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9화
30분 못 되게 달려 1만 5천 원을 냈다.
다시 따지니 돌아갈 때 손님을 못 태우니 왕복 요금으로 받는 게 관례라고 했다.
물정 모르는 김산하는 더 따질 말이 궁해졌다.
“에이씨…….”
어쨌든 부대 앞에 무사히 도착한 김산하는 입이 댓 발 나와서 부대 정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위병소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구면이었다.
“어, 어어……?”
“어?”
김산하를 본 쪽도 그를 아는 눈치였다.
“언니! 저 아시죠?”
“어? 어…… 조대찬 입대할 때 봤지.”
마강설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의 조우에 김산하는 당황했다.
마강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둘 중 먼저 여유를 찾은 건 마강설 쪽이었다.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김산하에게 물었다.
“언니도 대찬 오빠 면회 왔어요?”
“…어.”
김산하는 묘한 열패감이 들었다.
마강설은 짧게 한숨을 쉬고 김산하를 향해 걸어갔다.
“헛걸음이에요.”
“뭐?”
그 말이 김산하의 귀에 다소 도전적으로 들렸다.
헛걸음이라니.
마강설 자신이 먼저 도착했으니 자기가 이겼다는 건가?
속에서 부아가 나 한바탕 쏘아붙이려는 찰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마강설이 급히 해명했다.
“그런 게 아니고요, 대찬 오빠 지금 여기 없대요.”
“없다니?”
“언니도 모르고 계셨나 봐요.”
그러니까 뭘?
김산하는 침묵으로 마강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빠, 이제 이 부대에 안 계시대요.”
마강설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이라크 갔대요.”
“뭐? 이라크?”
“가족들한테만 말하고 조용히 갔나 봐요. 방금 전화해 보니까 저희 오빠도 모르고 있던 걸요.”
“가, 갑자기 이라크는 왜 간 거야?”
마강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허.”
김산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깜짝 면회를 온답시고 주말을 온전히 쏟아 이 강원도 산골까지 왔다.
그런데 어딜 가?
“이라크? 참 나.”
김산하는 어이가 없어서 연신 웃었다.
어이없기는 마강설도 매한가지여서 그녀도 김산하를 보며 웃었다.
“완전 제멋대로죠.”
“조대찬 똘끼는 진즉 알아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마강설은 김산하의 품에 안긴 보온 도시락을 슬쩍 보고 물었다.
“언니는 뭐 싸 왔어요? 저는 집에서 볶음밥이랑 닭 튀겨서 가져왔는데.”
“나? 나는 그냥 김밥. 터미널에서 도너츠 팔길래 그것 좀 사고.”
“와, 맛있겠다. 언니, 그럼 저랑 나눠 먹을래요?”
김산하는 ‘내가 이걸 너랑 왜 먹어?’ 하고 싸늘하게 받아치려다가 관뒀다.
피차 같은 처지였다.
김산하는 졸지에 강원도 모처에서 마강설과 함께 서로 만든 음식을 나눠 먹었다.
대찬을 향한 살벌한 뒷담화는 덤이었다.
마강설은 김산하가 만든 김밥을 연신 맛있다고 칭찬하면서 뒷담화의 범위를 넓혔다.
“저희 오빠는 학교에서 잘 지내요? 그 성질머리 어디 안 갔을 텐데.”
“마강국? 장난 아니지. 괜히 조대찬 짝지가 아니야.”
고원대 체육학과에 합격한 마강국은 에피니키온의 26기 신입부원으로 선발되었다.
기실 극심한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에피니키온과 마강국은 그렇게 궁합이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찬의 강력한 주장이 먹혔다.
대찬은 에피니키온의 유구한 전통에 비하자면 여전히 말단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단답지 않은 발언권이 있었다.
스스로 해낸 공로도 적지 않았다.
또, 요직을 꿰찬 민승기와 김산하를 움직일 수 있는 친분이 있었다.
대찬이 굳이 고집을 피워서 마강국을 에피니키온에 들인 이유는 분명했다.
우선 자기 사람이 필요했다.
대찬은 언제까지고 에피니키온의 막내가 아니었다.
이번에 서청수가 안두홍에게 밀리는 것을 보듯, 강한 자도 더 강한 자에게 밀리는 것이 생리였다.
비단 에피니키온만의 일이 아닌 조직의 생리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뿌리 얕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법이다.
대찬 역시 에피니키온 내부에서 자신의 지분을 점차적으로 늘려 갈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대찬의 뿌리가 될 터였다.
특히 마강국은 그만의 가치가 있었다.
가갸거겨 말 잘하는 녀석들은 에피니키온에 지천이었다.
하지만 마강국처럼 압도적인 신체 조건을 지닌 부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깡패 두목 노릇을 하자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눈이 달린 이상 눈앞의 거구에 위축이 되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군대에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에피니키온과의 인연을 유지하고 그때그때 소식을 전해 받을 수 있었으니, 마강국의 가치는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강국을 도구로 소모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에피니키온에 들인 것은 아니었다.
마강국이 인생의 활로를 어떻게 개척하든 에피니키온의 깊고 넓은 인맥은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마강국 역시 그런 판단이 있기에 대찬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여 에피니키온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김산하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김산하는 마강설이 만들어 온 볶음밥을 축내면서 말했다.
“그래도 마강국이 있어서 좋은 것도 있어.”
“뭔데요?”
“회장인 민승기도 군대 갔고, 조대찬 단짝 최재한이도 군대에 있거든. 아무래도 입지가 좀 그런 차였는데 걔가 있어서 그래도 힘이 좀 난달까.”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아, 근데 진짜 너무하네.”
“…네? 뭐가요?”
마강국이야 어떻든 김산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이미 대찬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조대찬 말이야. 어떻게 말도 없이 이라크를 가? 여자 둘을 이렇게 생고생을 시키고 말이야!”
“그건 백 프로 동감해요. 너무해!”
물과 기름처럼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김산하와 마강설이었다.
그건 순전히 대찬 때문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대찬 덕분에 둘이 의기투합했다.
실컷 대찬을 씹고 뜯던 김산하는 갑자기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우며 중얼거렸다.
“위험할 텐데 거긴 왜 가. 걱정되게.”
“…그러게요.”
마강설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대찬이 위험을 무릅쓰고, 두 여자의 걱정을 안고도 이라크행을 선택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건 사명감의 발로이면서 개인의 명예와 이득을 위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꽃다운 2년을 군복에 갇혀서 보낸다.
대부분의 그들은 ‘시간아, 빨리 가라!’만 외친다.
군대에서는 요구받는 것은 많되, 요구할 수 있는 건 적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대찬은 조금이라도 이 천금 같은 시간에서 가치를 얻고 싶었다.
시간에 있어서 대찬은 수전노와 다름없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건 역시 두 번째 삶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삶에서 죽어라 ‘시간아, 빨리 가라!’를 외쳤다.
그렇다고 빨리 가지 않는단 걸 몸으로 깨달았다.
이번에는 아예 할 수 있는 모든 걸 쥐어짜 볼 요량이었다.
해외 파병은 일개 사병의 신분으로 사회에 최대한으로 이바지하고, 개인의 명예를 도모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이력서에 어떻게든 한 줄 욱여넣자고 죽을힘을 다하는 세상에서 해외 파병은 대찬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의 기억으로는 이라크에 파병된 장병 중에 사상자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렇잖아도 말 많고 탈 많던 이라크 파병 문제가 더 시끄러웠을 거다.
물론 두 번째 삶이 첫 번째 삶의 궤적과 다르긴 하지만, 대찬은 그 희박한 확률에 좋은 기회를 날리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제복에 갇힌 2년을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쓰고 싶다는 알량한 사명감도 발동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자신이 희망 비스무리한 걸 조금이라도 쥐여 줄 수 있을까 싶은 사명감.
월 217만 원에 달하는 고액의 수당은 덤이었다.
다만,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파병에 대해 워낙 찬반이 뚜렷이 갈려 예상보다 파병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2004년 9월.
2003년 1월에 입대한 대찬이었으니 이제 제대를 불과 4개월 앞두고 있던 때였다.
자대에 남았다면 무수한 후임을 거느리고 영감 노릇을 했을 터.
조금만 일렀으면 금상첨화였겠다.
쿠웨이트.
캠프 버지니아 미군 기지.
대찬은 강원도의 늦더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오로지 메마른 모래바람만 휘날리는 곳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두 여자가 볶음밥과 김밥을 먹으면서 자신을 향해 매서운 힐난을 쏟아 내는 걸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야말로 열사의 땅이었다.
9월에도 한낮 기온이 40도를 넘나들었다.
“헤이, 초! 뭐 하고 있어?”
대찬을 부르는 말은 영어였다.
듬직한 덩치의 미군 흑인 병사가 해맑게 웃으면서 대찬을 불렀다.
대찬은 함께 이라크로 온 병사들과 점심을 먹고 기지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대찬도 세련되지는 않지만 당당한 영어로 응대했다.
“어, 그냥 쉬고 있었는데.”
“농구 한 판 안 할래?”
“농구? 더운데…….”
대찬이 미적거리면서 같이 파견 온 병사들을 바라보니 그들도 미온적이었다.
그러자 미군은 먹음직한 미끼를 준비했다.
“우리랑 농구 해 주면 이따 비디오 게임 시켜 줄게.”
“지금 나가면 되지?”
대찬의 전향적인 태도에 미군은 낄낄 웃으며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찬은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식이었다.
대찬은 다국적군과 함께 미군 캠프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게 한 지 한참이었는데, 한 번에 병력을 다 이동시킬 수 없어서 순번이 뒤로 밀린 경우에는 몇 주씩 대기하는 일도 있었다.
대찬이 소속된 특전사는 숙련된 부사관을 먼저 파견하느라 사병들은 꽤 긴 시간을 대기해야만 했다.
대찬도 그중 하나였다.
이라크에 오기 전까지 잔뜩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김산하와 마강설이 해 주는 근심 걱정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대찬과 사병들은 머릿수를 맞춰 미군 사병들과 농구 한 판을 뛰었다.
작열하는 태양에다가 흙바닥에서 뿜어지는 지열 때문에 피부가 익을 지경이었다.
땀이 줄줄 흘러 금세 목이 탔다.
환경도 환경이거니와 머리 하나가 더 큰 미군들을 상대하니 체력 소모는 더 극심했다.
특히 타고난 신체 조건이 월등하고, 아마 여가 시간마다 농구를 즐겼을 흑인 병사들을 상대로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다고 자부하는 대찬도 금세 나가떨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널브러진 한국군을 보고 미군들이 수군거리며 웃었다.
“한국군 운동 센스가 좋다고 하던데 거짓말이었나 봐.”
“한국 사람들 운동 안 하고 매일 공부만 하니까 저렇게 약골이 되지.”
그들의 말이 은근히 성질을 건드렸다.
하지만 대찬을 포함한 한국 병사들은 쓴 침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저 괴물들을 농구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이미 대찬을 포함한 사병들은 지독한 더위와 목마름에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해지는 참이었다.
“헤이, 그렇게 약해 빠져서 총이나 들겠어?”
그 말에 대찬은 싱글벙글 웃는 미군을 올려다봤다.
“좋아, 우리가 졌어.”
“뭐야, 그렇게 싱겁게 인정할 거야? 재미없게. 한국 사람들은 승부욕이 없나?”
대찬은 웃으면서 일어났다.
“농구는 졌지만, 다른 건 우리가 너희를 가볍게 이길걸.”
“다른 거라니?”
“비디오 게임 시켜 준다며. 그건 우리가 이겨.”
대찬이 퍽 도발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미군들은 일제히 헹, 코웃음을 쳤다.
“한국 사람들 이제 보니 입만 살았네. 농구하는 거 보니 게임도 못하겠던데.”
“그래? 그럼 내기할래?”
“뭐? 우린 이미 농구 이겼는데 뭐 하러 내기를 해?”
“너희가 이길 거 같다며. 왜, 무서워?”
그 말에 미군의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
“무섭긴. 너희 땅콩들쯤은 한 손으로 해도 이겨. 좋아. 하자고, 내기.”
대찬은 픽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지는 쪽이 맥주 선물하기로 하자.”
“맥주? 좋아!”
미군들은 흔쾌히 대찬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정작 대찬과 같은 한국 사병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들은 이미 병장 계급장을 단 대찬을 존대했다.
“조 병장님, 우리가 맥주를 어떻게 줍니까?”
국내의 자대에서도 엄두 못 낼 술을 더욱 삼엄한 군기가 요구되는 해외에서 제공될 리 없었다.
미군들은 한국과 달리 직업군인들이라 자주 외출했다.
자율적으로 음주도 즐길 수 있었다.
이에 대찬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