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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9화 (48/556)

난 할 수 있어 49화

대찬은 한숨을 팍 쉬며 말했다.

“내가 응원하는 한국의 기융 타이거즈는 작년에 꼴찌를 했다구. 그러면 야구장 가기 전부터 패배감에 빠져서 우울해진다니까.”

대찬이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침울해지자 유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위로했다.

“언젠간 잘나갈 거야.”

“오늘만큼은 미네소타 팬으로서 확실하게 즐길 거야.”

“당연하지! 게다가 오늘 선발투수는 요한 산타나라고.”

“오예!”

요한 산타나로 다시 기력을 되찾은 대찬의 시선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핫도그 가게가 포착되었다.

“유진, 핫도그랑 맥주는 내가 쏠게.”

“좋지!”

코를 간질거리는 소시지 굽는 냄새에 대찬과 유진은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길을 잃을까, 서원웅은 얼른 그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줄을 설 때부터 무슨 핫도그를 먹을지 둘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난 무조건 나초 핫도그야.”

“나초는 무슨 나초야. 난 스파이시 핫도그.”

“코리안들은 매운 거에 너무 목숨 건다니까. 위장병 걸려.”

“나초보단 매운 게 훨씬 낫지.”

“서원웅! 아니, 우리 조슈아는 뭐 먹을래?”

“치즈독 먹을래, 대찬, 아니 빈센트.”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앞의 줄이 모두 사라졌다.

대찬은 군침을 흘리며 스파이시 핫도그를 주문하려고 했다.

“저, 스파이시 핫도그 하나랑 나초… 어?”

대찬의 시선이 핫도그 가게의 점원을 향했다.

대찬의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우리 후배님, 여기서 뭐 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점원은 흠칫 놀랐다.

그의 시선이 대찬과 마주쳤다.

점원은 여승범이었다.

“아, 그, 그게……!”

“아버님이 사장님이라면서 왜 여기서 핫도그를 굽고 있냐?”

“그게 아니고!”

“됐고, 뒤에 사람 많이 기다리니까 스파이시 하나, 나초 하나, 치즈 하나 빨리 줘.”

대찬은 웃으면서 매대에 돈을 올려놨다.

여승범은 빨개진 얼굴로 핫도그를 만들었다.

“나 밉다고 대충대충 만들면 안 된다? 그럼 본사에 클레임 걸 거야. 최선을 다해서 맛있게, 잘.”

여승범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핫도그를 만들어 앞에 툭 던지듯 내려놨다.

유진은 팍 인상을 구겼다.

“뭐야? 왜 저렇게 불친절해?”

“됐어. 야구 시작하겠다. 빨리 가자.”

유진이 미간을 좁히고 따지려 들었지만 대찬은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유진과 대찬, 서원웅은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뭐 해요! 빨리 안 줘요? 게임 시작한다고!”

“아, 쏘, 쏘리.”

여승범이 그 셋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한참을 기다려 짜증이 날 대로 난 손님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여승범은 부랴부랴 핫도그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야!”

서투른 솜씨로 서두르니 뜨거운 그릴에 손을 데고 말았다.

여승범의 눈에 눈물이 글썽 맺혔다.

빰빰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빰 빰빰빰빰- 빠라밤빰빠람-

야구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소리가 야구장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핫도그를 든 손님들은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한가해진 여승범은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경기는 요한 산타나의 호투를 앞세워 미네소타가 5 대 1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뒀다.

맥주도 적당히 마셔서 흥이 오른 대찬은 기숙사에 돌아가서도 유진, 서원웅과 맥주를 더 퍼마셨다.

그렇게 맥주를 물처럼 마시는 와중에 유진이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핫도그 보이 있잖아.”

“핫도그 보이이자 내 후배지.”

“응. 아버지가 회사 사장님이라며. 그런데 왜 거기서 핫도그를 굽는 거야? 용돈도 많이 받을 텐데.”

대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진 않아서.”

서원웅이 웃으면서 사족을 달았다.

“사실 나이 좀 먹은 한국 남자들은 대개 사장님으로 불리긴 하지.”

“그건 아니야. 후배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서청수 회장님이나 백지훈 선배 아버지인 백푸드 사장님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큰 규모 회사 사장이라던데.”

대찬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 회사 사장님이 제법 원칙주의자래. 아마 저번 기내 난동 때문에 용돈을 딱 끊어 버린 거 아닐까?”

“뭐, 그러든지 말든지.”

여승범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는 서원웅은 그렇게 말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의 허리를 쿡 찔렀다.

“너도 은근히 냉정하다니까. 그런 줄 몰랐는데. 아, 지금은 서원웅이 아니라 조슈아라 그런가? 이중인격, 뭐 그런 거?”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어, 빈센트.”

대찬은 교환학생 생활에 완벽히 적응했다.

피 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외국인으로서 남의 나라의 언어로 의사소통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뜻은 통해도 외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어색한 뉘앙스가 남았다.

대찬은 그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했다.

그 와중에 유진의 시간이 많이 희생되었다.

덕분에 대찬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에게 자극받은 서원웅 역시 마찬가지였다.

“야, 그럼 너 미국 사람하고도 완전 프리토킹 하는 거야?”

“완전은 모르겠고, 많이 늘었지.”

“부럽다, 야.”

대찬은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최재한과 국제전화로 통화했다.

돈이 적잖이 나갔지만 주기적으로 전화하지 않으면 단단히 토라지는 최재한이었다.

그걸 풀어 주느라 들어가는 술값을 생각하면 국제전화가 쌌다.

“에피니키온은 좀 어때?”

“별다른 문제 없어. 회장님만 빼고.”

“회장님? 마강국이 왜?”

최재한은 웃음에 한숨을 섞어 말했다.

“지금 애들 난리야. 마강국 탄핵하고 다시 조대찬 모셔 오자면서.”

“듣기 좋은 소린데.”

대찬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잘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마강국이 개판이야.”

“회장이 그 정도로 개판이면 동아리가 망해야 되는데, 잘 돌아간다며?”

“너무 잘 돌아가지. 회장님이 박정희거든.”

대찬은 낄낄 웃었다.

“새마을운동이 벌어지고 있나 봐?”

“애들 혹사가 장난 아니야.”

그 순간 주변에서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보고 싶어요!”

“선배님, 그냥 이번 학기 끝나고 한국 오시면 안 돼요? 회장 한 번만 더 해 주세요!”

“강국 선배 밑에서 일 못하겠어요!”

그 뒤를 이어 마강국의 쩌렁쩌렁한 불호령이 따랐다.

“야, 이 새끼들아! 일해! 이 밥버러지들아! 너희한테 들어가는 예산이 얼만데!”

대찬은 피식 웃으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예산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면서…….”

그러고는 소리 높여 외쳤다.

“너희는 좀 당해 봐야 돼. 조대찬 회장님이 얼마나 성군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지!”

“너무해요…….”

후배들의 풀 죽은 목소리에 대찬과 최재한은 동시에 웃었다.

그때 유진이 대찬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왔다.

“빈센트, 시간 됐어. 나가자.”

“아, 벌써? 알았어.”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최재한에게 말했다.

“이제 끊어야 할 거 같은데.”

“너 영어 발음 완전 재수 없다.”

“좋다는 뜻이지? 어쨌든, 끊는다.”

대찬은 최재한과의 전화를 끊고 유진을 따라 나갔다.

서원웅은 진즉에 준비를 마치고 문 밖에 서 있었다.

“이번엔 누가 온대?”

“메이슨 제닝스? 기타 치는 양반인데 노래 좋더라.”

“그래? 가자.”

스프링 잼(Spring Jam).

미네소타 대학교 캠퍼스 뒤편, 37번 주차장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였다.

가수들이 와서 공연을 하고, 학생들은 그걸 즐기면서 간식과 술을 먹고 마셨다.

대찬은 이날 아주 작정하고 놀 생각이었다.

그래서 해도 지지 않은 오후 4시부터 그들은 37번 주차장으로 향했다.

드넓은 캠퍼스를 가로질러 37번 주차장으로 가는 데까지만 해도 힘겨운 여정이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서원웅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대찬에게 소곤거렸다.

“쟤, 여승범 아니야?”

“응?”

서원웅이 가리킨 곳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홀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여승범이었다.

남들은 삼삼오오 모여 편한 차림으로 축제를 즐기러 가는데, 그는 보는 사람이 갑갑한, 축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남방을 입고 있었다.

그 혼자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대찬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흠, 좀 안쓰러운데.”

“안쓰럽긴 뭐가 안쓰러워. 자업자득이지.”

서원웅은 냉담하게 쏘았다.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여기 올 땐 나름대로 기대도 많았을 텐데, 저러고 있으니까 안됐잖아.”

“너한테 꼬장 피우던 거 다 까먹었어? 그때 생각하면 난 아직도 치가 떨려.”

“이런 천하의 냉혈한을 봤나. 그땐 나도 당한 거 못지않게 갚아 줬어. 이젠 봐줄 때도 됐지.”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종종걸음으로 여승범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야.”

캠퍼스에서 그 누구도 자기를 부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승범은 대찬의 부름에 흠칫 놀라 뒤를 바라봤다.

대찬의 얼굴을 확인하곤 곧장 우거지상으로 확 바뀌었다.

“뭐야? 왜 말 걸어?”

“선배한테 말버릇하고는. 스프링 잼 안 가냐?”

“남이야 가든 말든.”

“가고 싶지? 가고 싶은데 친구 없어서 못 가는 거지?”

대찬이 속을 박박 긁자 여승범이 버럭 화를 냈다.

“그 입 안 닥쳐!”

“응, 안 닥쳐.”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여승범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기분이다! 형이 놀아 줄게. 같이 가자.”

“어디서 개수작이야! 안 꺼져?”

여승범은 안간힘을 쓰며 대찬의 어깨동무를 풀려고 했지만, 그의 완력이 대찬을 당해 내지 못했다.

기내에서 포승에 묶였던 것과 같이 대찬의 단단한 완력에 몸이 속박당했다.

여승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 가자.”

대찬은 기어코 그를 끌고 37번 주차장으로 향했다.

“암튼 대찬이 오지랖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유진과 서원웅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축제는 축제답게 이어졌다.

대찬은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낮부터 밤까지 모든 축제 일정을 소화했다.

그동안 해치운 것만 해도 부리또가 3개, 타코가 2개, 추로스가 4개였다.

맥주는 셀 수 없었다.

메이슨 제닝스의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흥이 극도로 올랐다.

대찬은 제 입에다 맥주를 붓고, 여승범의 입에다가도 맥주를 부었다.

처음에는 포획된 야생동물처럼 난리를 치던 여승범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얌전해졌다.

“아 참, 얘 술 많이 먹이면 안 돼. 또 그 꼴 난다.”

대찬이 낄낄거리며 던진 짓궂은 농담에도 가벼운 짜증만 낼 정도로 누그러졌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이들은 무리의 중심에서 빠져나왔다.

노랫소리가 적당히 멀어져 대화가 쉬웠다.

대찬은 반쯤 풀린 눈을 한 여승범에게 슬쩍 물었다.

“야, 너 그때 왜 핫도그 팔고 있었어? 주머니가 가볍진 않았을 텐데.”

“…그때 그 일.”

“그 일? 기내 난동?”

기내 난동이란 말에 그렇잖아도 술 때문에 붉었던 여승범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단어 꺼내지 마!”

“그래, 어쨌든.”

대찬은 큭큭 웃었다.

“거기서 벌금 적잖이 받았어. 아버지가 그건 내 돈으로 하라고 하셔서…….”

“그랬군.”

“우리 집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아빠 잘나가는 회사 사장이야. 한국 같았으면 너 눈도 못 마주쳤어!”

대찬은 여승범의 발악이 귀여울 뿐이었다.

“그래, 뭐 우리 아버지는 그냥 샐러리맨이라. 그래도 눈은 마주쳤을 거 같은데?”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야. 그쪽 집안이랑 이쪽 집안은 계급이 다르다고.”

어줍지 않게 읊어 대는 꼴에 대찬이 웃으면서 응수했다.

“그래? 그럼 너 앞으로 원웅이한테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 올리고, 지나가다 볼 때마다 삼배구고두례 해야겠는걸.”

“뭐?”

대찬은 서원웅을 흘끗 보고 말했다.

“쟤 아버지가 서청수 회장님이야.”

“…뭐?”

똑같은 ‘뭐’였지만 갑자기 톤이 확 죽었다.

대찬은 말을 반복해 주었다.

“서청수 회장님이라고, 필래.”

여승범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대찬은 지금까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것과는 달리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그딴 천박한 말은 함부로 주워섬기지 마. 큰코다친다, 진짜.”

메이슨 제닝스의 노래가 끝나고,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 소리가 크게 들렸다.

대찬은 마지막으로 여승범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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