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50화
“그리고 반말 쓰는 건 뭐라 안 할 테니까 형이라고만 해 줘라, 응?”
“…알았어.”
여승범은 침을 꼴깍 삼키고 마지못해 덧붙였다.
“형.”
참 대단한 자본주의자시네.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이후로 여승범도 대찬, 서원웅, 유진과 함께 어울렸다.
그때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쓰는 영어 이름도 없었던 여승범에게 대찬은 브랙스턴이라는 대단한 이름을 선물해 주었다.
그건 빈센트와 조슈아보다 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름을 찾기 위해 대찬과 서원웅이 벌인 밤샘 토론의 결과였다.
여승범은 여전히 대찬에게 불친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도 보였다.
성격이 모날 대로 모난 그도 대찬과 지내면서 많이 바뀌었다.
적어도 첫 만남부터 사람 질리게 하는 지경은 벗어났다.
-나 30일부터 휴가야. LA 와.–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8.
-마강국 각하의 혹사 정책 덕분에 최고 실적 기록!-최재한(친구) 2006.7.12.
└솔직히 내가 조대찬보다 나은 듯.
–마강국(고릴라) 2006.7.12.
└그건 좀 아닌 듯.–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12.
└형, 그건 아니에요…….-양희성(희성이) 2006.7.13.
└강국아, 그건 아니지…….-민승기(승기선배) 2006.7.15.
-왜 일촌평 안 읽냐?–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15.
-서울 언제 옵니까? 내가 술 사 주기요.-진위생(진위생) 2006.7.16.
└안녕하세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찬이 서울 안 가요^^*–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16.
└누구십니까?-진위생(진위생) 2006.7.17.
-오라고 했다.–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18.
-오빠! 한국 언제 와요? 저 이제 대학생이라 시간 많아요!-마강설(오빠동생) 2006.7.22.
└조대찬 시간 없음. 나 만나야 됨.-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22.
-아들~ 한국 오니? 보고 싶네~-신영주(엄마) 2006.7.23.
└어머님! 저 대찬이 선배 김산하라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잘 보살피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23.
└어머~ 그래요~? 잘 부탁해요~-신영주(엄마) 2006.7.23.
└네~ 어머니~♥-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23.
-야, 시간 없으면 내가 미네소타 갈게. 날짜만 잡아.–김산하(♥우주최강여신♥) 2006.7.26.
“…….”
대찬은 한동안 확인하지 않은 동안 우주최강여신으로 도배된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를 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 누나는 집착이 거의 미저리급이네.”
당장이라도 LA행 표를 끊지 않으면 살인사건이라도 날 판이었다.
대찬은 흘끗 달력을 봤다.
7월 30일, 김산하의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절로 발끝이 오므라졌다.
그때 유진이 똑똑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빈센트, 기숙사 로비에서 누가 널 찾고 있어서 내가 데려왔어.”
“응? 누가?”
대찬이 묻자마자 김산하가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영어 이름 빈센트야? 구리다.”
“누나!”
대찬의 불만 가득한 고함에도 김산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유진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땡큐 포 유얼 카인니스.”
“유어 웰컴.”
김산하는 살갑게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대찬의 방에 걸린 옷걸이부터 틀어쥐었다.
표정이 삽시간에 살벌하게 굳었다.
옷걸이를 쥔 모습이 장팔사모를 꼬나 쥔 장비처럼 위풍당당했다.
“왜 내 연락 씹냐?”
“누, 누나, 씹은 게 아니고……!”
“날 기어코 미네소타까지 오게 해?”
“오라고 한 적 없…….”
“어디서 말대꾸야!”
김산하는 대찬의 침대를 옷걸이로 쾅쾅 내리쳤다.
“오, 갓…….”
유진은 어깨를 움츠리며 살금살금 뒤로 물러났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누나, 일단 진정해. 그동안 미니홈피 안 들어가 봤어. 진짜야!”
“어쨌든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풀코스로 대접해야 돼. 알았어?”
“다, 당연하지.”
대찬의 대답을 받아 내고 나서야 김산하는 옷걸이를 내려놨다.
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대찬은 아침부터 밤까지 김산하의 일일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마냥 고된 일만은 아니었다.
가까이 지내는 한국인이라곤 서원웅과 여승범이 전부인 생활이었다.
그나마도 여승범은 가깝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 차에 김산하가 먼 길 마다않고 와 주니 고마운 마음도 컸다.
대찬은 사비를 털어 김산하는 물론, 서원웅과 유진, 그리고 여승범에게도 제법 고가의 식사를 대접했다.
단란하게 식사를 하는 와중에 유진이 대찬에게 말했다.
“빈센트, 너 탁구 클럽 말고 다른 활동 하는 거 있어?”
“아니, 없는데. 왜?”
“그럼 나랑 뭐 하나 같이 해 볼래?”
대찬은 한입 크기로 썬 고기를 입안에 넣으면서 물었다.
“그게 뭔데?”
“11월에 중간 선거 있는 거 알지?”
갑자기 웬 정치 얘기.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그때 주지사도 같이 뽑거든.”
“그런데?”
“선거 캠페인 자원봉사 해 볼 생각 없어?”
“어?”
대찬은 즉답을 내리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난 미국 사람도 아닌데? 그리고 난 미국 정치 잘 몰라. 아니, 그 이전에 날 써 주기나 할까?”
“써 줄 거야. 이번 주지사 선거는 엄청 박빙일 거 같거든.”
“음, 잘 모르겠는데.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겠어.”
“마이크 햇치(Mike Hatch)라고, 우리 주 검찰총장인데 훌륭한 사람이야. 그 사람 캠프에서 일해 보려고 해. DFL 소속이고.”
“DFL?”
“미네소타 민주농민노동당. 민주당이라고 봐도 무방해.”
대찬이 대답하지 않고 장고에 빠지자 김산하가 거들었다.
“한번 해 봐. 네가 언제 또 미국 선거 캠프에서 일해 보겠어.”
“그건 그런데요,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자칫 유진에게 실례가 될 말은 한국어로 했다.
“그건 너 하기 나름이겠지? 그런데 특별한 경험은 뭐든 해 보는 게 좋아. 남들 다 해 본 건 취업 시장에서 매력 없어.”
“경험자의 조언이라 그런지 묵직하게 다가오네요.”
“경험자의 조언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내 조언이라 그런 거지.”
대찬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네. 누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너더러 무슨 정치 광신도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선거운동 돕는 거라잖아. 해 봐.”
김산하의 말도 그렇지만, 유진이 너무나도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찬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유진을 바라봤다.
“그래, 알았어. 같이 하자.”
유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된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대찬은 웃으면서 서원웅과 여승범의 손을 잡았다.
“얘들도 같이 하는 거야.”
그러자 여승범이 질색했다.
“미쳤어? 난 싫어!”
이에 김산하가 여승범을 째려봤다.
“너 04학번이라면서 말본새가 왜 그따위니?”
“네? 그, 그게…….”
“까라면 까. 칵, 이게 진짜…….”
그 한마디로 여승범은 진압되었다.
서원웅이야 대찬의 껌딱지였으니 의견을 물어볼 것도 없었다.
“졸지에 선거운동 도우미 하게 생겼네. 이름이 뭐라고? 마이크 뭐?”
“마이크 햇치!”
유진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대찬은 실소를 지었다.
“거 목소리 한번 엄청 발랄하네.”
예정에도 없던 굵직한 일이 한순간에 결정되었다.
갑자기 3명의 지원군을 얻은 유진은 옥장판 강매에 성공한 다단계 업자처럼 감격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커피까지 대찬에게 얻어 마신 김산하는 대뜸 공항으로 가겠다고 했다.
“네? 벌써 가요? 오늘 왔는데?”
“왜, 누님이 오늘 간다니까 막 아쉬워 미쳐?”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건 전혀 아니고요.”
“짜식이.”
김산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한국 잠깐 들어갔다 오려고. 가족도 만나고, 에피니키온 꼬맹이들도 잠깐 보고.”
“그렇게 바쁜 와중에 미네소타까지 오신 거예요? 이거 너무 미안해지는데.”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겨울에는 꼭 LA로 와.”
“오지 말라고 해도 갈 거예요. 여기 겨울 안 겪어 보셨죠?”
웬만해선 안 끼어드는 서원웅이 제 몸을 감싸는 시늉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완전 한빙지옥이에요, 선배.”
“엄살은.”
“엄살 아니라니까요!”
“어쨌든, 난 간다.”
김산하는 툭 던지듯 작별 인사를 하고 택시를 잡았다.
대찬이 급히 달려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진짜.”
“어, 그래.”
김산하는 건조하게 대답하고 차 문을 탁 닫았다.
택시는 미련 없이 출발했고, 김산하는 차창 밖으로 손만 내밀어 흔들었다.
“귀신처럼 와서 귀신처럼 가네.”
대찬은 멀어져 가는 택시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됐지만 대찬도 유진의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산하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남들 다 해 본 건 취업 시장에서 매력 없다.
취업을 떠나서 언제 미국 선거운동 판에 끼어들어 보겠느냔 말도 적절했다.
“자, 여기는 자원봉사단 담당하는 존 넬슨(John Nelson) 씨.”
유진이 존 넬슨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포마드로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말쑥한 남성이었다.
존 넬슨은 대찬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웃었다.
“존이라고 불러요.”
“빈센트입니다.”
여전히 영어 이름이 익숙지 않아 빈센트라고 소개할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이크는 이번 DFL 경선에서 승리하고 우리 당의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판세가 박빙이라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될까 싶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찬의 말에 존은 웃으면서 화답했다.
그는 조슈아, 브랙스턴과도 악수를 나눴다.
그들은 곧장 봉사활동에 뛰어들었다.
선거일은 11월 7일.
그때까지 캠프는 총력전이었다.
총력전이라지만 대찬 일행이 할 일이 그다지 대단치는 않았다.
가장 낮은 단계의 업무들이었다.
유진은 명부에 적힌 유권자들에게 전화 돌리는 업무를 맡았다.
그나마도 대찬, 서원웅, 여승범은 전화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대찬이 존 넬슨에게 말했다.
“저도 간단한 전화 정도는 할 수 있는데요.”
“아, 그게… 의사소통이 되는 정도로는 곤란해요.”
“어째서요?”
존 넬슨은 멋쩍게 웃으며 둘러댔다.
“그, 그게 선거는 이성보단 감성의 영역이니까. 아무튼 좀 그런 게 있단 말이죠.”
“흠…….”
더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아 대찬은 거기서 관뒀다.
시간이 좀 흐르자 존 넬슨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대찬은 알 수 있었다.
마이크 햇치의 상대는 공화당의 팀 폴렌티(Tim Pawlenty)였다.
47세로 젊은 편의 현직 주지사였다.
그는 TV 광고를 통해 마이크 햇치를 향한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테러리스트는 이곳 미네소타에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는 외국인입니다. 저는 주지사로서 이민법 강화를 추진했지만 DFL은 반대했습니다. 저는 이 법을 지킬 겁니다. 저를 주지사로 뽑아 주십시오.
-마이크 햇치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 준다고 합니다. 저는 강력히 반대합니다. 우리는 아이오와에서 온 사람에게도 주지 않을 겁니다. 저를 주지사로 뽑아 주십시오.
We don’t even give that to people from Iowa.
우리는 아이오와에서 온 사람에게도 주지 않을 겁니다.
이 슬로건이 마이크 햇치의 적수인 공화당 팀 폴렌티를 상징했다.
아이오와주는 미네소타의 바로 남쪽에 있었다. 미네소타의 세금을 같은 나라 사람인 아이오와 사람에게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주장이었다.
팀 폴렌티의 주장은 제법 합리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민자와 외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저의가 깔렸다.
마이크 햇치는 공세에 맥을 추리지 못했다.
이런 판국이었다.
대찬과 서원웅, 여승범은 말은 능숙하게 해도 발음과 억양이 완벽한 외국인이었다.
그들이 전화를 돌렸다간 역효과만 초래할 것이다.
존 넬슨은 그걸 염려해 대찬에게 수화기를 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부당한 일은 아니야.”
대찬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