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8화
승무원은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아예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손님들께서도 다 봐 버려서…….”
“그럼 좀 가벼운 난동이라고 하자고요. 조금만 케이스를 작게 하죠.”
대찬의 말에 승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녀석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일이 복잡해지면 대찬 역시 당사자로서 팔자에도 없는 법원에 불려 다녀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 와중에 녀석이 폭행 운운해 버리면 일이 꼬이는 수가 있었다.
대찬이 두 번째 삶을 살던 2010년대에는 기기가 발달해 동영상도 수월하게 찍었다.
그러나 다행히 대찬이 지금 발 디디고 선 2006년 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비빌 구석이 있었다.
대찬은 승무원과 대강의 짬짜미를 벌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딱 서원웅만 들릴 크기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끼가 누울 자릴 보고 다릴 뻗어야지.”
서원웅은 대찬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때 기장의 방송이 들렸다.
-손님 여러분, 우리는 곧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테이블과 좌석 등받이를 제자리로 해 주시고 좌석 벨트를 매 주시기 바랍니다.
대찬은 가뿐한 마음으로 공항에 내렸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녀석은 바로 공항 경찰에 인계되어 어딘가로 끌려갔다.
대찬은 그쪽으로는 시선 한 줌 던져 주지 않았다.
“자, 환승 시간 넉넉하지 않아. 빨리 움직이자.”
“어? 어… 그래.”
오히려 서원웅이 그를 더 신경 쓰는 눈치였다.
대찬은 미네소타로 가는 비행기를 향해 부랴부랴 움직였다.
미국의 2학기는 1월에 시작된다.
1월의 미네소타는 하얀 지옥이었다.
칼바람이 불고, 그 칼바람에 눈보라가 내렸다.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몰아치니 내린다는 표현이 부적절할 정도였다.
눈발을 헤치며 첫 등교를 하면서 서원웅은 대찬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 미네소타 오기로 한 거 후회하고 있지?”
“음, 어… 아니.”
대찬의 코와 귀가 추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서원웅은 그를 향해 눈을 흘기고 말했다.
“난 후회하고 있어.”
대찬은 애써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교환학생 업무를 담당하는 교직원은 대찬과 서원웅을 불러 놓고 이것저것 한참 설명했다.
기숙사도 소개받고, 앞으로 받게 될 수업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도 이뤄졌다.
현지인의 친절하지 않은 발음으로 쏟아지는 영어에 대찬은 귀를 쫑긋 세웠다.
교직원은 설명하던 와중에 민망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실은 초와 쎄오 말고 고원대학교에서 한 사람 더 오기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미네소타에 좀 늦게 오게 됐어요.”
초와 쎄오는 조씨인 대찬과 서씨인 서원웅을 일컬었다.
“문제요?”
“네. 그게 공항에서 문제가 생겼다는데 간단하진 않은 것 같더군요.”
“비자 때문인가요?”
교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보단 조금 더 골치 아픈 문제라더군요. 두 분은 같은 학교 학생이신데, 이 학생과는 면식이 없나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에 박힌 학생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걸 본 대찬과 서원웅의 정신이 멍했다.
교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는 얼굴이에요?”
“이게 참, 안다고 하기도 뭐하고…….”
대찬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는 의자에 반듯하게 허리를 대며 말했다.
“무슨 문제인지 알겠네요. 기내에서 난동 피웠죠.”
“오, 맞아요!”
교직원이 확인 사살을 해 준 순간, 대찬과 서원웅은 힘겹게 웃었다.
“그 서류 잠깐 봐도 될까요?”
“Sure!”
교직원은 선선히 서류를 넘겨주었다.
대찬이 가장 먼저 본 건 그의 주민등록번호였다.
대찬은 83년생.
그의 주민번호는 85로 시작했다.
“새끼, 나이도 어린 노무 새끼가!”
대찬은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은 여승범.
대찬, 서원웅과 마찬가지로 경영학과 학생이었다.
경영학과에는 한 학년에도 여러 반으로 나눌 만큼 인원이 많았기에 대찬은 그를 알지 못했다.
여승범은 학기가 시작하고 열흘이 지나도 출석하지 않았다.
대찬은 서원웅과 둘이 붙어 다니면서 성실히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 중 한국인은 대찬과 서원웅 단둘뿐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틈틈이 따로 시간을 내 영어 공부를 했던 게 효험이 있었다.
따발총처럼 쏴 대는 원어민 교수의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핵심적인 낱말을 잡아내 어렴풋이 의미를 짚어 낼 수 있었다.
같은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도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집으로 초대받아 게임을 즐겼다.
그렇게 약 한 달 정도가 흘렀을 때, 대찬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혹시 조대찬 선배님 번호 맞습니까?”
“네, 그런데요.”
깍듯한 목소리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피니키온 후배가 굳이 비싼 국제전화로 안부를 묻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 이번에 같은 학교로 교환학생 오게 된 여승범이라고 합니다.”
“아아.”
대찬은 씩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먼 곳에서 동문을 만나게 됐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제가 좀 문제가 생겨서 다음 주부터 겨우 수업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저, 그래서 말인데 죄송하지만 지금까지 필기 내용 좀 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비싼 밥 한 끼 사겠습니다.”
“굳이 밥까지 살 필요 없어요. 서로 도와야지.”
대찬의 시원한 반응에 여승범의 목소리도 덩달아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 그럼 그럴까?”
대찬은 쿡쿡,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래! 다음 주에 보자!”
여승범은 기약한 대로 그다음 주, 학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맞닥뜨린 순간, 대찬은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고, 여승범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사무쳤다.
“안녕?”
“너……!”
“선배한테 너가 뭐야, 너가.”
여승범의 얼굴이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너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선배라고 부르지도 못할 사람 앞에서 여승범은 입술만 우물거렸다.
대찬은 슬그머니 여승범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은근히 물었다.
“거기는 괜찮아?”
“이, 이익……!”
“왜 그래? 표정 좀 펴자. 그땐 네가 잘못한 거 맞잖아?”
“…….”
“게다가 내 덕분에 일이 좀 가벼워진 거야. 아니었음 너 바로 감방이었어, 자식아.”
여승범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찬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계산이 안 섰다.
선배로 대할 것이냐, 적으로 대할 것이냐.
그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여승범은 선택을 끝냈다.
대찬이 생각하기에 그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야! 내가 선배라고 하면 고분고분 대가리 박을 줄 알았어? 착각하지 마!”
“오우.”
대찬은 상상 이상으로 무식한 반응에 살짝 놀랐다.
“너 때문에 아직도 가랑이가 저릿저릿하다고! 개 같은 새끼! 그때 감방에 처넣었어야 되는데!”
대찬은 실소를 머금었다.
“패기가 대단하네. 누가 누굴 감방에 처넣는다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뭐 하는 사람인 줄이나 알고 이러는 거야? 너, 시건방 떨지 마!”
“뭐 하시는 분인데?”
“회사 사장님이다, 왜!”
대찬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아, 정말 대단한 아버님 두셨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서원웅을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 대단한 아버님이야. 그렇지?”
“그러게. 우리 아빠도 사장님인데.”
대찬은 작은 목소리로 사족을 달았다.
“회장님이지.”
서원웅도 대찬과 시선을 맞추며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분에 못 이긴 여승범은 씩씩거리며 그의 앞을 떠났다.
대찬은 아쉬울 게 없었다.
굳이 그와 사귀어야 되는 절실한 이유가 없었다.
필기 노트가 아쉬운 것도 그였으니까.
대찬은 여승범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눈보라가 치는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는 판이었다.
여승범 따위를 염두에 둘 여유가 없었다.
미네소타에는 3월까지 눈이 내렸다.
그래도 신이 있다면 그도 양심이 있는지 매서운 눈보라가 치지는 않았다.
미네소타 대학교 캠퍼스에 보기 좋게 눈이 쌓였다.
교환학생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에피니키온을 잠시 떠나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협업이다 뭐다 해서 대학생다운 생활을 잘 만끽하지 못했던 대찬이다.
그는 학생으로서의 일상을 기쁘게 즐겼다.
물론 공부만 하진 않았다. 그곳의 학생들과 얽혀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탁구 클럽에 가입해 일주일에 두세 번 땀을 흠뻑 흘렸다.
중국 학생들이 탁구를 좋아해 그들과 많이 어울리다 보니 중국식 영어 발음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대찬은 기쁘게 즐겼다.
평생 운동과는 거리를 뒀던 서원웅도 덩달아 탁구채를 쥐게 되었다.
“체력이 버텨 줘야 공부도 한다니까.”
대찬은 무슨 일이든지 잘하면 재밌고 못하면 재미없다는 걸 알았다.
서원웅도 크게 내키지는 않았을 터.
대찬은 부러 시간을 쪼개 서원웅에게 탁구를 가르쳐 주었다.
덕분에 서원웅의 실력도 일취월장했고, 그 결과 서원웅이 먼저 탁구 클럽에 가자고 보챌 정도였다.
한참 탁구를 치고.
클럽 학생들끼리 우르르 몰려가 맥주를 퍼마시고.
기숙사에 옹기종기 모여 보드게임을 하고.
한데 뒤엉켜 자고.
대찬은 미국에 와서야 대학 생활다운 나날을 만끽했다.
이런 판국에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는데, 다름 아닌 여승범이었다.
그는 완벽한 외톨이였다.
성격도 워낙에 드세거니와 마땅히 의지해야 할 동문 선배들과 척을 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대찬은 먼저 손을 내밀진 않았다.
그런 개차반과는 개과천선하지 않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빈센트, 일요일에 야구장 갈래?”
“응? 야구장?”
같이 탁구 클럽에서 활동하며 친해진 미국인 학생이 대찬에게 물었다.
빈센트는 매번 외국 학생들이 대찬을 일컬어 초, 초, 운운하는 걸 듣기 싫어 만든 영어 이름이었다.
미네소타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정작 탁구 클럽 안에서는 소수자였다.
은근히 배타적인 중국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대찬이 소외되지 않게 잘 대해 주어 친밀한 관계였다.
이름은 유진 깁슨(Eugene Gibson).
“티켓 3장 구했어. 너랑, 나랑, 조슈아.”
조슈아는 서원웅의 영어 이름이었다.
빈센트와 조슈아는 서로의 이름이 더 구리다고 2박 3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막상막하, 정확히는 막하막하였다.
유진의 말에 대찬은 뛸 듯이 기뻐했다.
“진짜? 내가 야구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시아에서 야구 좋아하는 나라는 둘밖에 없잖아. 한국, 일본.”
“타이완이 들으면 섭섭하겠어.”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타이완은 나라가 아니니까, 애석하게도.”
“그 말, 왕투한테는 하지 마. 유혈 사태가 발생할 거야.”
왕투는 탁구 클럽 부원 중 하나였는데, 대만 출신이었다.
중화권 학생이 많은 클럽답게 수많은 왕씨가 있었는데,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아서 왕투였다.
TV로만 보던 메이저리그 경기를 직접 관람한다는 생각에 잠시 들떴던 대찬은 미간을 좁히면서 우려했다.
“그런데 티켓 값 만만치 않을 텐데…….”
“가격은 신경 쓰지 마! 너희가 나한테 베풀었던 친절에 대한 보답이니까.”
“뭐, 그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즐기기만 할게.”
유진은 해맑게 웃으면서 대찬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Take me out with the crowd. Buy me some peanuts and cracker jack, I don’t care if I never get back!”
미네소타 트윈스의 홈구장, 휴버트 H 메트로돔에 도착한 유진은 절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야구장은 언제 와도 가슴이 두근두근해.”
“그게 왠 줄 알아?”
대찬이 꽁한 표정으로 묻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미네소타가 잘나가기 때문이야.”
미네소타는 2000년대 아메리칸 리그 중부 지구의 최강자였다.
이제 막 개막하는 2006 시즌에도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