의 주인이지는 않을 터였다.

결국 그의 장남인 망나니 서승학이 필래의 회장이 될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본 형이지만 날 곱게 봐 줄 리가 없잖아.”

“혹시 알아? 동생 생겼다고 막 예뻐할…….”

서원웅은 그렇게 말하다가 손찌검 황태자 사건을 떠올리고 말끝을 흐렸다.

인간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인물이다.

“…리가 없겠구나.”

“두려워.”

서원웅의 고민을 대찬과 최재한은 오롯이 공감하지 못했다.

재벌 총수를 아버지로 두지도 않았고, 서자도 아니었다.

서원웅 역시 종류가 다를 뿐, 같은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허전해진 마음에 셋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취직을 앞둔 4학년은 필사적이었다.

고3 시절 높게만 보였던 대학의 장벽은 이제 와 돌아보니 한없이 낮게만 느껴졌다.

대학 문턱이 동네 뒷산이라면 취업 문턱은 한라산, 백두산이었다.

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기행도 이제는 철없게 느껴지는 시기였다.

그래서도 안 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럴 흥도 안 났다.

대찬의 주변도 취업 준비로 분주했다.

최재한이 선택한 기자의 길도 험난했다. 고시가 아니면서 언론고시라 불리는 길이었다.

서원웅은 일찍이 필래그룹 입사가 결정되었다.

오너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서청수는 체면을 중시했다.

그는 유능한 낙하산을 원했다.

서청수는 서원웅을 필래그룹의 계열사 중 가장 근무 환경이 열악한 필래토건에서 인턴으로 일하도록 했다.

체력 약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서원웅은 한여름에 비지땀을 흘려 가며 현장에서 일했다.

이렇듯 모두가 바쁜 4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술친구가 사라진 마강국은 에피니키온 부원들에게 더 히스테리를 부렸다.

머리가 굵어진 후배들도 이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 선배! 회장 끝났으면 이제 좀 뜸하셔도 되잖아요!”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그런 시끌벅적한 에피니키온의 풍경에 대찬은 없었다.

대찬은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남들 다 하는 공부에 더해 책도 열심히 읽었다.

인문학은 그 자체로는 먹고사는 데 큰 무기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을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취업 준비에만 목을 매 입사했던 첫 번째 삶의 대찬은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세태의 뒤를 쫓느라 급급하지 않았다.

군주론부터 묵자까지, 대찬은 묵묵히 책장을 넘겼다.

대찬은 여유롭게 세태를 앞서며 남들이 소홀히 하는 것도 챙기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별도 희미해지는 밤과 새벽의 경계까지 공부한 대찬은 녹초가 된 몸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의 골목은 한적했다.

대찬은 적막을 느끼며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저만치 앞서가는 리어카가 보였다.

리어카는 대찬이 다섯 걸음 내디딜 때 겨우 한 걸음 거리만 앞으로 나아갔다.

리어카는 금세 따라잡혔다.

대찬이 앞질러 곁눈질로 살폈다.

척 보아도 나이가 일흔은 돼 보이는 노인이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어르신, 어디까지 가세요?”

대찬이 묻자 노인이 그를 올려다봤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대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대찬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왜,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세요?”

노인은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나 저기 사거리 가기 전 골목에서 좌회전까지.”

“그럼 거기까지만 제가 끌어 드릴게요.”

대찬의 말에 노인은 놀랐다.

“으, 으응? 아니야. 괜찮아. 학생도 이 시간까지 고생했을 텐데 안 그래도 돼.”

“이대로 지나치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기어코 리어카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부탁하네.”

대찬은 묵묵히 노인이 말한 곳까지 리어카를 끌어다 주었다.

노인은 대찬에게 박카스 1병을 내밀었다.

“고마워. 이거라도 하나 마시면서 가.”

“고맙습니다.”

대찬은 노인의 성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노인은 멀어지는 대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대찬은 집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양반, 왜 사람을 빤히 보고 그래.”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대찬은 강의가 끝나고 오랜만에 에피니키온 부실을 찾았다.

갑자기 웜샤인과의 협업에 난처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후배의 연락을 받고서였다.

그는 착착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여럿이 머리를 싸쥐고 고민하던 문제가 대찬의 전화 몇 번으로 해결되었다.

후배들은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역시 대찬 선배가 최고다.”

“강국 선배였으면 저희더러 어떻게든 해 보라면서 막 윽박지르기만 했을 거예요.”

대찬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마강국 말이 틀리지 않네. 이런 건 너희가 어떻게든 했어야지! 취업 때문에 바쁜 사람 불러내고 말이야.”

“그럼 죄송하니까 저희가 한잔 살게요. 저녁 드시고 가요.”

“됐어. 나중에 여유 좀 생기면 보자. 그땐 내가 살 테니까.”

“아쉽네요.”

“아쉬워해 주니까 고맙다. 다른 문제는 없지?”

“네. 선배도 취업 준비 잘하고 계시죠?”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꾸역꾸역하는 거지. 취업한 다른 선배들 소식은 좀 들리냐?”

“선배도 아시겠지만 선배 동기분들 중에는 아직 없고요. 그 위 기수 선배님들 소식은 간혹 들리죠.”

“잘된 사람들 이름만 들려오겠네.”

후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요. 아, 유백기 선배도 취직했다던데.”

오랜만에 들린 이름에 대찬의 귀가 쫑긋 섰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간 자신의 삶을 꾸려 가느라 여념이 없기도 했고, 그가 저지른 세 번의 과오로 그의 이름은 에피니키온 내에서 금기시되던 차였다.

대찬은 흥미를 갖고 후배에게 물었다.

“어디 취직했다던?”

“아, 어디더라……. 야, 어디라고 했지?”

기억해 내는 데 실패한 후배가 다른 후배에게 물었다.

그러자 다른 후배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필래유통이요.”

“필래유통……?”

“네. 거기 대외협력팀인가? 거기 들어갔대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백기는 대찬의 첫 번째 삶과 마찬가지로 필래유통에 입사했다.

에피니키온에서 금기시될 만큼 추태를 부려 놓고도 필래유통에 입사했다.

그렇다면 유백기의 필래유통 입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란 뜻이었다.

대찬은 그 후배에게 물었다.

“유백기 선배가 그쪽하고 연이 있어?”

“그러게요. 저희도 그게 의문이거든요. 선배도 아시겠지만 유백기 선배는 월짝횐데 필래에 들어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뭐, 추방됐으니 월짝회라 하기도 뭐하지만.”

“너희도 아는 게 없다는 거지?”

“네.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어요.”

대찬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후사정이야 어떻든 유백기가 필래유통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더더욱 필래유통에 들어가 줘야지.’

대찬이 필래유통에 입사한다면 이번에도 역시 유백기의 후배가 된다.

불리한 상하 관계를 극복할 자신이 대찬에게는 있었다.

대찬은 후배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난 이만 가 볼게. 혹시 들을 만한 소식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 주고.”

“정말 가시게요? 다음에 또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금방 또 볼 거야. 잘들 있어라.”

후배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대찬을 놓아주었다.

그 조급하고 빡빡한 일상이 곧 자신의 미래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선배! 그럼 이번에 웜샤인에서 할머니 손맛빵 신제품 나온 거나 맛보고 가세요.”

“아, 그냥 가려고 했는데 손맛빵은 먹고 가야지. 할머님들 솜씨가 보통 야무지셔야지.”

대찬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후배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얼른 갖고 올게요!”

후배가 빵을 가지러 부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안으로 들어오려는 누구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깜짝이야.”

후배는 눈을 크게 뜨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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