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5화
현관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물었다.
“오늘 정기 모임 있는 날 아니니?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와?”
“오랜만에 집밥 먹고 싶어서.”
대찬의 대답에 어머니는 기분 좋게 웃었다.
“어머, 나 신기 있나 봐. 오늘 어쩐지 소고기 사고 싶더라니까? 우리 아들 먹이려고 그랬나 보다. 얼른 와서 먹어.”
그 말에 누나인 조수진이 퉁을 놨다.
“오늘 조대찬 없다고 입 하나 줄었으니까 비싼 거 먹자고 했잖아!”
“이년, 이년이 어디서 이간질이야! 망할 년!”
여지없이 등짝 스매싱이 따랐다.
조수진은 어머니를 피해 도망 다니면서도 할 말은 주절주절 다 했다.
“매주 화요일에 조대찬 정기 모임 가면 우리 막 외식하고 그랬잖아? 조대찬! 우리 저번 주에는 일식집 갔다? 1인당 5만 원 하는!”
“어머, 어머! 쟤 이간질 하는 것 좀 봐! 입 안 닫아!”
“엄마 당황하면 계속 어머, 어머 하는 거 너도 알지?”
“저, 저, 망할 년! 망할 년!”
집안 여자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대찬은 웃으면서 식탁에 앉았다.
고봉밥과 잘 구운 쇠고기가 식탁에 올라 있었다.
대찬의 식성에 맞게 민물새우를 많이 넣고 끓인 된장국도 놓였다.
대찬은 오랜만에 집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조수진을 일망타진한 어머니는 정성스러운 밥상을 차렸다.
대찬이 홀로 밥을 먹는 식탁 위에 달걀프라이를 해 올리고, 김을 잘라 놓고, 명란젓에 참기름을 쪼르륵 따라 올렸다.
“그만 주세요. 다 못 먹어.”
“많이 먹어. 너 요즘 살 빠졌더라.”
“아, 그래요? 몰랐네.”
“너는 몰라도 엄마 눈엔 다 보여.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먹어.”
“네! 그럴게요.”
대찬은 웃으면서 한술 가득 밥을 펐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로 가 보던 드라마를 마저 시청했다.
첫술은 야심차게 펐지만, 그다음부터 대찬은 젓가락으로만 밥알을 깨작거렸다.
어머니는 그런 대찬을 곁눈질로 살폈다.
반찬이 김치만 있어도 금세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는 그였다.
그런데 수라상은 아니어도 제법 푸짐하게 차린 식탁 앞에서 깨작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대찬은 결국 밥 한 공기도 다 비우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남은 밥은 내일 아침에 제가 먹을게요.”
그렇게 말하고 대찬은 그릇을 치웠다.
어머니는 뭐라 말하려다 꿀꺽 삼키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힘든 일 있어도 밥은 항상 든든히 먹어라. 그래야 싸움이 있으면 싸우고, 울 일이 있으면 울 기운이라도 차리는 거야.”
그 말에 대찬은 어머니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네, 그럴게요.”
“우리 아들은 뭐든 다 잘할 테니까 엄마는 더 말 안 할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찬의 등을 다시 힘 있게 두드렸다.
그 말이, 토닥임이 대찬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 자세로 한참 고민했다.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다만,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음은 이미 다잡혀 있었다.
대찬은 차려진 아침상을 싹 비워 냈다.
노릇하게 구워진 통통한 조기는 대가리와 앙상한 가시만 남겼다.
“학교 다녀올게요.”
대찬은 씩씩하게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대찬은 학교 가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지만 그의 행선지는 학교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필래그룹 사옥 앞에 섰다.
푸르스름한 통유리로 된 필래그룹의 사옥은 햇빛을 받아 눈부셨다.
대찬은 그 앞에 서서 끝 모르고 치솟은 건물을 한참 바라봤다.
목이 시큰했다.
서류 가방을 들고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들이 통과하는 회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실은 26층에 있었다.
26층에 내리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치장한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로비 정면에는 필래그룹의 사훈인 ‘필래로 필래’가 누런 금속으로 적혀 있었다.
대찬이 안으로 들어가자 데스크의 직원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회장님을 뵙기로 했습니다.”
대찬의 대답에 직원은 아래위로 그를 훑어보았다.
앳된 얼굴도 그렇고 셔츠에 청바지, 전형적인 대학생 차림에 대찬을 신뢰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찬은 겸연쩍게 웃으며 부연했다.
“미리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비서실장님께 여쭤보면 아실 거예요.”
생각을 읽힌 직원도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인을 거친 후 대찬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직원은 공손히 회장실을 노크했다.
“회장님, 조대찬 씨 오셨습니다.”
“어, 들어오라고 해.”
승낙이 떨어지자 직원은 대찬에게 눈짓으로 들어가라는 표시를 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청수는 대찬을 바라보며 웃었다.
“너무 딱딱하게 그럴 거 없어. 편하게 앉아.”
“감사합니다.”
이내 김이 오르는 차가 앞에 놓였다.
서청수는 후루룩 차를 마시곤 대찬에게 말했다.
“안두홍 그 친구가 유치하게 에피니키온 일에 개입했다고?”
“네, 맞습니다.”
“제 딴엔 후배 위해서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칠칠치 못하게.”
서청수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안두홍을 경멸하는 듯했다.
“원래는 웜샤인 박 실장님께 도움을 청했는데…….”
“박 실장 그 친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안두홍하고 싸우겠나. 애들 싸움에 끼어든다고 만만하게 보지 마.”
“만만하게는 보지 않습니다, 절대.”
안두홍의 실력과 카리스마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았다.
“안두홍을 상대하려면 체급이 나 정돈 돼야 한다, 그 말이야.”
“물론 그렇습니다만.”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다음부터는 웜샤인 쪽에다 아쉬운 소리 할 거 없어. 나한테 말해. 알았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안두홍 선배님께서 모든 지원을 차단했습니다.”
“그랬다더군.”
“이대로라면 부원들이 저를 쳐 낼 겁니다.”
“그럴 테지.”
“그러면 저는 더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서청수는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의 눈은 대찬을 보고 있었다.
“여우 같긴.”
“예?”
“불감청고소원인가.”
간절히 원하되, 감히 제 입으로 부탁하지는 못하는 일.
서청수의 정확한 지적에 대찬은 웃기만 했다.
“내가 힘을 쓰면 에피니키온에서 내가 안두홍보다 강할 수 있나?”
대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있습니다.”
“…좋아.”
서청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나가 보게.”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서청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비서실장.”
서청수의 부름에 비서실장이 즉각 응답했다.
“예.”
“얘기 좀 하지.”
대찬은 회장실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에피니키온에 말이야…….”
닫히는 회장실 문틈으로 서청수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비서실장에게 한참 무언가를 설명했다.
대찬은 가뿐한 마음으로 필래그룹의 사옥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대찬의 노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에피니키온의 부원 한 명, 한 명을 따로 만났다.
자리는 점심시간의 왁자지껄한 학생 식당이기도 했고, 카페이기도 했으며, 공부에 매진하는 이를 만날 때는 도서관 앞의 벤치이기도 했다.
특강 이후 부원들은 대찬과 따로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그럼에도 대찬은 줄기차게 만남을 요구해 끝내 대면했다.
대찬은 후배들을 먼저 만났다.
“안두홍 선배가 살벌하게 말했다며?”
“…선배도 들으셨어요?”
“응. 작정하셨더라.”
“…사실 저 이번에 졸업생이 기부한 발전 기금으로 북경에 어학연수 가려고 했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준비도 오래했잖아.”
“네. 그런데 발전 기금을 다 회수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나 때문이겠지?”
후배는 잠깐 대찬을 바라보다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그럼 내가 에피니키온을 나가면 중국 갈 수 있는 건가?”
후배는 여전히 멋쩍은 웃음을 머금으며 잠시 침묵했다.
대찬이 다시 묻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럼 내가 에피니키온을 나갔으면 좋겠어?”
“선배한테는 좋은 감정만 있어요. 월짝회가 치사하게 나오는 것도 알아요.”
후배는 그렇게 말하고는 쭈뼛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대찬이 계속 침묵을 지키며 다음 말을 기다리자, 후배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어렵사리 꺼냈다.
“하지만 나가 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구나.”
“죄송해요.”
후배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찬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대찬의 얼굴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안 나가도 중국에 갈 수 있으면, 그럼 어때?”
“그러면 최고지만…….”
이뤄지지 않을 가정에 후배는 민망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지원 사업이 모두 중단되면 필래그룹에서 고스란히 보장해 준다고 약속했어.”
그러자 후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 정말요?”
“응. 서청수 회장님이 약속해 주셨어.”
대찬은 후배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어때, 이러면 나 안 나가도 괜찮겠어?”
“그, 그럼요! 나갈 거면 월짝회 선배들이 나가야죠.”
대찬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렇게 동기, 후배들을 차례대로 1명씩 만났다.
하루에 많으면 5명도 만났다.
김산하와 최재한 등 대찬과 가까운 이들이 돕겠다고 나섰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
“제가 직접 해야 돼요.”
그는 그렇게 고집하며 꾸역꾸역 일대일 만남을 이어 나갔다.
대찬은 서청수의 이름을 대며 그들을 설득했다.
공수표가 아니었다.
서청수는 대찬에게 무산된 지원 사업을 필래그룹의 자산으로 채워 주겠다고 공언했다.
서청수는 그 증거로 우선 안두홍이 거둬 간 컴퓨터를 웜샤인의 이름으로 에피니키온 동아리실에 기증했다.
옛것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최신형이었다.
필래그룹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자 월짝회는 불안한 기류를 감지했다.
“조대찬 이 새끼가 요즘 후배들 하나하나 만나고 다니면서 필래가 적극적으로 지원할 거라고 설득하고 다닌다더니…….”
백지훈은 불안한 눈빛으로 옷소매를 꼭 쥐었다.
그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다음 정기 모임에서 대찬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선배님들로부터 지원이 중단되는 바람에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원들은 대찬의 입에 집중했다.
“저 하나 때문에 큰 불편을 끼쳐 드렸기에 이를 해결하려고 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백지훈은 찜찜한 시선으로 대찬의 말을 들었다.
“다행히 저희 1기 선배님이시자 필래그룹 회장이신 서청수 선배님께서 전격적인 지원을 결정해 주셨습니다. 모든 지원 사업은 필래그룹의 이름으로 정상화됐습니다.”
그러자 김산하가 박수를 치며 바람을 잡았다.
김산하가 먼저 박수를 치자 다른 부원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서청수는 자신이 한 약속을 철저히 이행했다.
대찬과 첫 번째로 만났던 후배는 다음 학기에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다른 지원 사업들도 모두 안정되었다.
안두홍이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대찬 고사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도리어 월짝회의 입김이 말도 안 되게 줄어 버렸다.
그 공백을 필래그룹이 차지하면서 결과적으로 월짝회가 자신들의 지분을 스스로 감소시킨 것과 다름없었다.
필래그룹이 전폭적으로 대찬의 뒤를 밀어준 건 대찬의 수완도 분명히 역할을 했지만, 그게 결정적이진 않았다.
이 상황은 서청수에게도 분명한 호재였다.
단지 대학생들의 집합인 에피니키온에 다 늙은 어른들이 군침을 흘릴 정도로 에피니키온은 그들에게 이득이 되었다.
에피니키온은 그 전통과 명성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동아리였다.
명문 고원대학교 중에서도 훌륭한 인재들이 에피니키온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