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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3화 (42/556)

난 할 수 있어 43화

서청수를 필두로 한 필래장학회 쪽 선배들이야 대찬을 귀여워한다.

하지만 문제는 안두홍 이하 월짝회 선배들이었다.

대찬이 회장이 됐다지만 에피니키온의 주류는 여전히 월짝회였다.

그쪽에서 훼방을 놓는다면 대찬의 입지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잘돼야 할 텐데…….”

대찬은 마른 입술을 오므렸다.

그는 밀레니엄 키즈의 날 행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필요에 의해 월짝회와 대립하긴 했지만, 일부러 척을 지는 건 사양이었다.

어쨌든 대찬도 한국 사회를 살아 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런 기세등등한 자들과 반목해 봤자 피를 보는 쪽은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인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깨달은 그였다.

그렇기에 안두홍을 위시한 선배들에 대한 대우를 비중 있게 생각했다.

“누나도 이번 행사에 힘 좀 써 주세요.”

“너답지 않은 말이네. 뒤 마려운 강아지처럼.”

“좀 무섭거든.”

대찬은 힘없이 웃어 보였고, 김산하도 안쓰러운 미소를 짓다가 대찬의 등을 쓸어 주었다.

“옆에 있어 줄게.”

“고마워요.”

김산하는 약속한 대로 대찬의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도움이 문제 해결로 직결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2005년도 밀레니엄 키즈의 날 기념식

식장의 가장 높은 곳에 현수막이 걸렸다.

대찬은 야심차게 기념식을 준비했다.

기념식은 역대 최대 규모로, 가장 호화롭게 준비했다.

선배들을 초대하는 일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전화를 돌리는 것과 별도로 장식이 많이 들어간 정식 초대장을 발송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찬의 이러한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

행사 당일, 대찬의 눈에 비친 풍경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안두홍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불참은 월짝회 졸업생들의 전원 불참을 의미했다.

밀레니엄 키즈의 날인데 밀레니엄 키즈도 없었다.

자리에 나타난 선배는 서청수 회장을 비롯한 필래장학회 출신의 몇몇뿐이었다.

재학생들 중에서도 백지훈을 위시한 월짝회 부원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위안이라면 양희성을 비롯한 몇몇이 월짝회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채웠다는 것뿐이었다.

행사는 성사되지 않았다.

회장으로서 연단에 선 대찬은 참석자들의 표정을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견디기 힘들었다.

민망, 황당, 분노, 슬픔, 허탈, 무기력.

그런 감정들이 마구 뒤섞인 표정들을 대찬은 직시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찬은 목구멍에 차오르는 울음기를 삼키며 말했다.

“오늘 행사는 성원이 충족되지 않아 부득이 취소하겠습니다. 어려운 발걸음 해 주신 선배, 동기, 후배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대찬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기념사 대신 돌발적인 짧은 인사만 말하고 연단을 내려왔다.

연단을 내려오는 찰나의 순간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월짝회 측이 비협조적으로 나올 건 어느 정도 각오했다.

하지만 아예 전원이 불참하는 시나리오까지는 대찬의 계획에 없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명분 없이도 잔혹할 수 있다는 걸 직접 체감했다.

“저… 음식은 언제 준비해 드릴까요?”

눈치 없는 호텔 직원이 대찬에게 물었다.

허탈하게 웃어 보이는 대찬 대신 김산하가 나서서 대답했다.

“오늘 행사는 부득이하게 취소됐습니다. 대금은 지불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대찬은 탁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철퍽 주저앉았다.

아무리 이러저러한 일로 정신이 단련된 그라지만, 오늘의 일은 쉽게 털고 일어나기 어려웠다.

대찬은 이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마찬가지로 황당할 서청수에게 다가갔다.

대찬이 그를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찬의 사과에 서청수는 침을 삼키며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대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게 어떻게 자네 잘못이겠나. 너무 자책하지 말게.”

“건방졌습니다. 시비를 걸어와도 참아야 했습니다. 때론 당해 줄 줄도 알아야 했습니다. 제가 미숙했습니다.”

“아니야. 그랬다면 이미 에피니키온에서 자네는 없느니만 못한 존재가 됐을 걸세. 결과는 더 비참했을 거야.”

서청수는 거듭 대찬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숙인 어깨를 곧게 펴 주었다.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그 결과도 최선이네. 때론 최선의 결과가 최선처럼 안 느껴질 때가 있지.”

서청수는 빙긋 웃으면서 김산하를 바라봤다.

“우리 장학회 최고 우등생.”

“회장님.”

김산하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뭘 그렇게 풀 죽어 있나.”

서청수는 웃으면서 몇 안 되는 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서원웅에게는 잠시나마 더 오랜 시간 시선이 머물렀다.

“소수만 참석한 모임에도 나름대로 장점은 있지.”

“……?”

서청수는 대찬의 어깨 위에 올린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한턱 쏘는 사람이 거하게 쏴도 부담이 덜하단 거야.”

서청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고급 정찬 흉내 내다 만 음식 말고, 진수를 보여 줌세. 다들 가지.”

“아, 하지만…….”

대찬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서청수의 저택에는 그의 처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서원웅의 존재도 알 테고, 그를 절대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찬의 염려를 꿰뚫은 서청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말게. 와이프도 자기 미술관 돌보느라 바쁘니까. 당분간 파리에 있을 거거든.”

그는 모인 이들을 이끌고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말 저택이라 부를 정도로 호화로웠다.

그는 자신의 고급 세단에 대찬과 서원웅을 앉혔다.

나머지 이들에게는 본사에서 차편을 제공하도록 조치했다.

말로만 듣던 평창동 재벌집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대찬의 마음은 허탈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대부분의 걱정은 쓸모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대부분은 이뤄지지 않을 일이거나 걱정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기에.

대찬의 걱정은 후자에 속했다.

괜히 센티하고 심각해져 봤자 남이 보면 청승맞은 똥폼에 지나지 않는다.

대찬은 짧은 한숨에 걱정을 날려 보냈다.

저택으로 들어가자 서청수의 전속 요리사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연 서청수가 스스럼없이 호텔의 요리를 흉내 내다 만 음식이라고 폄하할 만했다.

보기에도 화려하고, 맛은 짐작도 안 되는 요리들이 차례대로 준비되고 있었다.

“자, 앉게.”

서청수는 자신의 옆자리를 대찬에게 권했다.

그러자 한 칸 옆의 의자를 뒤로 뺀 대찬은 웃으면서 서청수에게 말했다.

“회장님.”

“음?”

대찬의 부름에 서청수는 그를 바라봤다.

대찬은 서원웅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그래도 행사가 취소된 덕으로 아드님과 사적인 시간을 보내시게 됐습니다.”

“허.”

서청수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서원웅을 바라봤다.

서원웅 역시 민망한 까닭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제3자 입장으로는 참 보기 좋은 투 샷입니다.”

“어, 그, 그런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저보다는 원웅이를 옆에 두시는 게 좋겠죠, 아무래도.”

서청수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대찬은 서원웅을 서청수의 옆에 앉혔다.

그 풍경을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정식 부자 상봉이 이 참담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다.

덕분에 험악했던 분위기가 다소 물렁해졌다.

달동네 판잣집에서 사는 마강국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해했다.

그러더니 이내 자리가 편해졌는지 서청수에게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회장님! 오늘 같은 날 그래도 술을 한잔해야지 않겠습니까? 축하주 겸 위로주로!”

“야, 가만히 좀……!”

최재한이 목소리를 낮춰 그를 만류하려는데 서청수가 마강국의 제안을 냉큼 받았다.

“오, 그거 좋지! 자네들, 와인 좋아하나?”

“와인이든 막걸리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씁니다!”

거칠 것 없는 마강국의 태도가 도리어 서청수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서청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아껴 두었던 와인과 양주를 꺼내 오도록 했다.

대찬은 서청수의 심리를 알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은 서청수였다.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던 후배이자 혼외 자식을 옆에 두는 일은 기쁘면서도 한없이 불편할 테니까.

무례하게까지 보일 수 있는 마강국의 제안이 서청수에게는 반갑기 한량없을 터였다.

속이 쓰린 대찬도 술을 반겼다.

독을 마셔 속의 독을 지우는, 이른바 이독제독이었다.

서청수는 과음을 했다.

아들인 서원웅이 왜 술이 약한지 그를 보니 알 만했다.

서청수는 와인 3잔에 혀가 풀렸다.

그게 부자 사이의 어색한 심리 장벽을 누그러뜨렸다.

다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금방 정신이 나가 버린 서원웅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정신을 잃었다.

마강국이 그를 부축해 밖으로 데려가려는 걸 서청수가 제지했다.

“강국 군, 여기 남는 방 많아. 원웅이는 오늘 여기서 재우지.”

“아, 옙!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원웅을 둘러멘 마강국은 가사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수많은 방들 중 한 곳에 서원웅을 눕혔다.

서원웅은 실려 가면서 유언처럼 짧은 말을 던졌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그의 말이 서청수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혔다.

그 말에 마강국은 슥, 몰래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술이 들어가면 심장이 말랑해지는 법이다.

서청수는 그 말을 끊임없이 되뇌며 한참 감상에 젖어 있었다.

밤이 되자 몇몇은 집으로 돌아갔다.

서청수는 취한 와중에도 차편을 제공해 편히 귀가하도록 해 주었다.

“나도 슬슬 일어나려고 하는데?”

김산하가 자리를 뜨며 대찬에게 말했다.

그러자 서청수가 선수를 쳤다.

“안 돼!”

“네?”

“조대찬은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

“아, 알겠습니다.”

서청수의 목소리가 전례 없이 단호해서 대찬은 사양하지 못했다.

김산하는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서청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회장님.”

“어, 우리 우등생, 수고 많았어요. 장 실장이 집 앞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거야.”

“감사합니다.”

최재한과 마강국도 집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서청수와 대찬, 단둘만 남았다.

잔에 술을 따르려는 서청수를 대찬이 만류했다.

“내일 숙취 있으실까 염려됩니다. 오늘은 이쯤 하시는 게…….”

“그럴까.”

서청수는 빙긋 웃으며 병을 내려놨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마음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뭘. 나도 내 마음 좋자고 자네들하고 술 한잔한 거야. 나도 마음이 좋군.”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자네가 우리 원웅이를 많이 챙겨 줬다고 들었어.”

“챙기다뇨. 친구끼리 친할 뿐이에요.”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다고 들었어. 고마워, 아비로서.”

“제 행동이 조금이라도 원웅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고마울 뿐입니다. 저도 원웅이한테 도움 많이 받고 있고요.”

서청수는 가만히 대찬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따로 말씀 안 주셔도 어련히 잘 지내려구요. 원웅이 일이라면 뭐든지 성심껏 돕겠습니다.”

서청수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 말, 계속 유효해야 해.”

“예?”

“원웅이 일이라면 뭐든지 성심껏 돕겠다는 말. 그 말, 똑똑히 기억해 두겠네.”

서청수는 대찬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다는 표시 같았다.

“오랜만에 과음했더니 피곤하네. 우리도 슬슬 들어가 자지. 아줌마, 학생 방 좀 안내해 줘요. 이불도 새것으로 내주고.”

대찬은 가사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더없이 편한 잠자리였다.

서청수의 저택에서 지낸 하룻밤은 달콤했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일시적이었다.

저택의 고풍스러운 철문을 뒤로하고 학교로 돌아옴과 동시에 다시 무심한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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