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3화
김산하는 맥주 한잔이라고 했지만, 둘은 적잖은 양의 술을 마셨다.
자정이 넘어갈 무렵, 그들은 취할 대로 취했다.
술기운에 마취된 그들의 두뇌는 자정부터 새벽까지의 일을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대찬은 2박 3일을 김산하의 집에서 머물렀다.
딱히 관광이랄 것도 없이 푹 쉬다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김산하는 부랴부랴 출근 준비에 바빴다.
느긋한 대찬은 토스트와 소시지를 굽고, 스크램블 한 계란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한 컵 가득 우유를 따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산하는 그런 대찬의 뒷모습을 한동안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식탁 앞에 앉았다.
버터를 발라 노릇노릇하게 익힌 식빵에 살구잼을 얇게 발랐다.
김산하는 토스트를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출근 때문에 공항까지 배웅 못 나갈 거 같아. 미안.”
“뭘, 당연한 말씀을.”
대찬도 식빵을 씹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김산하는 우유를 죽 마시고 대찬에게 물었다.
“너 이제 4학년이지? 슬슬 취업 준비 해야 하지 않아?”
“해야죠. 아마 에피니키온 일에도 신경 거의 못 쓸 거 같아.”
“어느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글쎄요.”
“너는 4학년씩이나 돼서 아직도 취업 고민 안 해 놨니?”
“고민한다고 회사에서 덜컥 뽑아 주나요, 어디.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으니 알아주는 곳이 있겠죠. 안 되면 수영실업이라도 가지, 뭐.”
김산하는 미간을 좁혔다.
“너 정도 경력이면 더 좋은 곳 들어갈 수 있어.”
“수영실업도 충분히 좋은 회산데?”
“너도 해외 취업 알아봐. 네가 원한다면 내가 알아봐 줄 수도 있어.”
김산하는 대찬이 자신에게 해외 취업을 알아봐 달라고 말해 주길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대찬은 퍽퍽한 식빵을 먹고 우유로 목을 축이면서 웃었다.
“해외에서는 못 살 거 같아요. 일단 국내 회사 쪽으로 알아보려고.”
“흥, 그래라.”
“누나는 밖에 나와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그러니까 너더러 해외 취업 하라는 거 아니야.”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곤 어깨에 가방을 메며 일어났다.
“잘 들어가고, 조만간 또 봐. 설거지는 하지 마! 퇴근하고 와서 내가 할 거니까.”
“고생해요. 다음엔 한국에서 보겠다.”
김산하는 대찬을 흘끗 돌아보고 현관으로 향했다.
구두를 신으면서 그녀는 한마디 덧붙이고 문 밖으로 나갔다.
“좋았어, 너랑 있어서.”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김산하는 아쉬운 눈빛을 남기고 먼저 집을 나섰다.
대찬은 설거지는 물론이고 그다지 세심하지 못한 김산하가 살피지 못한 집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공항으로 향했다.
LA 국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미국 생활이 이것으로 끝났다.
대찬은 비행기 창문 밖으로 멀어지는 아메리카 대륙을 한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곧 구름에 가려 대륙은 사라졌다.
오랜 비행은 몸을 축나게 했다.
대찬은 캐리어를 끌고 공항 출국장을 나섰다.
‘목욕탕 가서 몸 좀 푹 담그고 싶네.’
대찬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 했다.
이어서 오래 참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흡연실로 걸어갔다.
담배를 물려는 찰나, 수상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불안한 느낌에 대찬은 곁눈질로 주변을 살폈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헛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담배를 물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대찬을 덮쳤다.
한둘이 아니었다.
대찬의 몸이 순식간에 몇 사람의 완력에 의해 결박되었다.
“뭐, 뭐야!”
놀란 대찬의 입술이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괴한 중 하나가 대찬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얌전히 따라와. 안 그러면 다친다.”
그 소리를 듣고 대찬은 팍 김이 샜다.
그는 팔꿈치로 괴한의 명치를 쿡 찔렀다.
“윽!”
“놀랐잖아!”
대찬은 괴한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괴한의 정체는 마강국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가 데리고 온 대찬의 후배들이었다.
마강국은 실실 웃으면서 대찬의 사타구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줌 안 지렸냐?”
“손 치워!”
마강국은 대찬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조대찬이 이거 완전 새가슴이네. 펄떡펄떡 뛴다, 심장이.”
“너 같은 덩치가 갑자기 덮치는데 어떻게 안 놀라냐!”
마강국은 낄낄 웃었다.
후배들이 대찬을 향해 명랑하게 인사했다.
“선배님! 귀국 환영합니다.”
“다들 고맙다. 바쁠 텐데 공항까지 나와 주고.”
“선배가 맛있는 밥 사 주실 건데요, 뭐.”
“내가? 내가 언제?”
어리둥절한 대찬은 마강국의 실실 웃는 꼬락서니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마강국이 대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럼 입 싹 닦으려고 했어?”
“에휴. 그래. 가자, 가.”
대찬은 퉁명스레 말했지만, 밥 한 끼 정도야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을 만큼 그들이 고마웠다.
다들 각자만의 중요한 사업이 있는 청춘들이었다.
별로 해 준 것도 없는 선배 마중을 나오겠다고 서울에서 인천까지 고된 걸음을 한 이들을 빈속으로 돌려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왁자지껄하게 잡담을 떠들며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배불리 한 끼를 함께했다.
대찬이 그동안 그리워했던 소주 몇 잔도 곁들였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친구와 술잔을 기울인 마강국은 텐션이 잔뜩 올라갔다.
“집에 내일 들어간다고 해. 오늘은 무조건 밤샘이다.”
대찬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술도 못 마시는 게 밤샘은 무슨.”
“야! 너 미국 가 있는 동안 주량 엄청 늘었거든?”
“됐어. 술은 이쯤 하고 목욕탕 가서 몸이나 좀 담그자. 지금 완전 녹초거든.”
대찬은 그렇게 자리를 파했다.
남자 무리는 대찬의 영도하에 목욕탕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훌렁훌렁 옷을 캐비닛에 멋대로 던져 놓고 김이 풀풀 오르는 탕으로 뛰어들었다.
대찬은 탕으로 들어오는 마강국을 흘끔 보고 말했다.
“너는 어째 몸이 점점 더 좋아지냐?”
“몸이라도 안 좋아지면 체대 다니는 보람 없게?”
대찬은 마강국의 팔을 주물럭거렸다.
“근육 봐. 터질 거 같은데.”
마강국도 대찬의 팔을 주물럭거리고는 픽 웃었다.
“네 거는 물러 터질 거 같다.”
“이거 확 한 번 더 피떡 만들어 줘야 되는데.”
그러자 후배들이 웅성거렸다.
“강국 선배, 언제 대찬 선배한테 피떡 된 적 있어요?”
“피, 피떡은 무슨!”
“얼굴 빨개지는 거 보니까 진짠가 봐요.”
“닥쳐! 더워서 그래! 더워서!”
마강국이 꽥 소리를 지르자 목욕탕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일동은 일제히 귀를 틀어막았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찔리니까 화내는 거 봐.”
마강국이 한바탕 변명을 떠들어 대려고 하자, 대찬은 슬금슬금 머리끝까지 탕에 들어갔다.
피로로 뭉친 근육이 더운 물에 해초처럼 풀어졌다.
대찬은 몸이 가뿐해진 채로 집에 돌아왔다.
소파에서 감자칩을 와작거리며 TV를 보던 조수진이 대찬을 반겼다.
“야, 이게 누구야? 미네소타 주지사 당선 일등공신 조대찬 아니야!”
“아우,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마. 쪽팔려.”
“내가 틀린 말 했나, 뭐.”
“아빠, 엄마는?”
“저녁에 너 먹인다고 장 보러 가셨어. 아마 한 트럭 사 오실 거다.”
“마트 거덜내시겠구나.”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조수진은 대찬의 손을 흘끔 바라봤다.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선물 사 왔어?”
누나의 물음에 대찬은 손에 든 것을 쑥 내밀었다.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사 왔어. 누나 건 향수, 엄마는 스카프, 아빠는 술.”
“안 그래도 아빠 술 끊으라고 엄마 성환데,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아빠 술도 안 드시면 무슨 낙으로 사시겠어. 그리고 산하 누나가 부모님 갖다 드리라고 이것저것 또 챙겨 주고.”
“그 사람 좀 있으면 내 올케 되겠다.”
“아이고, 조수진 전매특허 넘겨짚기 또 나왔네.”
“두고 봐라,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조수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찬에게서 얼른 선물을 낚아챘다.
향수가 그의 몫이었다.
“오, 내가 딥티크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누나 동생이면 그 정돈 해야지.”
“좋아! 맘에 들었어.”
대찬은 다른 손에 들린 건 거실 한구석의 서랍 위에 올려놓았다.
칙칙 향수를 뿌리던 조수진이 물었다.
“그건 뭔데?”
“주지사가 준 감사패.”
“올, 조대찬 좀 멋있네.”
대찬은 씩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신의 각별한 지지와 헌신에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마이크 햇치, 미네소타 주지사’
조수진의 예언대로 대찬의 부모는 어마어마한 양의 식재료를 사 갖고 왔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어? 어디 얼굴 좀 보자.”
“잘 지내셨어요?”
“아들 보고 싶어서 잘 못 지냈어. 어디, 다친 덴 괜찮고?”
“네! 흉 진 데 없이 깨끗합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마주한 아들의 손을 잡고 한참 반가워했다.
아버지는 대찬을 흘끔 보더니 한마디 보탰다.
“썩을 놈의 양키 새끼들. 어디 남의 귀한 집 아들내미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고 있어.”
“성질 같아서는 확 들이받았어야 했는데, 거사를 위해서 꾹 참았어요. 알죠? 내가 일부러 맞은 거. 아빠 아들 싸움에서 진 거 아닙니다?”
“주저리주저리 구차하게 혓바닥 안 길어도 다 안다. 조씨 집안이 대대로 장사 집안이잖냐.”
“그렇죠?”
아버지는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다.
“나도 왕년에 돈암동 일대를 주먹 하나로 주름잡았지. 그게 언제냐, 박통 말년이었나. 혼자 지나가다가 깡패 새끼들한테 둘러싸였는데, 내가 18 대 1로…….”
아버지의 말이 길어지자 어머니가 한마디 톡 쐈다.
“혓바닥 길면 구차하다더니 지 혓바닥은 구만 리야.”
“아니, 이 여편네가! 이건 혓바닥이 긴 게 아니고 소싯적 무용담이야!”
“아, 닥쳐요!”
어머니는 식칼로 도마를 쾅 내리쳤다.
그 한 방에 조씨 집안 남자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입을 합 다물었다.
남자들이 침묵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길고 긴 요리를 시작했다.
대찬은 잔뜩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장사 집안은 조씨가 아니라 신씨인 거 같네요.”
“…….”
아버지는 유구무언이었다.
그는 대찬이 올려둔 마이크 햇치의 감사패를 흐뭇이 바라보다가 대찬이 사 온 양주를 기분 좋게 마셨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여지없이 이어졌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어, 술맛 좋다.”
“좋은 날이니까 오늘만 봐줄게.”
어머니도 여느 때와는 달리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4인 가족으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양의 음식이 만들어졌다.
4인용 식탁이 부족해 접시를 겹으로 쌓을 정도였다.
대찬은 헛웃음부터 터트렸다.
“이걸 다 어떻게 먹어요?”
“못 먹으면 옆집, 윗집, 아랫집 갖다주면 되지. 뭘 그것부터 걱정하니? 네 배부터 불려라.”
“잘 먹겠습니다.”
대찬은 히죽 웃으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꼭 1년 만에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미네소타에서는 끼니의 절반이 햄버거였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간장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외가에서 가져온 김치의 쿰쿰한 젓갈 냄새가 강렬히 존재감을 발했다.
이쯤 되고 나서야 대찬은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다는 걸 온전히 실감했다.
마이크 햇치가 박빙의 선거전에서 마지막 업어치기 한 판을 가능하게 한 대찬의 폭행 사건은 한국에서도 화제였다.
대찬이 입국한 시점에도 간간이 세간에 언급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름난 언론들에서 대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대찬은 공손히 사절했다.
다만, 딱 한 번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다름 아닌 학보사였다.
대찬은 학보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정황과 소감을 짤막하게 말했다.
그것 외엔 일절 언론과 접촉하지 않았다.
대찬의 신상에 별로 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 선행이나 의로운 일로 이름을 얻었다면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의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찬이 당한 폭행은 대찬의 가치를 빛내 주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마이크 햇치의 승리를 위해 대찬이 이끌어 낸 결과이기는 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냥 폭행 피해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