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42화
“조대찬이가 뺀찌를 놓더라고?”
“예. 송곳 하나 세울 틈도 없더군요.”
“흠, 그랬단 말이지.”
“신용하셔도 괜찮으실 거 같습니다. 뭐, 이제 스물하나라 나중에 세태에 찌들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직까진 하얗더란 말이지.”
“정의감이 투철해선지, 아니면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건진 모르겠지만요.”
서청수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후자가 더 마음에 드는군.”
“아무튼 제가 비리 사단장이 되는 오명을 감수하고 테스트했습니다. 나중에 술이나 거하게 사 주십쇼.”
“아무렴! 조대찬에게는 내 나중에 확실히 해명해 주겠네. 그럼.”
서청수는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음, 써먹을 수 있겠어.”
사단장은 대찬이 생각했던 빌어먹을 속물까진 아니었다.
서청수가 넌지시 권한 일이었다.
주제에 맞지 않는 이득을 권해 보라, 그리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려 달라.
사단장은 그의 말을 그대로 이행했다.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내무반으로 돌아가는 대찬은 이런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다만, 불안감은 며칠 후 말끔히 씻겼다.
“표창장. 병장 조대찬. 위 사람은 원활한 민사 작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실천하였으므로 이에 표창함. 2004년 9월 14일, 사단장 대독.”
사단장은 대찬을 포함한 맥주 율동단에게 사단장 표창을 내렸다.
이것으로써 적어도 사단장이 뒤끝은 없는 인물이라고, 대찬은 그렇게 여기며 안심했다.
사단장 표창 정도는 자신의 적극성과 수고에 대한 온당한 포상이라고 대찬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아무런 부담 없이 표창을 받았다.
표창과는 별도로, 건장한 군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율동 작전은 대찬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율동을 추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아르빌의 아이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찬 가까이로 다가왔다.
어눌한 발음으로 동요를 따라하면서 춤을 췄다.
대찬은 그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노래가 끝나고서는 쪼그려 앉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캐가 한여름의 서리처럼 흩날렸다.
“앗 쌀람 알라이쿰.”
대찬은 아이들의 한국어 발음만큼이나 어눌한 아랍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대찬의 어설픈 발음을 흉내 냈다.
그러고는 일제히 대찬의 인사에 화답했다.
“와 알레쿰 살람!”
아이들의 맑은 눈과 대찬의 시선이 맞았다.
그것으로 땡볕의 율동에 대한 보상이 차고 넘치게 이뤄지는 듯했다.
알량한 표창보다 그것이 더 대찬의 마음에 기꺼웠다.
그렇게 4개월간의 민사 작전 후, 대찬은 전역했다.
아르빌의 전우들과는 사회에서 만나 합법적인 맥주 파티를 열기로 약속했다.
“하…….”
대찬은 부대 정문을 나섰다.
한 걸음만 밖으로 나왔는데도 공기가 다른 듯했다.
2년간 갑갑하게 조여 오던 공기가 통쾌하고 시원했다.
대찬은 뒤돌아보며 부대 정문을 바라봤다.
한숨과 웃음이 섞여 나왔다.
“길었다.”
그렇게 간단한 소회를 밝히고 그는 부대를 떠났다.
대찬은 입대 기념 술자리는 갖지 않았지만 전역 기념 술자리에는 기꺼이 나섰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했던 최재한과 묶어 에피니키온 사람들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조대찬, 최재한의 사회 적응을 위하여!”
“위하여!”
김산하가 선창하자 자리에 모인 에피니키온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후창했다.
대찬도 시시하게 웃으면서 꿀꺽꿀꺽 맥주를 넘겼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대찬이 2년간 자리를 비운 사이, 에피니키온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대학의 강산은 2년이면 충분했다.
군대에서의 일병처럼 한창 열심히 일을 도맡던 2학년 김산하는 이제 4학년의 왕언니가 되어 있었다.
에피니키온에 돌아와 보니 벌써 대찬의 밑으로도 후배들이 두 기수나 있었다.
물론 마강국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마강국이 대찬의 옆자리를 기세등등하게 꿰차고 있으니, 예전에 물렁하던 신입생 대찬이 이제는 무슨 암흑가의 보스 같은 분위기마저 풍길 지경이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김산하는 대찬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전역하자마자 구를 준비 해. 너 엄청 바쁠 거야.”
“아, 누나, 저 어제 전역했어요. 벌써부터 무슨 일 얘기야.”
“너 때문에 웜샤인하고 협업이 말도 안 되게 커졌잖아. 책임져.”
“잘된 거잖아요? 누가 보면 사고 친 줄 알겠네.”
“아, 몰라, 몰라. 책임져.”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고 모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이거 조대찬이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니냐? 그래, 안 그래?”
왕언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산하는 분위기를 몰아갔다.
“이번에 회장 조대찬으로 가자.”
“에?”
“빼도 박도 못하게 일만 죽어라 시켜야지.”
김산하는 숨 쉴 틈도 없이 몰아갔다.
“조대찬 회장 어때? 다들 동의하지?”
거기에 서원웅이 나팔을 불었다.
저 소심하고 목소리 작은 녀석이 웬일로.
“대찬이 말고 누가 회장을 하겠어요? 갓 군대 제대하고 한창 열정 넘칠 때지, 협업에 대해서 가장 잘 알지, 신망 두텁지. 전 찬성이에요.”
마강국도 나섰다.
“저희 기수에서도 대찬이에 대한 기대가 커요. 제가 약을 다 팔아 놨거든요.”
‘쟤들이 왜 이래…….’
대찬은 얼떨떨했다.
저렇게 손발이 착착 맞는 걸 보니 사전에 김산하에게 매수된 게 분명했다.
김산하가 대찬의 허리를 쿡 찔렀다.
“봤지? 너 빼도 박도 못하게 회장이야.”
“나한테 왜이래요, 진짜.”
“닥쳐요, 회장님.”
김산하는 그렇게 세몰이에 들어갔다.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부원들만큼은 딴소리를 할 수 없는 판이었다.
족히 30명은 되었으니 많은 숫자였다.
대찬은 김산하와 둘이 담배를 피우러 나와서 물었다.
“무슨 꿍꿍이에요?”
“꿍꿍이는 무슨.”
“나 말고도 회장 할 사람 널렸잖아요.”
“안 널렸어.”
김산하는 푸우, 연기를 뿜으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오늘 모인 애들, 전부 필래 장학생들이야.”
“아?”
“월짝회에서도 후보 낼 거야. 쪽수는 저쪽이 더 많아. 무색무취인 애들 표를 얼마나 끌어오느냐가 관건이야. 네가 제일 경쟁력 있어.”
“누나, 지금 엄청 정치인 같네요.”
김산하는 피식 웃었다.
“서청수 회장님께서도 직접 언급하신 부분이니까 거역할 생각은 말아.”
“에? 서 회장님이요?”
“그래. 널 좋게 보시던데. 장학생하고 모인 자리에서 그러셨어. 너는 군대에서도 무슨 약을 팔았길래 군대 가서도 회장님이 네 얘길 하시냐.”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그제야 사단장과의 독대가 무슨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테스트였구나.’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서청수가 왜 그렇듯 자신에게 목을 매다느냔 것이었다.
직접 사단장을 구워삶아 그를 시험할 정도로, 또 말 한 마디뿐이라지만 굳이 에피니키온의 차기 회장으로 그의 등을 밀어줄 정도로.
대찬은 김산하에게 파편적인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슬그머니 그를 바라봤다.
김산하는 대찬의 생각을 빤히 내다봤다.
대찬이 물어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나는 아는 거 없으니까 취재할 생각 마. 그냥 시류에 몸을 맡겨.”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렇게 무식하게 몰아붙였단 말이에요?”
대찬이 따지고 들자 김산하는 그의 이마에 주먹을 갖다 대고 퉁을 놨다.
“이게 누나한테 말버릇이 뭐야?”
김산하는 그렇게 어물거리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밖에 서서 찬 공기를 한참 맞은 후에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대찬이 에피니키온의 회장이 되었다.
월짝회에서는 대찬을 꺾으려고 나름 인망 있는 고학번을 내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찬은 에피니키온의 체질을 바꾼 장본인이었다.
과거의 에피니키온은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여의도 광장의 비둘기였다.
선배가 뿌려 주는 콩고물만 탐하며 뒤룩뒤룩 살이 쪄 가던 차였다.
대찬은 이런 에피니키온이 스스로 먹이를 찾도록 만들었다.
성과가 엉망이었다면 역적으로 몰렸을 거다.
하지만 성과가 훌륭했다.
기존의 이익을 지키면서 체질을 바꿔 냈다.
지금의 에피니키온 내에서 대찬보다 인망 높은 인원은 없었다.
“잘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짧게 소감을 말했다.
월짝회 회원들 중 미숙한 이들은 낯빛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
대찬의 득세는 그들의 자존심을 구기고 현실적인 불이익마저 안겨 줄 판이었다.
지금까지 월짝회의 졸업생들은 월짝회의 번성에 얼마나 기여했느냐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그 평가는 그들이 졸업할 때 선배들이 내리는 혜택을 결정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월짝회의 입지가 줄어든다면 나중에 정말 국물도 없을지 모른다.
-2005년 월짝회 춘계 총회
서울 시내 한 호텔의 레스토랑에 현수막이 붙었다.
새봄을 맞아 월짝회 1기부터 28기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역시나 상석에는 안두홍이 앉았다.
재학생 중 학번이 가장 높은 이가 그의 옆에 앉았다.
이름이 백지훈이었다.
안두홍은 곁눈으로 그를 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개판을 쳐 놨다더군.”
“…죄송합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시시콜콜 젖내 나는 판에 끼어들어야 해? 너무하지 않아?”
백지훈의 목소리는 더욱 착잡해졌다.
“면목이 없습니다.”
“조대찬이라는 꼬맹이 하나한테 손도 못 쓰고 당했다며.”
“여간내기가 아닙니다.”
“한심하기는.”
안두홍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격조 꽤나 따질 법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담배를 무는데도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에피니키온은 월짝회 인맥의 산실이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작품이야.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는 건 참을 수가 없어.”
“잘 지켜 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안두홍은 백지훈을 흘긋 바라봤다.
그 잠깐의 시선만으로도 백지훈은 중압감을 느꼈다.
“조대찬이는 서청수가 따로 각별하게 챙기는 거 같더군.”
“필래 서청수 회장 말씀입니까?”
“그래.”
“서 회장이 굳이 그럴 이유가…….”
안두홍은 엷은 웃음을 지었다.
“서원웅. 자기 자식을 필래에 입사시킬 때 도련님 모실 방자로 선택한 모양이야.”
“으음…….”
“그런데 이제 보니 방자가 도련님보다 나은 듯싶구먼.”
“이대로 가다간 이름만 에피니키온이고, 알맹이는 필래장학회가 될 판입니다.”
“짜증나는 일이야.”
안두홍은 필터까지 피운 담배를 다 먹은 아뮤즈부쉬 그릇에 비벼 껐다.
서빙하는 직원은 프로답게 담배꽁초가 올라간 그릇을 아무렇지 않게 치웠다.
대찬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권위는 에피니키온 내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층 더 바쁘게 뛰었다.
권위가 더해질수록 책임도 더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포에 위치한 웜샤인 사무실과 구로구 변두리의 수영실업 공장을 하루에 모두 다녀오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학점에도 소홀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독서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덕분에 대찬이 회장이 된 이후로 협업은 순풍을 맞았다.
그리고 월짝회가 완전히 찌그러진 덕분에 수면 위로 올라오는 대립도 적어졌다.
회식을 마치고 각자 갈 길을 가는데 김산하가 대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성군이십니다, 성군이에요.”
“지금 비꽈요?”
“아니, 진짠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다른 애들도 너만 한 회장이 없었다더라.”
“다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요.”
“네가 노력한 결과지, 뭐.”
“다음 달에 밀레니엄 키즈의 날 행사도 차질 없이 준비해야겠어요. 아무래도 이 동아리는 선배님들 그림자로 유지되니까.”
밀레니엄 키즈의 날은 에피니키온에서 가장 성대한 행사가 열리는 기념일이었다.
까마득한 선배들부터 신입생까지 모두 참석한다.
넓은 홀을 대관하고 좋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는 데 상당한 재원이 들었다.
이런 행사를 얼마나 잘 치르느냐의 여부가 그해 에피니키온 회장의 평가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러니 대찬 역시 밀레니엄 키즈의 날 행사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행사 생각만 하면 표정이 밝게 지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