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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1화 (50/556)

난 할 수 있어 51화

선거 캠프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그들에게 떨어진 건 허드렛일뿐이었다.

캠프의 심부름을 하고, 청소를 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문서를 복사하고, 간단한 서류 작업을 해 주는 정도였다.

물론 캠프에서 대단한 일을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화도 못하게 하고, 상대방의 공세를 수비하기 위해 후보를 수행하는 일도 못하게 하고, 사무실에 꽁꽁 숨겨 두기만 하니 대찬으로서도 답답했다.

“재미없네.”

이름만 거창한 선거 캠프였다.

실상은 한국에 흔하게 널린 인턴의 업무와 다르지 않았다.

보람은 없고, 몸은 힘들고.

일이 이렇게 되자 유진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정말 미안해, 친구들.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네가 무슨 잘못이겠어. 마음 쓸 거 없어.”

“그래도…….”

유진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대찬은 웃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럼 오늘 술 한잔 사.”

“당연하지! 그걸로 조금이라도 마음이 나아지면 열 번도 사 줄 수 있어.”

“네 주머니 사정 다 아는데 열 번은 무슨. 딱 오늘 한 번 유진한테 얻어먹자.”

그렇게 이들은 근처의 바로 향했다.

나름 동네에서 오래된 바였다.

사슴 대가리가 박제되어 벽에 걸려 있고, 원목으로 된 테이블은 세월을 증명하듯 아귀가 안 맞아 삐걱거렸다.

유진은 작정한 듯 술과 음식을 마구 시켰다.

사람은 넷인데 테이블 가득 술과 음식이 넘쳤다.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니야?”

“오늘은 내가 사과하는 날이니까 제대로 사과하게 해 줘.”

“사양은 안 할게.”

대찬은 바삭하고 짭짤하게 튀긴 감자튀김을 씹으면서 웃었다.

그다음으로 묵직한 흑맥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답답하게 얹힌 듯한 속도 뻥 뚫렸다.

“이 맛에 맥주 마시지.”

대찬은 입술의 거품을 손등으로 슥 닦으며 후련하게 웃었다.

유진은 대찬의 편한 미소를 보고 웃었다.

그는 대뜸 캠코더를 대찬에게 비추며 물었다.

“맥주 맛이 어떠십니까, 미스터 초?”

“뭐야, 캠코더는 갑자기 어디서 났어?”

“선거 캠페인 할 때 영상팀 중 한 명으로 들어갔거든.”

“업무용 캠코더를 맘대로 써도 되는 거야?”

대찬의 말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혹시 알아? 이런 영상들도 요긴하게 쓰일지.”

“저리 치워. 카메라 의식돼서 술맛 떨어지잖아.”

대찬은 캠코더 렌즈에 제대로 눈을 못 마주치고 수줍게 맥주를 마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지역 연고의 미식축구팀인 미네소타 바이킹스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이들은 TV에 시선을 박은 채 술을 물처럼 마셨다.

바이킹스가 점수를 낼 때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코앞에 둔 상대와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럽게 시끄럽네.”

대찬은 툴툴거렸지만, 역시 미네소타 출신인 유진의 눈도 TV를 향하고 있었다.

“미네소타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서원웅, 여승범과 술잔을 나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점입가경으로 팀 폴렌티 측의 선거 운동원들까지 바 안으로 들어왔다.

“스트레스 풀려고 왔더니 쌓아서 가겠군.”

대찬은 헛웃음을 지으면서 잔을 넘겼다.

그건 비단 대찬만의 감상은 아니었다. 여승범은 적개심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젠장. 폴렌티 놈들은 왜 오고 난리야.”

“오늘 일진 사납네.”

서원웅 역시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이쯤 해서 일어나자.”

그의 말에 이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때 미식축구 경기 4쿼터가 끝났다.

1, 2, 3쿼터를 내리 이기고 있던 미네소타 바이킹스는 4쿼터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결국 역전패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러자 정말 바이킹처럼 수염을 기르고 뿔난 투구를 쓴 골수 바이킹스 팬들이 광분했다.

얌전한 성격의 유진 역시 F로 시작하는 험한 말들을 쏟아 낼 정도였다.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바이킹스의 팬들도 허공에 꽥꽥 소리를 지르며 썰물처럼 바를 빠져나갔다.

대찬 일행은 바이킹들에 의해 떠밀리듯 바 밖으로 나갔다.

인파에 치이니 피로가 급히 몰려왔다.

대찬은 휘적휘적 피로에 찌든 발걸음을 내디디며 중얼거렸다.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나도. 옷도 못 갈아입고 뻗을 거 같아.”

“오버하지 마. 그 정도까진 아니잖아?”

시시콜콜한 말을 주고받으며 캠퍼스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다.

여승범이 유진의 캠코더를 낚아채더니 대찬과 서원웅을 비췄다.

캠코더 화면에 피로감과 불쾌감에 찌든 둘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바이킹스의 패배에 망연자실한 유진의 얼굴도 절반 정도 찍혔다.

“몰골이 굉장히 추하신데, 지금 소감이 어때?”

“야, 거울이나 봐. 너는 거의 반송장이야.”

“그래도 댁네보단 나이가 어려서 아직 팔팔하거든?”

여승범은 뒷걸음질로 계속 그들을 비추며 킬킬거렸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쳤다.

“응?”

여승범이 뒤를 돌아보자 엄청난 덩치의 바이킹이 눈에 들어왔다.

“What the fuck!”

주황색 수염을 댕기머리처럼 땋은 덩치가 그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적개심이 잔뜩 어린 목소리였다.

“뭐야, 씨!”

성질 더러운 여승범의 입이 한국어 욕설로 응수했다.

쏘리라는 말이 곱게 안 나왔다.

이에 아찔해진 대찬이 여승범의 고개를 팍 누르며 강제로 숙이게 했다.

취한 데다 패배의 쓴맛에 잔뜩 분개한 저치들과 부딪쳐 봤자 득 될 게 없었다.

더군다나 대찬 일행은 공식적으로 선거 운동원이었다.

대찬은 여승범을 대신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잘 보고 다녔어야 했는데.”

“못 배워 처먹은 옐로우 몽키들 같으니라고!”

그 말에 여승범이 인내심을 잃었다.

그는 대찬의 팔을 탁 치우며 바이킹에게 달려들었다.

“뭐? 옐로우 몽키?”

“내가 틀린 말 했나? 어디서 자꾸 원숭이가 우네.”

“이 새끼가 근데 뒤지려고……!”

여승범이 바락바락 성질을 부리자 바이킹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그는 솥뚜껑 같은 손을 휘둘러 여승범의 손을 탁 내리쳤다. 그러자 캠코더가 바닥에 쿵 떨어지며 뒹굴었다.

대찬은 입술을 악물며 여승범을 뒤로 잡아당겼다.

“야, 그만해.”

“아, 좀 놔 봐! 그만하길 뭘 그만해!”

작은 덩치로 바이킹에게 개기는 모습이 흡사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는 몽구스 같았다.

그 모습이 이미 패배의 상실감으로 찌든 바이킹들을 자극했다.

바이킹스의 저지를 입은 팬들이 슬금슬금 몰려오기 시작했다.

주눅 들지 않는 여승범을 보고 바이킹은 그를 향해 배를 튕겼다.

“남의 나라에 왔으면 닥치고 조용히 살아! 이 망할 동양 새끼야!”

배치기 한 방에 여승범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소란이 벌어지자 바 안에 있던 폴렌티 캠프 측의 선거 운동원들이 슬금슬금 나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대찬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원웅아.”

“어, 어?”

“캠코더로 나 찍어.”

“뭐?”

이 와중에 캠코더 운운하는 대찬이 서원웅은 이해되지 않았다.

“찍어!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찍고 있어야 돼. 알았지?”

“아, 알았어……!”

서원웅은 바닥에 뒹구는 캠코더를 들어 대찬을 찍기 시작했다.

대찬은 여승범을 뒤로 밀치며 직접 자신이 바이킹을 상대했다.

그가 바이킹을 똑바로 보면서 서원웅에게 말했다.

“저기 뒤에 공화당 애들 서 있는 거 보이지? 걔네도 그림에 다 담아라.”

그들의 손에는 ‘폴렌티를 주지사로!’라고 쓰인 피켓이 들려 있었고, ‘폴렌티에게 투표하세요!’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팀 폴렌티라는 글자가 페이스페인팅으로 쓰여 있었다.

대찬은 바이킹을 똑바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캠코더에는 담기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썬 오브 비치.”

그 한마디에 바이킹스의 패배와 술기운으로 희미해졌던 바이킹의 이성의 끈이 탁 끊겼다.

그러자 바이킹은 눈알이 뒤집혀서 대찬의 뺨을 그 매서운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대찬은 피하지 않고 그 어마어마한 충격을 그대로 감당했다.

대찬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바이킹을 향해 몸을 꾸벅 숙였다.

“쏘리, 쏘 쏘리…….”

비굴할 정도로 사과했지만 이미 뿔이 날 대로 난 바이킹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대찬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바닥에 엎어진 대찬을 발로 밟았다.

대찬은 컥, 컥, 소리를 내며 고통에 신음하다가 다시 일어났다.

바이킹의 주먹이 날아올 때 코를 갖다 댔다.

맞았을 때 가장 피가 많이 나오는 부위였다.

대찬은 컥컥거리면서도 주위의 얼굴들을 살폈다.

그들은 바이킹스 패배의 분풀이를 하듯 즐거운 표정이었다.

폴렌티의 선거 운동원들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했다.

그들 중 일부는 대찬의 처참한 꼬락서니를 보고 비웃었다.

“됐다. 촬영 끝! 뛰어!”

대찬은 비틀비틀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의 지령에 서원웅, 유진, 여승범도 뛰었다.

바이킹이 대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비대한 몸집에다가 술까지 취한 그가 대찬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했다.

대찬은 미네소타 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굵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서원웅이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대찬에게 물었다.

“대찬아, 괜찮아?”

“괜찮겠어? 아주 안 괜찮아.”

“그러게 왜 맞고만 있었어!”

대찬은 아야야, 소리를 내며 피를 닦고는 서원웅에게서 캠코더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녹화된 영상을 재생했다.

서원웅의 떨리는 손 때문에 영상도 떨렸다.

그게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바이킹은 무자비하게 대찬을 폭행했다.

대찬은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고, ‘폴렌티를 주지사로!’란 피켓을 든 선거 운동원들이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방관자들이었다.

이어 대찬은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 자비를 구하지만, 술 취한 바이킹에게 자비는 없었다.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된 대찬의 모습이 고스란히 영상에 담겼다.

“됐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유진은 우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되긴 뭐가 돼? 너 그러다 흉터 남아.”

겉으로는 절대 걱정이나 호감 따윌 표하지 않는 여승범도, 대찬의 몰골을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혀, 형, 병원 가야 되지 않아?”

그는 자기를 대신해 대찬이 맞았다는 부채 의식마저 느꼈다.

“일단 보건실 가서 응급처치만 좀 받고 올게.”

“나랑 같이 가.”

서원웅이 잽싸게 대찬을 부축하고 보건실로 향했다.

대찬은 절뚝거리며 걸어가면서도 여승범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캠코더 절대 건드리지 마!”

마이크 햇치는 미네소타 대학의 강당에서 유세했다.

그는 연단의 귀퉁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제 옆에 선 이 아름다운 청년은 한국에서 온 조입니다.”

그의 왼쪽에는 처참한 몰골의 대찬이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는 건실한 학생입니다. 한국의 명문 대학을 다니다가 견문을 넓히고자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는 그를 향해 온정의 눈빛을 내비쳤다.

“그는 기숙사 청소부와의 아침 인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매점 주인과 날씨 얘기를 하며 빵을 사 먹습니다. 한국을 좋아하는 소녀에게 무료로 한국어 과외를 해 줍니다. 한국의 가족들에게 우리 미네소타의 따뜻한 사람들을 자랑합니다. 그는 미네소타를 사랑합니다.”

마이크의 눈빛에 대찬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런 여러분의 학우가 어젯밤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주먹질과 발길질에 몸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옐로우 몽키! 적나라한 혐오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두 번이나 주 검찰총장으로 당선됐다던 그의 목소리에는 프로 정치인다운 호소력이 깃들어 있었다.

“폴렌티가 말했습니다. 테러리스트는 외국인이다. 그러나 어젯밤 외국인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테러의 피해자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악어의 눈물일까?

대찬은 궁금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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