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4화
월짝회는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그들은 작정한 듯 대찬을 흔들었다.
동아리 내부의 작은 분란이 아니었다.
압박은 졸업한 선배들로부터 내려왔다.
대외협력국은 선배들과의 교류를 담당했다.
말이 좋아 교류지, 따지고 들자면 선배들로부터의 일방적인 지원이었다.
대외협력국장을 맡은 학생은 대찬의 1년 후배였다.
밀레니엄 키즈의 날 행사가 무산되고 그 착잡한 여파가 선명한 다음 날, 대외협력국으로 팩스들이 쏟아졌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팩스들에 대외협력국장은 우왕좌왕했다.
한참 쏟아지던 것을 겨우 수습한 그는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폈다.
장이 넘어갈수록 대외협력국장의 눈이 커졌다.
“이게 대체 뭐야…….”
모골이 송연해진 그는 다급히 대찬에게 갔다.
“선배! 큰일 났어요!”
“큰일? 어제 그 난리통보다 더 큰일이야?”
대외협력국장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 있던 대찬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는 말없이 대외협력국장의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낚아챘다.
대외협력국장은 불안에 떨면서 따따부따 떠들어 댔다.
“갑자기 지원이 다 끊겼어요. 스터디 그룹 지원 사업, 전자기기 무상 지원, 커피숍 이용권, 면학 장학금, 야식 지원금, 해외 연수 지원금, 교양 도서 지원 사업 전부 취소됐어요.”
“…응, 안 그래도 다 읽었어.”
“어떡하죠?”
어떡하냐니.
대찬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도 방법을 알지 못했다.
후배 앞에서 의연하고 싶었지만 얼굴은 본능적으로 일그러졌다.
대찬은 깊게 한숨을 쉬고 대외협력국장에게 말했다.
“일단 지원 중단한 선배들께 연락드려 봐, 공손하게. 이유가 뭐냐고.”
“네, 선배.”
“답변을 꺼리면 더 캐묻지 말고 알았다고 해.”
“네.”
대외협력국장이 물러나자 대찬은 간신히 숨겨 왔던 분노를 표출했다.
책상에 놓인 필통을 집어 던졌다.
볼펜과 연필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데구루루 굴렀다.
“웬만해야 받아 주지…….”
대찬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외협력국장이 연락을 시도했지만 시원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월짝회 쪽은 아예 작정한 듯했다.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통지가 오자마자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1기 안두홍 선배 기증’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컴퓨터를 한 무리의 양복들이 와서 모두 회수해 갔다.
족히 10대가 넘었다.
속에서 천불이 난 김산하가 양복들 중 하나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이미 기증된 컴퓨터는 에피니키온 소유입니다. 무슨 권한으로 회수해 가는 겁니까!”
그의 항의에 양복은 같이 목의 핏대를 세우는 대신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기증의 형태가 영구 대여였다는 것.
그리고 종이의 말미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대여는 기증자의 판단에 따라 임의로 재조정될 수 있음.
그리고 그 밑에는 기증이 이뤄졌을 당시 에피니키온 회장이었던 민승기의 서명이 명백했다.
그것으로 김산하의 입은 다물어졌다.
그다음으로는 교양 도서를 수거해 가기 위한 인력이 에피니키온 동아리실에 들이닥쳤다.
검찰의 압수 수색을 방불케 했다.
대찬은 팔짱을 끼고 그 유치한 푸닥거리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모든 지원 사업을 거둬들인 다음 날.
에피니키온 재학생 부원들에게 일제히 문자 메시지가 발송됐다.
컴퓨터와 도서 따위가 빠져 어딘가 허전해진 동아리실에서 대찬이 주재하는 전체 세미나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동시에 부원들의 휴대폰이 울리니 세미나 중에도 흘끗흘끗 문자를 확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뭐야?”
대찬은 불쾌감 대신 궁금증을 드러내며 옆자리에 앉은 부원의 액정을 넌지시 엿봤다.
‘특강 공지……?’
더 읽어 보려는데, 대찬의 시선을 감지한 부원이 슬그머니 화면을 꺼 버렸다.
대찬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슬쩍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에게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대찬은 이를 꽉 악물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확인해 보니 김산하, 최재한, 마강국, 서원웅, 민승기처럼 확실히 대찬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대찬이 양희성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자신에게는 문자가 와 있다고 했다.
“잠깐 봐도 될까?”
“네, 그러세요.”
엠티 이후 양희성은 몸만 월짝회에 있고 마음은 대찬에게 있었다.
월짝회도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를 내치면 1학년 월짝회 부원들이 덩굴째로 이탈할 것이 염려되어 애써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양희성이 선선히 넘겨준 문자는 대찬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족했다.
-<특강 공지>취소된 밀레니엄 키즈의 날 행사를 밀레니엄 키즈 선배들의 특강으로 대체합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그렇게 적힌 메시지 뒤에는 일자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장소는 서울 모처의 고급 한우를 취급하는 식당이었다. 월짝회 출신의 선배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일자는 다음 에피니키온 정기 모임과 겹쳤다.
왕따라는 노골적인 낱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찬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낫살 먹고 참 유치하게도 노신다.’
다음 정기 모임 때 에피니키온 동아리실을 찾아온 부원은 소수였다.
“…이게 다야?”
최재한은 마음속의 말을 저도 모르게 밖으로 뱉었다.
눈치 없는 말이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흠잡지 않았다.
누구든 최재한의 마음을 이해했다.
정기 모임에 모인 인원은 15명이었다.
모일 때마다 결원은 있기 마련이지만 7, 80명의 부원은 항상 참석했다.
개근하던 필래 장학생마저 보이지 않았다.
웬만해선 얼굴에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 서원웅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대찬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대찬과 가까운 후배였다. 그는 대찬의 부탁을 받고 특강에 나가 있었다.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원이었다.
-거기 사람 많이 왔어?
-네. 재학생은 한 50명 되는 거 같고, 다른 선배들도 많이 와 있어요. 안두홍 선배도 있어요.
여기는 열다섯, 저기는 오십.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섭리라는 건 이해했다.
일시에 차단된 지원 사업은 부원들에게 즉시 체감되었다.
그들은 친목 도모가 아니라, 사회로 진출할 때 남들보다 앞선 출발선에 서고 싶은 까닭으로 동아리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앞선 출발선은커녕 사회 구석구석에 포진한 선배들에게 눈총을 받고 도리어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
얄팍한 의리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다.
-지금은 안두홍 선배가 축사하고 있어요.
-전화.
대찬은 두 글자 메시지를 보내고 화장실로 향했다.
바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쪽은 말하는 대신 수화기가 바깥쪽으로 향하게 들었다.
외부의 음성, 그러니까 안두홍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여러분, 에피니키온은 선배들의 피땀으로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선배들한테 고마워해야 합니다. 밀레니엄 키즈가 탄생한 것도 다 선배들의 공로죠. 인정합니까”
“네에!”
“여러분은 에피니키온의 주인이지만, 선배들도 에피니키온의 주인입니다. 그렇기에 전통이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만 에피니키온의 주인이면 전통이 왜 필요해요.”
대찬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멀리서 들려오는 안두홍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통을 지키십시오. 그게 여러분을 지키는 겁니다. 파격이란 말이 좋게 들리지만, 국어사전을 보세요. 격을 깬다는 겁니다. 격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건 대찬을 저격한 말이었다.
지금껏 전통이란 미명하에 암묵적으로 지켜온 것을 다 헤집어 깨부순 대찬을 향한 것이었다.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격이란 자격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에피니키온의 후배로서 지니는 자격을 포기하고 있는 겁니다.”
“개새끼…….”
대찬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걸 모르는 안두홍은 더욱 격렬하게 부르짖었다.
“여러분의 이익은 여러분이 지키는 겁니다! 영리하게 행동하세요!”
축사하는 자리에서 안두홍은 협박을 했다.
애써 에둘러 표현했지만 본의는 대찬을 찍어 내라는 의미였다.
컴퓨터를, 교양 도서를, 장학금을, 해외 유학을, 낙하산을 위하여 조대찬을 찍어 내라!
대찬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조금 전, 안두홍의 축사를 녹음했다.
정기 모임에 온 열다섯의 부원들은 선배들에게 불순분자의 낙인이 찍힐 걸 각오하고 참석한 이들이었다.
신뢰할 수 있었다.
대찬은 이들에게 녹음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안두홍 이 새끼 진짜 비열하다.”
에피니키온 동아리실에서 에피니키온의 창설자를 노골적으로 욕하는 소리가 터졌다.
김산하의 입이었다.
그 험한 말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애들 싸움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추하게.”
“정신 상태가 애들 같으니 자기 싸움인 줄 알았나 보죠.”
적잖이 화가 난 최재한이 김산하의 말을 받았다.
서원웅은 우려하는 시선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찬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 같으면 어떻게 할래?”
“그, 글쎄…….”
김산하가 꽁한 얼굴로 대찬에게 물었다.
“설마 제 발로 나갈 생각은 아니지?”
“그것도 선택지 중에 하나죠.”
“절대 안 돼!”
“이대로라면 부원들이 먼저 절 쫓아낼 판이에요.”
대찬의 말에 김산하의 뒤를 이어 마강국도 반대했다.
“병신 되더라도 끝까지 싸워야지! 무슨 말이야, 그게!”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
대찬은 그렇게 마강국의 화를 무마하고 김산하에게도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줘요. 지금까지 제가 바보 같은 결론 내린 적 없는 거 아시잖아요.”
대찬의 말에 김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달라는 그 의미를 알았다.
무얼 선택해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찬에게는 마음을 다스릴 여유가 필요한 것이었다.
가장 분노할 사람, 황당할 사람, 두려울 사람,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을 사람은 대찬이었다.
모든 짐이 대찬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주변에서 그를 돕는다고 돕지만, 실제적인 책임을 오롯이 대찬에게 있었다.
김산하는 대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옳은 방법이 항상 능사는 아니야. 너한테 편한 방법도 고려해 봐. 아니, 너한테 편한 방법이 최선일지도 몰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술 한잔할까? 내가 살게.”
김산하의 호의를 대찬은 부드러운 미소로 거절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갈게요. 안 그래도 매일 술판이냐고 부모님이 한마디 하신 판이에요.”
“그래. 집에 가서 푹 쉬어.”
김산하는 순순히 대찬을 놔주었다.
대찬은 축 처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모인 열다섯 부원들에게 말했다.
“저는 오늘 일찍 들어가지만, 저 빼고 다들 모여서 한잔해요. 꿀꿀한 날이잖아요.”
“그래! 조대찬 빼고 집 갈 생각 하지 마. 다 죽여 주마.”
김산하의 엄포에 다른 부원들도 기분 좋게 웃으며 승낙했다.
그들 역시 이대로 쓸쓸히 귀가하기에는 아무래도 기분이 복잡할 터다.
이 와중에 최재한이 눈치 없는 말로 초를 쳤다.
“근데 이번에 지원금 끊겨서 동아리 돈으로는 못 먹겠네요.”
대찬이 피식 웃으며 지갑에서 두둑한 현금을 꺼냈다.
그러자 일동 모두 눈이 커졌다.
“자, 이걸로 거하게 먹어요.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대찬이 탁자에 올려놓은 돈을 물끄러미 보던 김산하가 물었다.
“야, 넌 오지도 않는데 왜 네 돈으로 술을 먹어?”
“고마워서. 오늘 오는 길에 돈 좀 뽑아 왔어요.”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 무시해요? 나 돈 많아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써요.”
최재한은 괜한 입방정을 떨었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니야. 그냥 우리 돈으로 먹을게.”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원래 오늘 사려고 했어.”
대찬은 김산하 쪽으로 돈 뭉치를 밀며 말했다.
겹겹이 쌓인 세종대왕의 표준영정이 김산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누나가 책임지고 이 돈 다 써 주세요.”
김산하는 대찬을 보며 피식 웃었다.
“돈 쓰는 건 또 김산하가 전문이지.”
그는 대찬의 마음을 잘 알기에 군말 없이 돈을 접수했다.
대찬은 그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