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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2화 (51/556)

난 할 수 있어 52화

“왜 이 한국의 젊은 청년이 테러를 당해야 합니까? 왜 우리 격조 높은 미네소타 주민이 테러리스트가 돼야 합니까? 누가 이 상황을 부채질했습니까?”

마이크의 목소리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그 현장에는 폴렌티의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관했습니다. 심지어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폴렌티를 주지사로!’라고 쓰인 피켓을 든 채 말입니다. 저는 분노와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찬은 불쌍하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마이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폴렌티는 끊임없이 갈등을 조장합니다. 싸움을 부추깁니다. 우리 미네소타는 갈등의 땅, 싸움의 땅이 아닙니다!”

마이크는 대찬의 손을 꽉 붙들었다.

“왜 백인과 유색인종, 주민과 유학생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싸워야 합니까? 미네소타는 어느 한 집단만의 땅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땅, 모두가 사는 땅입니다!”

그러자 강당에 모인 미네소타 대학교의 학생들이 박수로 호응했다.

마이크 햇치는 연설을 마치고도 한참 눈물을 흘렸다.

대찬이 캠프에 제공한 영상은 마이크의 연설과 버무려져 TV 광고로 제작되었다.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대찬,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바이킹, 이를 수수방관하고 때론 비웃는 폴렌티의 지지자.

“미네소타는 갈등의 땅, 싸움의 땅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땅, 모두가 사는 땅입니다!”

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뒤에 큼지막한 슬로건이 떠올랐다.

침착한 여성 성우의 목소리가 그걸 읽었다.

“Minnesota, Where everyone lives.”

미네소타, 모두가 사는 땅.

첫 TV 광고가 송출되자 마이크의 선거 운동원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존 넬슨이 대찬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빈센트, 네가 큰일을 해냈어.”

“광고 잘 만들었네요.”

존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안 좋아, 네 상처를 정치에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뭘요.”

대찬은 덤덤하게 웃었다.

그는 그러라고, 정치에 이용하라고 그 상황을 만들었다.

여전히 안 아픈 구석이 없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사적으로는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공적으로는, 혐오와 갈등을 부추겨 제 표를 끌어당기는 팀 폴렌티에게 유효타를 먹이게 되어 흡족했다.

박빙으로 이어지던 마이크 햇치와 팀 폴렌티의 선거전은 이 한 방으로 승부가 갈렸다.

아슬아슬한 박빙의 우위가 개표 내내 유지되었다.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 마이크 햇치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마이크 햇치 캠프의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됐다!”

“좋았어!”

대찬도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을 만끽했다.

활짝 웃으며 유진과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경쾌한 하이파이브였다.

당선이 확정된 순간 마이크 햇치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는 캠프 간부들과 악수를 나누고, 가장 마지막으로 대찬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미스터 초, 고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주지사님.”

대찬은 웃음을 지으며 공손히 마이크 햇치의 손을 잡았다.

깍듯한 동양 예절에 캠프 사람들은 뜨겁게 박수를 쳤다.

마이크 햇치는 대찬의 손을 번쩍 들면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카메라 렌즈들을 향해 외쳤다.

“Minnesota! Everyone lives!”

최종 득표율 48.2 대 46.5.

마이크 햇치가 현직 주지사인 팀 폴렌티를 꺾고 미네소타주의 새 주지사가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팀 폴렌티가 1퍼센트 차이로 승리를 거두어 주지사 연임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대찬은 알지 못했다.

굵직한 역사가 대찬의 손에서 물줄기를 틀었다.

마이크 햇치의 당선은 미국 사람들, 미네소타 사람들에게는 큰일이지만, 먼 나라 한국의 사람들에게는 큰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찬의 어머니에게는 마이크 햇치의 당선보다 덩치가 2배는 큰 미국 사람들이 단체로 대찬을 린치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큰일이었다.

어머니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대찬아, 너 괜찮니?”

대찬은 웃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네, 괜찮아요.”

“세상에, 세상에……. 뉴스에서 너 나오는 거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이제 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하니!”

어머니는 그렇게 꾸짖으면서도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어쩐지 네가 출세한 거 같아서 기분이 묘하더구나. 뉴스에 나오니까. 주지사가 번쩍 손도 들어 주고.”

“그냥 정치 선전 도구로 쓰인 거죠, 뭐.”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때 유진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빈센트! 너한테 소포 왔어.”

어머니와 통화를 마친 대찬이 유진에게 물었다.

“소포? 나한테?”

“응. LA에서 왔는데… 보낸 사람 이름이… 제시카.”

“제시카?”

모르는 이름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를 뜯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의약품과 함께 편지 1통이 들어 있었다.

한국어로 돼 있었다.

-너 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 이거나 처먹고 처발라서 얼른 나아!

누가 봐도 김산하였다.

“…영어 이름이 제시카인 주제에 빈센트 갖고 그렇게 비웃었던 거야?”

픽 웃은 대찬은 100명이 써도 다 못 쓸 양의 의약품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까.”

대찬은 웃통을 벗으며 침대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서원웅에게 말했다.

“헤이, 조슈아! 약 좀 발라 봐.”

“다 나아가는데 뭘 또 발라.”

“산하 누나가 그래도 성의껏 보내 줬는데 안 쓸 순 없잖아.”

서원웅은 툴툴거리면서도 대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덕지덕지 약을 바르는데 기숙사 방 앞이 소란스러웠다.

그 소란은 점점 가까워졌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존 넬슨이 안으로 들어왔다.

“빈센트, 지금 시간 괜찮아요?”

“아, 예… 이 약만 다 바르면…….”

“주지사님께서 오셨어요.”

“네? 아아…….”

대찬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마이크 햇치가 안으로 들어오며 그를 만류했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요. 불편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주지사님.”

“감사 인사를 하려고 왔어요. 덕분에 제가 주지사가 됐습니다. 앞으로 빈센트 같은 유학생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신경 쓰겠습니다.”

대찬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마이크는 어흠, 헛기침을 하고는 대찬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술수를 생각해 냈어요?”

“술수라뇨! 그저 우연히 폭행당했을 뿐인걸요.”

마이크는 점잖게 웃으며 속닥거렸다.

“거짓말하지 마요. 누군가 영상을 제보했다고 둘러댔지만, 그걸 찍은 게 빈센트의 친구라고 들었어요. 앞을 내다보지 않았으면 촬영하지도 않았겠지.”

“암튼 우연입니다. 우연이에요.”

“여우 같긴! 난 빈센트 같은 사람이 좋아요. 영리하지만 영악하지 않은.”

“폴렌티 캠프에서 이랬으면 영악하다고 할 거잖아요.”

“당연하지.”

마이크는 그렇게 웃고 명함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건 내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주는 명함이에요. 내 개인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무슨 일이 있거든 연락해요. 불법이 아닌 이상 도와줄 테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이크는 대찬의 등에서 상처가 없는 부분을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대찬은 상처를 치료하면서 학기 말까지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도 대찬에게 알은체를 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교수들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씩 웃어 주곤 했다.

미네소타 바이킹스는 이 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유진, 잘 있어.”

“보고 싶을 거야. 여유가 되면 꼭 다시 와야 돼, 미네소타로.”

“이번엔 네가 한국 올 차례야.”

대찬의 말에 유진은 시시하게 웃었다.

“알았어. 꼭 서울 갈게.”

“졸업하면 무슨 일 할 거야?”

“어… 실은 난 정치 쪽에 관심이 많아서.”

그의 말에 여승범이 톡 쐈다.

“우릴 캠프에 끌어들일 때부터 알아봤어.”

유진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주지사님이 졸업 후 비서로 일해 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아마 그쪽에서 일할 거 같아.”

“응원할게.”

“빈센트, 너는?”

대찬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는 아직.”

대찬은 여운을 남기고 유진과의 작별 인사를 마쳤다.

서원웅과 여승범은 곧장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대찬의 행선지는 달랐다.

“웰컴 투 LA!”

김산하는 공항에서 대찬을 반겼다.

그는 기쁜 얼굴이었다.

대찬도 푸근하게 웃었다.

“결국 오게 되네요, LA.”

“안 오면 넌 죽은 목숨이지.”

“왔으니 됐잖아요?”

대찬은 능청스럽게 웃고는 기지개를 켜 찌뿌듯한 몸을 폈다.

공항 밖으로 나온 대찬은 쨍쨍한 햇볕을 느끼며 두꺼운 웃옷을 벗었다.

“미국이 넓긴 넓어요. 미네소타는 미친 한파가 몰아치는데 여긴 덥네.”

“그러니까 캘리포니아로 오라고 했을 때 말을 들을 것이지.”

대찬은 웃으면서 마이크 햇치의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마 캘리포니아로 왔으면 주지사랑 친구 먹을 일도 없었을걸요? 터미네이터 출연 보조라도 안 뛰었으면.”

“게다가 너는 그런 공화당 근육 마초하고 상극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대찬과 김산하는 마주 보고 웃었다.

이때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였다.

대찬과 김산하는 망중한을 만끽했다.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햇볕과 신선한 바람을 만끽하며 둘은 산타모니카 해변을 거닐었다.

한적한 평일 오후에 손님 없는 해변의 대관람차는 한가롭게 천천히 돌아갔다.

“잠깐 있어 봐.”

대찬을 제자리에 세운 김산하는 어딘가로 잠깐 사라지더니, 이내 3층으로 쌓은 아이스크림콘을 들고 나타났다.

“자, 먹어.”

김산하의 것은 초코 맛, 바닐라 맛, 초코 맛으로 쌓여 있었다.

대찬의 것은 하얀 바닐라로만 3층이었다.

대찬이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바닐라 맛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김산하는 날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되물었다.

대찬도 기분 좋게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둘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마구 사진을 찍고 놀이기구를 즐겼다.

“이거 한번 써 봐.”

김산하는 가판대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선글라스를 발견했다.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그걸 집어 대찬에게 건네주었다.

대찬이 쓰자 김산하가 씩 웃었다.

“예쁘네.”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도 같은 디자인의 선글라스를 집었다.

“어때?”

“예쁘네.”

대찬은 김산하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배시시 웃은 김산하는 선글라스 가게의 점원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선글라스로 한층 멋을 더한 둘은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떠나 할리우드로 향했다.

유명 배우들의 핸드 프린팅에 손을 갖다 대는 뻔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그런 별스럽지 않은 일에 호들갑을 떨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할 때, 그들은 다시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돌아왔다.

낙조를 바라보며 저녁을 먹고, 백사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다시 낙조의 끝물을 감상했다.

선선히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대찬은 기분이 좋아졌다.

김산하도 어둑어둑해지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모은 무릎 위에 턱을 괬다.

“좋다.”

대찬은 흘끗 곁눈질로 그를 보고는 같은 자세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좋다.”

해가 완전히 수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둘은 말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대찬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야죠.”

김산하는 앉은 채로 대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근처에 한인 민박 예약해 뒀어요. 거기 가서 잘게요.”

“뭐?”

대찬의 말에 김산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너 돈 많아?”

“돈 많으면 호텔에서 잤게요. 없으니까 한인 민박 가지.”

“취소해.”

“당일에는 취소해 봤자 환불 못 받는데요.”

김산하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닥쳐. 왜 내 집 놔두고 애먼 데서 자려고 그러는데?”

“네, 네에?”

“뭘 그렇게 놀라? 들어가서 맥주나 한잔하고 자. 타지에서 오랜만에 친한 사람 만났는데, 밖에서 재우기엔 내 맘도 안 편해.”

대찬은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럼.”

둘은 외곽에 위치한 김산하의 아파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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