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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6화 (45/556)

난 할 수 있어 46화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기름진 밭이었다.

게다가 바람직한 생각은 아니지만, 프로젝트를 함께한다는 미명하에 에피니키온의 고급 인재들을 아주 저렴한 인건비로 부려먹을 수 있었다.

안두홍과 서청수의 알력다툼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돈 몇 푼 더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안두홍을 제대로 찍어 누를 기회를 서청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찬과 서청수의 이익이 맞아떨어졌다.

월짝회의 지분은 일시적이나마 대폭 떨어졌다.

돈이 없으면 말발이 달리는 건 순리였다.

월짝회 졸업생 선배들의 소위 갑질과 필래그룹의 기민한 대처로, 그렇잖아도 월짝회에 깊은 회의감을 품고 있던 1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월짝회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필래그룹은 에피니키온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재학생 부원 사이에서는 대찬의 영향력이 한여름 하늘 가운데 걸린 해처럼 빛났다.

최재한은 짧은 감상평을 내놓았다.

“월짝회는 거의 누더기가 돼 버렸네.”

그의 말대로였다.

번번이 싸움을 먼저 걸어 놓고, 번번이 상처만 안고 물러났다.

사회로 나간 월짝회는 여전히 건재할지 몰라도 캠퍼스에 있는 월짝회는 초토화되었다.

그날 이후로 백지훈은 에피니키온 정기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한 달에 소주 한 짝을 비우라는 포부 넘치는 이름답지 않게 월짝회 모임도 뜸해졌다.

대찬은 그렇게 탄탄한 입지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한 해 동안 회장 직무를 수행해 냈다.

웜샤인과의 협업에 주력하는 동시에, 그 노하우와 경험을 지녀 다른 기업들과의 협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들이 만드는 수공예품.

연로한 은퇴자들이 만드는 빵.

독거노인을 위한 500원 도시락.

사회적 기업에 걸맞은 사업들을 중소 업체들의 손을 잡고 힘 있게 추진해 나갔다.

이런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활동은 첫 번째 삶에서 듣고 본 것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대찬은 그러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삼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좋은 일들이 앞당겨졌다는 것이 그런 사소한 양심의 가책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대찬의 주도하에 에피니키온은 상당한 인지도와 관심을 얻게 되었다.

일전의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이미지는 다소 희석되었다.

대찬의 취향으로는 고고한 엘리트보다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후배들의 발랄하고 씩씩한 축하를 마지막으로 대찬은 성공적인 임기를 끝냈다.

그의 든든한 동기들도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한 마디씩 보탰다.

“수고 많았다.”

대찬은 최재한, 마강국, 서원웅, 소중한 친구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강국은 후배이긴 했지만.

회장으로서 대찬의 1년은 에피니키온 역대 회장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지겹게 이어져 오던 내부 파벌 사이의 알력을 해소했다.

말만 창업 동아리지, 결국 선배들이 내려 주는 동아줄만 바라보던 에피니키온이었다.

대찬은 그런 에피니키온을 부원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에 기여하고 이익을 창출해 내는 동아리로 탈바꿈시켰다.

학보사에서는 유례없는 동아리 회장의 퇴임 기념 인터뷰를 했다.

학교 본부는 대찬에게 자랑스러운 재학생상을 수여했다.

고원대 경영학과 동문들로 이루어진 고원경영학우회 역시 대찬에게 별도의 상과 금일봉을 수여했다.

월짝회의 대부분이 경영학과 출신이었고, 학우회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때문에 대찬의 수상을 반대하는 입김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찬에게 상이 돌아간 건 그의 성과가 객관적으로 뚜렷한 까닭이었다.

대찬은 그렇게 화려하게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 회장과 악수를 나눴다.

“야, 어째 좀 불안하다. 잘할 수 있지?”

“잘난 체하지 마. 내가 너보다 더 잘할 거니까.”

대찬은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마강국의 손을 잡았다.

마강국은 압도적인 완력으로 대찬의 손을 세게 흔들었다.

마강국이 대찬에 이어 에피니키온의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선배가 좀 도와주면 되잖아요?”

대찬과 마강국의 대화를 엿들은 후배가 훈수를 뒀다.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그 녀석이었다.

그러자 최재한이 그에게 말했다.

“너 몰랐어? 쪼대 이제 에피니키온 안 나오잖아.”

“네,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이제 2학년 마치셨잖아요.”

후배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최재한은 웃으면서 말했다.

“교환학생으로 미국 가시잖냐.”

“미, 미국요?”

최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대찬은 별로 생각 없었는데 서청수 회장님이 거듭 권해서 등 떠밀려 가게 됐지.”

최재한의 말에 대찬이 퉁을 놨다.

“지나치게 말이 많다.”

“저거 회장 1년 하더니 목소리 기름져진 것 봐. 꼴불견이야.”

“쓸데없는 말 여기저기 하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얼마나 건방져 보여.”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서 회장님이 계속 똥구멍 쑤셔 대니까 못 버티고 가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너 원래 건방져. 졸라 건방져.”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최재한의 말에 더 반응하지 않았다.

후배는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와! 선배, 미국 어디로 가요?”

“비밀.”

대찬은 그렇게 대꾸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굳이 이러쿵저러쿵 뒷말이 떠돌아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는 이름부터 거창한 ‘조대찬 회장 퇴임 기념 회식’을 하자는 후배들의 말을 극구 뿌리치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니 대찬의 미니 홈페이지에 누군가 한 줄 글을 적어 놓았다.

-빨리 와. 심심해- 김산하(♥우주최강여신♥)

대찬은 그걸 보고 픽 웃었다.

“빨리 오긴 뭘 빨리 와.”

대찬이 회장으로서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날, 김산하는 그 자리에 불참했다.

그녀는 미국에 있었다.

제법 좋은 성적과 자격을 갖춘 김산하는 미국 소재의 기업에 합격해 그곳에서 근무하게 됐다.

대찬도 미국으로 가게 돼서 저런 안부를 남겨 놓았는데, 대찬이 보기에 황당할 뿐이었다.

김산하가 다니는 회사는 캘리포니아주에 있었다.

북미 대륙의 서쪽 끝이었다.

후배에게는 비밀이라고 했지만, 대찬이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학교는 미네소타주에 있었다.

미국 중북부에 위치해 있는 주였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보다야 캘리포니아에 방문하기 수월하겠지만, 김산하의 주문대로 빨리 오란다고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미네소타는 겨울에는 폭설과 함께 혹한이 불어닥치는 지역이었다.

대찬이 굳이 그곳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한국 교민도 별로 없었고, 유학생도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서청수 회장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국으로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떠나게 됐지만, 이왕 떠나게 된 이상 목표는 확실히 세워야 했다.

‘영어는 기본이니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려면 여러 방면에서의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1년 남짓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 완벽한 영어 실력을 갖추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할 방법을 대찬 나름대로 궁리했다.

한국인 유학생이 적어야 했다.

그래야 한국어보다 영어를 자주 쓰게 되고, 더 능숙해질 테니까.

그렇다고 지나치게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에게 배타적이어선 곤란하다.

그래도 이방인으로서 마음 편히 살 만한 곳이어야 한다.

고원대학교와 자매결연 관계의 대학 중 이 조건에 부합되는 대학이 바로 미네소타 대학이었다.

한국인의 비율이 낮은 편이고, 대개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미네소타 사람들은 저 남부의 레드넥처럼 타 인종에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학교로 오라는 김산하의 강력한 러브콜도 무시한 채 대찬은 미네소타행을 선택했다.

“음, 미네소타 대학이 나쁘진 않다만, 더 좋은 선택지가 있는데 왜 굳이?”

대찬에게 극구 미국행을 권했던 서청수는 대찬의 선택에 의문부호를 달았다.

“미네소타로 가고 싶습니다.”

“혹시 학비가 싸서 가겠다는 거냐? 부담 가지지 마라. 네게 투자하는 돈보다 네가 벌어다 준 돈이 더 많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대찬은 서청수의 억측을 부정하고 자신이 내린 판단의 근거를 설명했다.

서청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네 말도 일리는 있다만, 원웅이도 그쪽으로 보내야 한다는 건데…….”

“예? 원웅이를요?”

“네 짝꿍으로 삼을 요량이거든.”

대찬은 서청수의 말에 속으로 웃었다.

서원웅을 대찬의 짝꿍으로 삼을 요량이 아닐 것이다.

대찬을 서원웅의 짝꿍으로 삼으려는 요량이다.

같은 말도 듣기 좋게 하는 서청수의 세 치 혀에 대찬은 경탄했다.

“굳이 저랑 원웅이를 같은 학교에 보내실 필욘 없습니다.”

“아니야. 나는 조 군이 원웅이랑 같이 가 줬으면 해.”

대찬은 서청수가 거푸 미국행을 권한 까닭을 완벽히 이해했다.

서원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한편, 그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역할을 대찬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중임을 맡길 생각이니 교환학생 과정에서의 모든 경비를 부담하겠다고 선선히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오히려 내가 손해 보는 장사잖아.’

대찬은 속으로만 웃었다.

그가 계속 미네소타를 고집하니 서청수도 마침내 응낙했다.

출국을 앞두고 서원웅은 볼에 홍조까지 띠며 긴장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대찬아, 나 너무 떨린다.”

“나도 안 떨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좌불안석할 것까진 없잖아?”

“나 비행기도 처음 타 봐.”

아이처럼 설레는 모습에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런 그들을 최재한은 잔뜩 부은 얼굴로 째려봤다.

“좋냐? 나 버리고 가니까 좋냐?”

“어, 엄청 좋아. 드디어 최재한한테서 해방되는구나!”

“너 방금 그거 30년짜리였어.”

“그럼 30년 동안 미국에 있어야겠다.”

“넌 진짜 나쁜 새끼야.”

대찬은 큭큭 웃으면서 최재한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너라도 여기 있어야 마강국을 컨트롤하지. 아니면 불안해서 어떻게 사냐.”

“내가 무슨 집 지키는 개야?”

“넌 매사에 너무 삐딱한 게 문제야.”

최재한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여름방학 때는 들어올 거지?”

“당연하지!”

“미네소타는 뭐가 유명하냐? 올 때 사 와라.”

“…눈보라가 유명하다는데 눈이라도 퍼다 줄까? 근데 그건 겨울방학에나…….”

대찬의 말에 최재한은 그를 확 밀치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냥 닥쳐!”

* * *

“잘 다녀올게요.”

대찬은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모님과 포옹했다.

“몸조심해라. 연락 자주 하고, 알았지?”

“그럴게요.”

어머니는 소매로 눈물을 찍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타박했다.

“뭐 전쟁터 보내? 쓸데없이 울기는…….”

“당신 그 시뻘건 눈가나 어떻게 하고 말해. 자기도 똑같으면서.”

한 방 먹은 아버지는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대찬의 등을 두드렸다.

“열심히 해라. 좋은 기회니까.”

“네, 그래야죠.”

아버지는 대찬의 옆에 선 서원웅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원웅 군 아버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에 아들내미가 미국엘 다 가네요. 아버님, 아, 아니지, 회장님께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 주세요.”

아버지의 목소리는 한참 손아랫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상감마마 모시는 듯했다.

아마 오랜 직장 생활로 터득한 바일 터.

서원웅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찬이에게 참 많이 도움 받았어요. 이 정도야 대찬이에게 받은 거에 비하면 티끌만큼도 안 되는 걸요, 뭐.”

“아이고, 귀한 댁 도련님이 겸손하기까지!”

살가운 저자세로 일관하는 아버지가 대찬은 익숙하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흘끗 바라본 대찬은 마찬가지로 배웅을 나온 서원웅의 어머니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원웅이랑 잘 지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찬이 너만 있으면 걱정 하나도 안 한다. 잘 부탁한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어머니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중년에 다다른 나이임에도 서원웅의 어머니는 퍽 동안이었고 미색이 돋보였다.

괜히 서청수가 한눈을 판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가보겠습니다!”

대찬은 씩씩하게 말하고 출국장을 향해 걸어갔다.

대찬의 아버지는 서원웅의 어머니에게 갈비를 대접할 테니 꼭 드시고 가라며 누차 강조했다.

대찬과 서원웅은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이제 이역만리 먼 나라에서 둘이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평소에 대범하던 대찬도 긴장이 되었다.

“오, 뜬다, 뜬다!”

서원웅은 재벌가 도련님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대찬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개방정을 방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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