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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8화 (37/556)

난 할 수 있어 38화

저쪽에서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와! 하마터면 못 보고 들어가는 줄 알았네.”

마강국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강설이 서 있었다.

이제 아주 애티를 벗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대찬은 반가움이 앞서면서도, 자신의 궁색한 처지가 떠올라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면서 짧은 머리를 가린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오빠, 오랜만이에요.”

“그렇네. 오랜만이다, 강설아.”

“오랜만에 보는데 왜 그렇게 모자로 얼굴을 가려요.”

그러자 대찬은 수줍게 웃었다.

“완전 엉망이잖아, 지금.”

“에이, 엉망은 무슨.”

마강설은 그렇게 말하며 대찬이 쓴 모자를 훌러덩 벗겨 버렸다.

대찬이 살짝 얼굴을 붉히자, 마강설은 아예 대찬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려요. 뭘 자꾸 그렇게 부끄러워해.”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대찬은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그러자 뒤로 물러선 김산하가 묘한 경계심을 드러내며 최재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쟤 누구야?”

“마강설이라고, 저희 친한 친구 여동생이에요.”

김산하는 눈빛을 벼리며 숙덕거렸다.

“쟤 조대찬 좋아하지?”

그러자 최재한은 살짝 입을 벌리며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놓고 그러진 않는데, 저랑 같이 있으면 차별 대우 하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니까요.”

“저 여우같은 것. 끼 부리는 거 봐. 은근슬쩍 반말하고.”

김산하는 경계심을 드러내면서도 인정할 건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예쁘긴 더럽게 예쁘네.”

그런 숙덕공론을 듣지 못하는 대찬은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마강국에게 물었다.

“학교는, 붙었어?”

“어떨 거 같아?”

다시 수능에 도전했던 마강국이었다.

대찬은 그가 기초가 부족하긴 해도 공부에 열심히 매달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결과를 기대하던 차였다.

“은근히 웃는 거 보니까 붙었구나.”

마강국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면서 대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형님이.”

“형님이?”

“고원대 체육학과에 당당히 붙었다, 이거야.”

“오!”

대찬은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간의 노력을 아는 까닭이었다.

대찬이 웃으면서 마강국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럼 우리 이제 동문인 건가?”

“그렇게 됐습죠, 조대찬 선배님.”

마강국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고, 대찬도 그만큼 환하게 웃었다.

“축하한다! 진짜 잘됐다.”

“다 네 덕분이야. 네가 끌어 준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에이, 노력한 건 넌데. 잘했어. 장하다.”

그러나 국가는 대찬을 마냥 기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딱딱한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장내로 퍼져 나갔다.

-지금부터 훈련소 입소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입대 장병 여러분께서는 연병장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부터 훈련소 입소식을…….

그 말에 대찬의 기분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돌아왔다.

“젠장.”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가족들, 에피니키온 사람들, 그리고 마강국 남매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갔다 올게요!”

그러고는 모자를 벗어 어머니의 손에 쥐여 준 뒤는 덤덤하게 연병장으로 걸어 나갔다.

어차피 닥친 일이다. 징징거리며 질척거리는 건 차에 실려 오면서 다 해치웠다.

이미 그는 두 번째 삶을 살아 내면서 많은 것을 바꿔 냈다.

그건 분명히 소득이었다.

“군대쯤이야 기회에 대한 세금이지 뭐.”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까까머리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모인 까까머리들의 풍경이 흡사 공동묘지 같았다.

그런 대찬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훔쳤고, 아버지도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두 번째 치르는 훈련소는 생각보다 쉬웠다.

조교들이 빽빽 지르는 고함도 두 번째 들으니 두렵기보다는 측은했다.

피차 끌려온 입장이었다.

연민마저 느껴졌다.

대찬은 능숙하게 훈련소 생활을 해냈다.

“좌향, 좌향, 좌향 앞으로 가잇!”

조교의 구령에 대찬은 척척, 제식 훈련을 소화해 냈다.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때는…….’

대찬은 엉망진창,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동기들을 보며 슬쩍 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저랬을까.’

“조정간 위치 반자동, 사격 개시!”

탕! 탕! 탕! 탕! 탕!

대찬은 정확한 자세로 총을 쐈다.

대찬의 표적지는 연근처럼 구멍이 촘촘히 모여 있었다.

특전사에서 숱하게 소화했던 사격 훈련, 그리고 잊을 만하면 1년마다 불러 연습을 시키던 예비군 훈련 덕택이었다.

사람은 본디 잘하는 것을 즐긴다.

좋아하던 것도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싫어하던 것도 재능 있음을 알면 열렬히 좋아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가 대찬에게 꼭 맞았다.

그렇다고 해도 군대란 집단은 대찬에게 그다지 달가운 틀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월히 견딜 정도는 되었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대찬은 강원도 언저리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가 다시 특전사로 선발된 건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첫 번째 삶에서 특전사로 뽑힌 건 순전히 운에 의한 것이었다.

그게 행운이든, 불운이든.

그러나 두 번째 삶에서는 운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훈련소에서의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대찬은 특전사 감이었다.

기량도 기량이지만, 그는 훈련소 동기 누구도 가지지 못한 관록이 있었다.

훈련병 나부랭이에게서 관록을 찾아볼 수 있었으니, 우스꽝스럽게 깎아 놓은 까까머리 틈바구니에서도 대찬은 빛났다.

대찬은 자대에 가서도 곧장 적응했다.

두세 살 많은 선임들은 군대가 으레 그렇듯 쓸데없는 걸로 시비를 걸고 툭하면 윽박지르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대찬은 능숙하게 받아 냈다.

그것이 그 나이 대 남자들의 일반적인 습성이란 걸 아는 까닭이었다.

또 겉으로는 차갑고 사나워도, 아랫것으로서의 확실한 복종과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면 금방 누그러진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 잘하는 후임이라는 평판이 깔려 있을 때 가능했다.

일 못하는 녀석은 어딜 가나 구박때기가 되기 일쑤였다.

대찬의 경우는 일을 못하고 싶어도 못할 수가 없었다.

병장 만기 제대를 하고 다시 이등병부터 병장까지 국방의 의무를 해내는 사람은 아마 대찬이 유일할 것이다.

행정적인 착오나 부실 복무가 적발되어 재입대하는 경우가 있다지만, 그것 역시 완전한 의미의 재입대는 아닐 터.

그렇기에 예비역 병장의 노하우와 눈치가 몸에 밴 대찬은 기시감의 연속인 두 번째 병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대찬은 금세 조직에 녹아들었다.

대찬이 염두에 둔 군대 격언은 딱 하나뿐이었다.

해도 되나 싶으면 하지 말고, 해야 되나 싶으면 해라.

이것만 준수해도 병영 생활에서 문제는 없을뿐더러 누구에게나 괜찮은 병사로 각인될 수 있었다.

그렇게 무난히 적응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2003년 3월 20일.

일과를 마치고 점호 전까지 전 부대원은 강제로 뉴스를 시청해야 했다.

편히 쉬고 싶은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나마도 팔자가 좋은 편이었다.

대찬의 부대는 이 해부터 시작된 내무반 현대화 사업의 선발 주자로 뽑혔다.

개인 침상에서 잠을 잤고, 각 생활관에는 텔레비전까지 비치되었다.

아직 이등병 딱지를 못 뗀 대찬은 각 잡힌 자세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날따라 앵커의 목소리는 다소 상기되었다.

-미국이 이라크 현지 시각 새벽 5시 35분, 공습을 개시했습니다. 공습 개시 40분 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전쟁 개시를 선언했습니다.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는 미군이 쏘아 올린 토마호크 미사일로 인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연출됐습니다.

이어지는 화면은 실제 상황이었다.

깜깜한 새벽, 적외선카메라가 바그다드를 촬영하고 있었다.

고요한 하늘을 녹색 섬광이 가르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광범위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런 비극은 똑같이 반복되는구나.’

대찬은 착잡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야, 저긴 진짜 싸우네. 우린 가면 오줌 지리겠다.”

같은 내무반의 병장은 침상에 드러누워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시시덕거렸다.

그러자 병장과 가까운 상병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

“갑자기 북한이 쳐들어와서 우리도 저렇게 되면 어떡합니까?”

“야,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어.”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는 거 아닙니까. 어떡합니까?”

병장은 큭큭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어떡하긴. 빤스만 입은 채로 토껴야지.”

“아, 김뱀 실망입니다.”

“실망은 무슨. 좀 있으면 말년인데 팔자 조질 일 있냐?”

“그건 그렇긴 한데.”

상병은 쩝, 입맛을 다시고 이번엔 대찬을 바라봤다.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었다.

“헤이, 쪼다찬.”

상병은 대찬의 이름을 그렇게 멋대로 바꿔 불렀다.

최재한이 쪼대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묘하게 속이 뒤틀렸다.

물론 내색하진 않았다.

“이병 조대찬.”

“자고 있는데 갑자기 미사일이 날아와서 내무반이 폭삭 주저앉았어. 근데 내가 막 엎어진 관물대에 깔려서 꼼짝도 못하고 막 그래. 그럼 넌 어떻게 할래?”

쓸데없는 망상을 대화거리로 삼아 그와 말을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딴청을 피우면서 묵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이등병의 숙명이었다.

“당연히 목숨 걸고 박 상병님 구해 냅니다.”

“오, 진짜?”

“진짭니다.”

대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병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만일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다면 점호 때까지 대찬을 못 살게 굴었을 거다.

“야, 저쪽에도 쪼다찬 같은 사람이 있어야 그래도 희망 비스무리한 거라도 찾지 않겠습니까? 김뱀처럼 빤스만 입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라.”

말년이 가까워졌다고 병장에 맞먹는 그였다.

그러자 병장은 픽 웃으면서 일축했다.

“새끼, 지도 똑같이 굴 거면서 까고 있네.”

“저는 아직 제대까지 까마득해서 그냥 미사일 맞아 뒤져도 별로 안 억울합니다.”

“너 같은 새끼는 한번 맞아 뒤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병장과 상병이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대찬은 묵묵히 텔레비전 화면만 바라봤다.

상병의 실없는 소리가 그의 뇌리에서 재생되었다.

‘저쪽에도 쪼다찬 같은 사람이 있어야 그래도 희망 비스무리한 거라도 찾지 않겠습니까?’

방정맞은 말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말에 어쩐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상병의 말에 대충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목숨 걸고 구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상병이 말하는 쪼다찬 같은 사람과 실제의 대찬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뉴스는 폭격당하는 바그다드를 여러 각도로 쉼 없이 내보냈다.

멀리서 찍은 영상은 피 흘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절규를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담기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터.

‘저쪽에도 누군가 있어야… 희망 비스무리한 거라도…….’

대찬의 동공에 폭격당하는 바그다드의 영상이 한동안 계속 흘렀다.

그는 그 영상을 보면서 무언가를 결심했다.

2004년 9월.

한여름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날이었다.

비도 내려 꿉꿉한 공기에 불쾌지수는 더 치솟았다.

김산하는 허름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호흡이 답답할 정도의 습기에 김산하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짜증이 번졌다.

연신 손부채질을 해 봤지만 흔드는 손목만 아팠다.

그는 반대쪽 손으로는 챙겨 온 보온 도시락을 신줏단지 모시듯 품었다.

김산하는 택시를 세우고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군부대 가요?”

“아, 화천 땅에 군부대가 한둘인 줄 알아?”

그러자 김산하는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를 보여 주었다.

“여긴데요.”

“어, 특공여단이네. 애인이 특전사야?”

“애, 애인이요?”

김산하는 그 말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애인은 아니고요. 어쨌든, 가요?”

“돈만 주면 어디든지 가지. 따블이면 38선도 넘어요.”

“그럼 가 주세요.”

택시는 미터기를 끄고 달렸다.

김산하가 항의하니 시골은 원래 그렇다는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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