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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0화 (39/556)

난 할 수 있어 40화

“이기면 되잖아?”

“그, 그러면 되긴 하지만.”

대찬은 걱정 말라는 듯, 여전히 걱정하는 사병의 어깨를 두드리고 미군들을 바라봤다.

“지금 바로 하지?”

“뭐? 완전히 땀범벅이야. 샤워라도 먼저 해.”

“원래 맥주는 더워 죽겠을 때 마셔야 되는 거야.”

대찬의 말에 미군들은 시시덕거렸다.

“이긴 쪽만 말이지.”

“물론이지.”

대찬의 자신감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의 전우들은 불안하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은 곧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미군은 비디오 게임이 마련된 곳으로 대찬 일행을 인도했다.

그곳에서 농구 게임을 했다.

미국 NBA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었다.

화면 앞에 앉은 두 남자는 최고조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무서운 속도로 패드를 눌렀다.

그들의 조종에 화면 안의 농구 선수들은 사방팔방으로 분주했다.

“팀 던컨, 팀 던컨, 팀 던컨!”

대찬은 마치 주술을 외듯 농구 선수의 이름을 불렀다.

데이터 조각에 지나지 않는 화면 속의 농구 선수는, 대찬이 이름을 부를수록 힘을 얻는지 종횡무진 코트를 누볐다.

대찬의 뒤에 선 사병들이 일제히 외쳤다.

“3점 슈우우우웃!”

그 순간 팀 던컨의 손에서 농구공이 떠나 포물선을 그렸다.

그건 정확히 골망을 흔들었다.

그러자 대찬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리 없는 포효를 질렀다.

한국군은 독립이라도 쟁취한 양 일제히 주먹을 하늘 위로 뻗었다.

“팀 던컨!”

한국적인 정직한 발음이 다시 한 번 팀 던컨을 불렀다.

최종 스코어 95 대 53.

완벽한 승리였다.

“Fuck it!”

대찬에게 완패를 당한 미군은 거친 발음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패드를 집어 던졌다.

대찬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당당히 요구했다.

“맥주 내놔.”

“젠장! 다시 해!”

103 대 42.

대찬은 군말 없이 재도전에 응했고, 결과는 더 처참했다.

미군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국군에게 맥주를 넘겼다.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철수하는 그들 선배들의 표정이 그것보단 나았을 터였다.

“조 병장님, 대단하십니다!”

대찬의 전우들이 그를 한껏 추켜세웠지만 대찬은 싱겁게 반응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 사람이 게임으로 지면 안 되지.”

그는 빚을 받아 내듯 당당히 미군으로부터 맥주를 쟁취해 냈다.

아이스박스에 고이 모셔졌던 버드와이저였다.

붉은 캔에 찬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절로 침이 넘어갔다.

맥주를 쥐니 손이 시렸다.

그걸 손에 쥐고도 몇몇 사병은 우려를 표했다.

“근데 이거 함부로 먹어도 됩니까? 걸리면 어떡하지…….”

대찬은 그런 흰소리는 들은 체도 않고 캔을 땄다.

추왁, 하며 살짝 거품이 올라왔다.

그 소리에 다른 사병들도 더는 참지 못했다.

목을 뒤로 젖히고 맥주를 들이켰다.

더위에 허덕이고 갈증에 메마른 목젖에 차가운 맥주가 끼얹어졌다.

“크으……!”

대찬은 절로 눈을 감고 맥주의 냉기와 풍미를 느꼈다.

온몸을 끈적끈적하게 적신 땀이 단숨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고소하고 씁쓸한 맛이 혀끝에 맺혔다.

“푸하, 살겠다.”

대찬은 짧은 감상을 내놓고 다시 꿀꺽꿀꺽 맥주를 마셨다.

그 모습에 미군들도 군침을 꼴깍 삼켰다.

한국군은 일거에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다 먹고 나니 겁쟁이의 흰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술 먹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산통 깨는 소리에 대찬이 따갑게 쏴붙였다.

“이미 먹었잖아. 어쩔 거야.”

평소 일탈을 즐기지 않는 대찬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과감히 사소한 범법을 저질렀다.

남에게 피해도 되지 않거니와 이런 범법에 대한 은밀한 공유는 전우애를 북돋는 법이었다.

“땡큐. 잘 먹었어.”

대찬은 웃으면서 미군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기는 내기였지만 고마운 것도 고마운 것이었다.

대찬은 보급품으로 받은 봉지 라면을 그들에게 보답으로 내주었다.

맥주의 차가운 기운이 여전히 창자에 머무르도록 둔 채로 대찬과 일행은 내무반으로 복귀했다.

돌아가는 길에 개중 하나가 대찬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졌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질 수가 없지.”

대찬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팀 던컨이 있으니까! 예에.”

사병들은 킥킥거리면서도 다시 물었다.

“진짜 만약, 만약에 졌으면 어쩌실 생각이셨습니까?”

“어쩌긴, 배 째라고 해야지.”

대찬은 간단히 대답하고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맥주로 하나가 된 그들은 그다음 날, 이라크 아르빌의 주둔지로 보내졌다.

여전히 맥주의 냉기가 창자에 머무르는 탓인지, 긴장되는 와중에도 웃음이 삐져나왔다.

비행을 저지른 사람들만 공유하는 웃음이었다.

아르빌에 와서 본격적인 임무에 투입되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는 실제 상황이었다.

그들은 엄정한 군기를 요구받았다.

대찬은 그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다.

일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이 터졌다.

“어젯밤에 미군 부대에 테러가 일어났다. 하나가 죽고 셋이 다쳤다.”

중대장은 뻣뻣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향해 브리핑했다.

“범인은 아이들이었다. 어린애들이 웃으면서 미군에게 건네준 물병이 폭발했다. 언제든지 우리한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씁쓸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미군은 경고에 응하지 않는 현지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력으로 다스린다고 했다.

전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대찬이 속한 특공대는 민사 작전을 맡았다.

이라크 현지 주민들과 좋든 싫든 마주해야만 했다.

그 순진한 얼굴, 얼굴마다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조기에 파악해야 했다.

선량한 시민이라면 보호하고, 선량한 시민의 탈을 쓴 테러리스트라면 폭력으로 예방해야만 했다.

“총기의 사용은 극도로 자제해라. 총 끝 한번 잘못 놀리면 한국은 이라크 원수가 된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손톱 끝도 잘못 놀리지 마라. 여기 여인네한테 추파 던졌다가는 내 손으로 친히 부러뜨려 주마.”

살벌한 농담에 병사들은 마른 웃음으로 화답했다.

“감정을 가지지 마라. 사단칠정 다 버리고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 침착하게. 여긴 전장이야. 알았나!”

“옛.”

“목소리 그거밖에 안 나오나! 알았나!”

“예엣!”

대찬도 시원하게 대답은 했지만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중대장의 말은 합리적이었지만 확실한 방법은 아니었다.

민사작전의 특성상 주민들의 호감을 사는 건 중요했다.

그래야만 원만한 작전이 가능했다.

중대장의 방법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데는 적합했지만, 원만한 작전을 위해서는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대찬은 생각했다.

“그래봤자 병사 주제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 뭐…….”

대찬은 쓰게 웃었다.

플라톤은, 인간은 머리와 가슴과 배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국가는 통치자와 무사와 생산자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마 이런 식의 논리로 군대를 말하자면 군대는 장교와 부사관과 사병으로 이뤄진다.

플라톤은, 인간의 배는 곧 국가의 생산자라고 했다.

배는 욕망을 상징하며, 절제를 미덕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배, 국가의 생산자는 곧 군대의 사병이니, 사병은 항상 욕망하는 존재이며 반드시 절제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 절제란 대부분의 경우 옳지만, 시시때때로는 부당하다.

군대에서는 그 입 다물라는 말로 사병에게 절제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대찬은 생각이 있어도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끼리 조를 지어 순찰을 돌았다.

맥주의 추억을 자본으로 친분을 쌓아 가는 사병들이 대찬과 한 조가 되었다.

혹여 주민들 사이에 반군이 섞여 있을까.

혹여 무기를 숨겨 놓고 무슨 꿍꿍이를 획책하는 건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이 대찬의 주된 업무였다.

순박한 얼굴을 순박하지 않다고 가정해야 하는 일은 힘겨웠다.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아이, 먹을 것을 주려고 하는 어른들을 외면해야 했다.

아이든 어른이든 외면당했을 때의 표정은 모두 비슷했다.

맥주 마신 걸 걸리면 어떡하냐며 호들갑을 떨었던 소심쟁이가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대찬 병장님.”

“왜.”

“우리가 꼭 죄 짓는 기분이지 않습니까?”

맥주를 걱정할 때처럼 쏘아붙여야 정상이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냐, 다 저 사람들을 위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쏘아붙여야 했다.

그러나 대찬은 입술을 한 번 붙였다 뗄 뿐,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짧게 대답했다.

“그런 것도 같네.”

대찬은 주민들과 군인들 사이에 유리 장벽이 세워진 듯한 기분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오늘 사단장님 간담회 있으니까 군기에 더 신경 쓰도록!”

중대장이 아침부터 신신당부를 했다.

사단장은 이라크에 파병된 부대에서 가장 지체 높았다.

중대장이 저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게 이해됐다.

중대장이 승냥이라면, 사단장은 호랑이였다.

물론 사슴에 불과한 병사들은 굳이 중대장의 당부가 없더라도 일동 얼음이었다.

“아이, 편하게들 두라니까 왜들 이래.”

사단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군기가 바짝 든 모습에 흡족했다.

그래도 병사들이 소위 똥별이라 부르며 경멸해 마지않는 여타 장성들보다 사단장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간담회랍시고 제 할 말만 늘어놓는 이들에 비해, 사단장은 병사들의 고충을 십분 청취하려고 했다.

바람직한 자세였다.

그러나 사단장이 아무리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계급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압박이 병사들의 입술을 꾹 다물게 했다.

“다들 그렇게 딱딱하게만 있지 말고 얘길 해 봐. 괜히 나중에 일 생긴 다음에 투덜거리지 말고.”

사단장의 말은 옳았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보다 미리 말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의 복무 시절, 그의 동료가 사단장과의 간담회에서 야외 숙영에서 온수를 쓰게 해 달라고 했다가 왕따 신세가 되었던 일을 상기했다.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 안 좋은 의미로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군대에서는 허다했다.

그걸 아는 병사들은 달변이 은이라면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을 철칙으로 지키고 있었다.

“에헤이, 이러면 곤란한데…….”

사단장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차자, 그의 뒤에 선 중대장이 병사들을 향해 눈빛을 쐈다.

침묵이 금이라지만 집단적인 침묵은 이 상황에선 좋지 않았다.

그때 대찬이 번쩍 손을 들었다.

“병장 조대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역시 병장은 병장이군.”

사단장이 반색하자 중대장도 슬쩍 대찬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대찬도 살짝 눈짓을 보냈다.

“그래, 할 말이 뭔가?”

“주민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주민들과의 관계?”

사단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민원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간식을 더 줬으면 좋겠다, 잠자리가 불편하다 등.

그런데 뜬금없이 주민과의 관계를 들먹이니 사단장은 큰 눈을 껌뻑거렸다.

대찬은 꿋꿋이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짧은 생각이지만, 혹시 작전에 보탬이 될까 싶어 용기를 냈습니다.”

“좋은지 나쁜지는 듣고 사단장이 판단하도록 하지. 좋은 용기네. 말해 봐.”

“민사 작전 중에는 매우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도록 돼 있습니다. 혹여 있을지 모르는 테러 등 불상사를 막기 위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주민들과의 접촉을 아예 차단해 버리면 작전에 차질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사단장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차질이라니?”

“민사 작전의 핵심은 주민들과의 유대 관계에 있습니다. 지금의 방법으로는 주민들의 경계심이나 적개심을 부추길 염려가 있습니다.”

그 말에 중대장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지금 윗선에서 내려온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물론 건강한 조직은 아랫사람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대한민국 군대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단장의 표정은 다소 불편해 보였다.

“으음, 계속해 보게.”

“물론 아군의 안전과 철통같은 경계가 우선입니다. 주민들과의 유대는 명백히 후순위입니다.”

“그렇지.”

“안전과 경계를 지키면서도 유대를 쌓을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 말에 사단장은 흥미가 동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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