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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7화 (46/556)

난 할 수 있어 47화

미네소타까지 가는 직항이 없어 시카고를 경유해서 가는 비행기였다.

고단한 여정이라 대찬은 바로 눈을 감고 자세를 편하게 했다.

“캬, 비즈니스라니.”

서청수 회장은 이코노미면 괜찮다는 대찬을 한사코 비즈니스 석에 앉혔다.

부담스러웠지만 앉아 보니 그만한 웃돈을 얹어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 번째 삶에서 해외 출장을 자주 나가 비행기가 낯설진 않았다.

하지만 비즈니스 석은 처음이었다.

대찬은 이코노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락함을 한껏 만끽했다.

다리를 쭉 뻗고 안대를 썼다.

시카고로 가는 비행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때문에 대찬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대찬이 눈을 뜰 때마다 서원웅은 비행기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서원웅이 눈을 깜빡거리지만 않았어도 조각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그는 비행 내내 창밖에 시선을 박은 상태였다.

대찬은 싱겁게 웃으며 서원웅에게 말을 걸었다.

“목 안 아파? 뭐가 보이긴 보여?”

“신기하잖아, 구름 위로 떠 가는 게.”

“낭만적이어서 좋다.”

대찬은 그런 서원웅이 싫지는 않아 기분 좋게 웃었다.

“조또 유치원생도 아니고.”

그건 대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롱의 감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대찬과 서원웅의 눈빛이 그쪽으로 쏠렸다.

대찬과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대찬은 미간을 좁히며 그를 쏘아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묻자 남자는 아니꼬운 목소리로 툭 받아쳤다.

“에? 뭐요?”

“…아닙니다.”

대찬은 우선 참기로 했다.

기내이기도 했고, 굳이 저런 놈팡이와의 드잡이로 유학 생활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찬의 인내가 저쪽의 기세를 더 살려 주었다.

그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덜떨어진 새끼들이 비즈니스는 어떻게 탔대. 수질 떨어지게.”

“이……!”

대찬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서원웅이 급히 그의 팔을 붙들며 속닥거렸다.

“대찬아, 우리 조용히 가자, 응? 참아, 참아.”

대찬은 눈을 질끈 감으며 끓는 속에서부터 한숨을 뿜었다.

“이번만 참는다. 다음에는 말리지 마.”

대찬은 애써 노기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안대를 썼다.

서원웅은 우물쭈물하다가 창밖 바라보기를 포기했다.

대찬은 안대를 쓰고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끝내 실패했다.

잠이 들 만하면 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탓이었다.

대찬은 승무원에게 공손히 청했다.

“맥주 하나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건너편의 그 자식이 승무원을 불렀다.

“여기도 위스키 한 잔.”

그러면서 그는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조롱하는 눈빛이었다.

위스키 정돈 마셔 줘야지, 질 떨어지게 맥주를 마시냐는 듯.

대찬은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맥주가 나오자마자 대번에 들이켰다.

대찬이 맥주 마시는 속도와 똑같이 그도 위스키를 들이켰다.

“위스키 한 잔 더.”

그는 이후로도 여러 번 위스키를 찾았다.

그러자 승무원도 걱정스럽게 물었다.

“더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아, 손님이 달라면 잔말 말고 그냥 줘요!”

“…예, 알겠습니다.”

대찬은 속으로 헛웃음만 지었다.

‘더러운 새끼가 걸렸네.’

위스키를 잔뜩 마신 그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규칙한 박자로 내는 딸꾹질 소리가 대찬의 귀에 거슬렸다.

탑승한 지 꽤 시간이 흐르자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쇠고기로 하시겠습니까, 닭고기로 하시겠습니까?”

“닭고기 주세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서원웅을 바라보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닭고기 2개 주세요.”

승무원은 친절하게 기내식을 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위스키에 잔뜩 전 녀석에게 물었다.

“쇠고기로 하시겠습니까, 닭고기로 하시겠습니까?”

“채식으로 달라고 했는데.”

술기운에 뻣뻣해진 혀로 녀석이 말했다.

그러자 승무원은 난색을 표했다.

“손님, 탑승 후에 말씀해 주셔서 그 부분은 반영이 어려웠습니다.”

“채식 달라고.”

“손님, 죄송하지만…….”

승무원은 점잖게 그를 달래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 짜증이 확 번졌다.

“아씨! 안 먹어!”

그렇게 소리치는 녀석에게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대찬의 코까지 자극할 정도였다.

간신히 꾹꾹 눌러 왔던 분노 위에 다시 짜증이 켜켜이 쌓였다.

“됐으니까 위스키나 더 줘요!”

“손님, 이미 취하신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지금 기내식도 제대로 안 갖다 주고 술까지 안 주겠다는 건가?”

“그, 그게 아니고요, 손님.”

녀석은 승무원을 노려봤다.

“VOC에 올려야 갖다줄래요?”

그 말에 승무원의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아, 아닙니다! 갖다 드리겠습니다!”

대찬은 적개심이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전문적인 진상이다.

VOC는 Voice Of Customer, 즉 고객의 목소리란 뜻이었다.

고객이 정식으로 항의한 불만 사항이다.

라인을 타고 자칫하면 오너의 귀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말단 승무원은 엄혹한 징계, 심하게는 해고를 면치 못한다.

그는 고작 한 끼 기내식과 몇 잔 위스키를 타 내기 위해 VOC를 들먹이며 승무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손님의 알량한 권력으로 승무원을 쥐어짜는 그가 대찬은 경멸스러웠다.

대찬이 쏘아보자 그는 위스키를 홀짝이며 대찬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뭘 꼬나봐?”

성질을 건드리는 목소리에 서원웅이 예방에 나섰다.

그는 대찬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대찬에게 귀띔했다.

“반응하지 마.”

그러자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있어 봐.”

대찬은 그렇게 서원웅을 떼어 놓고 그의 시비에 응답했다.

“네? 제가 뭘요?”

“너 방금 엿같은 개 눈깔로 꼬나봤잖아. 시치미 뚝 떼는 거 봐라, 귀여운 새끼가.”

“지랄하네, 엿같은 새끼가.”

대찬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점잖은 목소리의 육두문자로 응수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조곤조곤했는지 승무원이 녀석의 시비는 들었어도 대찬이 말하는 건 듣지 못했다.

“뭐! 너 뭐라고 했어!”

“네? 제가 뭘요?”

대찬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엿같은 새끼라고 했잖아! 이런 썅……!”

“환청 들으시는 거 보니까 술을 많이 자신 모양이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는 녀석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종결했다.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그가 좌석 벨트를 풀고 대찬을 향해 다가왔다.

깜짝 놀란 승무원들이 그를 제지하러 달려왔다.

“손님! 기내에서 난동 부리시면 안 됩니다.”

“뭐? 난동? 지금 저 새끼가 시비 건 거 못 들었어!”

“손님, 기내에서 정숙해 주세요.”

이제 승무원도 VOC건 뭐건 녀석의 난동에 적잖이 뿔이 났다.

그러나 술이 취할 대로 취한 그는 물리적인 제지에 더 자극을 받았다.

그는 취객의 제어되지 않는 완력으로 여자 승무원들을 확 밀쳤다.

그러자 승무원들이 일거에 나가떨어졌다.

장애물을 제거한 녀석은 대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예상하지 못한 일격에 당황한 승무원들은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녀석은 대찬의 멱살을 갑자기 틀어쥐었다.

당황한 서원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러지 마시고 말로…….”

대찬은 멱살이 잡혀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는 우왕좌왕하는 승무원들을 향해 물었다.

“이 승객 제어하는 거 제가 도와도 됩니까?”

“네, 네! 도, 도와주세요!”

승무원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뒤집힌 녀석은 대찬을 향해 폭언을 쏟았다.

“뭐? 제어? 네 까짓 게 뭔데 날 제어한다, 만다 거드름을 피워!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어떻게 아냐, 이 새끼야.”

“이 새끼가 근데 진짜!”

대찬의 거듭된 도발에 녀석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했다.

대찬은 승무원에게 재차 확인했다.

“제가 도와도 된다고 했죠? 제압합니다?”

대찬의 말에 승무원들에 다급히 화답했다.

“네! 네! 제압해 주세요!”

“오케이.”

정당성을 얻은 대찬은 오래 참았던 분노를 일거에 표출했다.

그는 녀석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넌 뒤졌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대찬은 녀석의 관절을 뒤틀었다.

특전사의 경험이 십분 발휘되었다.

으드드득!

관철이 뒤틀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으아아악!”

초장부터 기선을 제압한 대찬은 이어 발을 걸어 그를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승무원이 안 보이게 은밀히 그의 사타구니에 발을 넣고 살포시 짓이겼다.

대찬의 발에 물렁한 것이 밟혔다.

그러자 녀석은 완전히 눈이 뒤집혀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이쯤 되자 승무원들도 놀라 대찬을 말렸다.

“너, 너무 과격하게 제압하시는 거 아니에요?”

“네? 전 그냥 못 움직이게만 한 건데… 이분이 엄살이 좀 심하시네요.”

대찬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표정을 지었다.

사타구니에 심한 압박을 받은 녀석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대찬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내려다보고 승무원에게 말했다.

“다시 난동 피울 염려가 있으니까 자리에 포승으로 묶는 게 낫겠죠?”

“네,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그것도 제가 도와 드릴게요.”

대찬은 군대에서 배운 포승줄 묶는 법을 실전에서 활용했다.

승무원이 넘겨준 포승을 넘겨받은 대찬은 녀석을 꽁꽁 자리에 결박했다.

그때 겨우 사타구니 사이의 고통을 진정시킨 녀석이 다시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원래 하룻강아지는 우리에 갇혔을 때 가장 사나운 법이다.

“야! 너 이 씨… 이거 안 풀어? 안 풀어?”

“좀 가만히 계세요. 자꾸 그러면 착륙할 때까지 이 몰골로 가야 된다니까.”

“풀어! 풀라고, 이 개새끼야!”

“아이고, 입이 험하시네.”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몰래 그의 발을 콱 밟았다.

“끄아아악!”

녀석은 다시 몸을 비틀었다.

“야! 이 새끼가 내 발 밟았잖아! 폭행죄야, 이거! 폭행죄!”

“사람 그렇게 누명 씌우면 안 돼요. 누가 보면 진짜 때린 줄 알겠네.”

녀석의 눈에 실핏줄이 곤두섰다.

미칠 듯한 분노, 그리고 억울함이 이성의 끈을 끊어 버렸다.

게다가 몸을 얽어맨 포승이 그를 더 미치게 했다.

몸이 단단히 묶여 버렸으니 그가 대찬에게 복수할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카아악- 퉤엣!”

그는 가래를 끌어 모아 진득한 침을 뱉었다.

정확히 대찬의 뺨에 착 달라붙었다.

정작 대찬은 평온한 표정이었는데 승무원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머, 어떡해!”

“괜찮아요. 닦을 것 좀 갖다주시겠어요?”

“그럴게요, 그럴게요!”

승무원이 후다닥 자리를 뜬 사이 대찬은 슬그머니 녀석의 허벅지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콱, 집게발처럼 그의 허벅지 살을 뜯어내듯 쥐었다.

“으아아악!”

녀석은 꽁꽁 묶여서 대찬의 거친 완력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만! 그만! 그만!”

대찬은 그의 호소에도 한참 놓아주지 않고 있다가 승무원이 부랴부랴 손수건을 갖고 오고 나서야 놔주었다.

승무원은 대찬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꾸벅 허리를 굽혔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진상 때문에 여럿이 욕보네요. 손수건 고맙습니다.”

대찬은 뺨을 닦으며 승무원에게 속닥거렸다.

“그런데 기내 난동은 중범죄 아닌가요?”

“예, 그렇죠. 다행히 우리나라 국적기라 우리나라에서 재판받을 거예요. 미국이었으면 징역 살아야 해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래도 난동을 심하게 부렸으니 참……. 그래도 좀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대찬의 말에 승무원은 의아했다.

“네? 어째서…….”

“일이 괜히 커지면 저 사람도 저 사람이지만 승무원님께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대찬의 말대로 사법 처리 대상이 되면 승무원은 참고인 내지 증인으로 법원에 불려갈 소지가 있었다.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염려되는 건 승객 제압 과정에서 승객의 도움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는 것, 선제적인 대응에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얼마든지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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