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7화
안두홍이 NS 한국법인을 나와 차린 신생 업체라고 했다.
안두홍은 AKD테크를 설립하는 주역이 되었고, 실세 부회장이 되어 회사를 쥐락펴락한다.
그런 업체에 탁형원이 입사했다는 건 안두홍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서청수의 뜻을 꺾을 만한 사람은 에피니키온 내에서 몇 되지 않았다.
우선 서청수는 에피니키온 1기였다.
서열을 중요시하는 에피니키온의 특성상 후배가 그의 뜻을 꺾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같은 에피니키온 1기밖에 남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재벌 총수인 그와 맞설 정도의 인물은 더욱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을 받은 탁형원이 AKD테크에 입사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대찬은 그 몇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을 골라낼 수 있었다.
안두홍이었다.
대찬은 밥맛이 떨어졌다.
“에이.”
우동을 먹다 말고 탁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러자 같이 먹던 김산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봤다.
“맛없어?”
“갑자기 밥맛 떨어졌어요.”
“왜, 더 먹어. 오늘 일도 많이 했는데.”
대찬은 쯧,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혹시 에피니키온에도 파벌이 있어요?”
“갑자기 웬 파벌?”
안두홍이 탁형원에게 상을 준 게 단순히 자기 사람 챙기기라고 보는 건 1차원적이었다.
탁형원이 아무리 자기 사람이라지만 겨우 사회 초년생일 뿐이었다.
서청수와 척을 질 정도의 가치는 없었다.
대찬은 안두홍의 이런 행보가 서청수를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탁형원을 내세워 서청수의 패인 대찬을 물리치게 함으로써 서청수를 견제하고, 자신의 발언권을 자랑하기 위함이라고.
“뭐, 명시적으로야 당연히 없지만 물밑에서는 있지. 월짝회라고 있거든?”
“월짝회요?”
김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애주가 모임이었대. 이름도 월짝회야. 한 사람당 하루에 소주 1병씩, 그래서 한 달에 한 짝 마시는 걸 기본으로 하거든.”
“이름 한번 특이하네요.”
“1기 선배들을 비롯해서 우리 동아리에는 짱짱한 사람들 널렸잖아. 그사이에서 유독 끈끈한 유대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그 맥이 탁 선배, 유백기로 내려오고 있고.”
대찬은 잠자코 김산하의 말을 경청했다.
“이 끈끈한 유대는 나쁜 짓을 공유하면서 유지돼.”
“나쁜 짓이요?”
“응. 화장실에 숨어서 몰래 담배 피우는 학생들 봐 봐. 자기들끼리 끈끈하잖아? 함께 불법 행위를 하면서.”
대찬은 그럴듯한 비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산하는 말을 이었다.
“돈 몇 만 원 삥땅치게 하고, 그걸로 걸판지게 술 퍼마시면서 의리 따위를 다지는 거야.”
“굉장히 원시적이네요.”
“원시적이지. 그렇게 해서 안 걸리면 행운이고, 걸리면 고학번 선배들이 나서서 무마시켜. 그렇게 힘을 증명해서 충성심을 높이는 거지.”
“원시적인 데다 야만적이기까지.”
“암튼 월짝회 놈들 아주 꼴 보기 싫은데, 힘 있는 선배들이 많아서 공론화도 못 시키는 형편이야. 안두홍 선배, 그 양반이 월짝회 1기 회장이야.”
푸, 대찬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럼 서청수 회장님 쪽도 월짝회 비슷한 조직이 있나요?”
“음… 그 정도 규모는 아니지만 있긴 있어. 필래장학회라고, 필래그룹에서 에피니키온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주거든.”
“그렇군요.”
“그 장학금을 받으면 필래장학회에 자동으로 가입돼. 그런데 별도로 공지하지는 않아서 정확히 누가 장학생인지 몰라.”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고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만 얘기해 주는 건데, 사실 나도 필래 장학생이야.”
“지금까지 아주 감쪽같이 속이고 계셨네요.”
대찬이 느물거리자 김산하가 민망하게 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속이긴 누가 속였다 그래! 그냥 말을 안 한 거지.”
“그럼 누나는 필래 장학생들이 누군지 다 알고 계시겠네요.”
“정기적으로 모이긴 해.”
김산하는 그렇게 대답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장학회에 월짝회 애들은 하나도 없네?”
“역시.”
안두홍을 중심으로 한 월짝회, 그리고 서청수를 중심으로 한 필래장학회.
대찬은 그 두 모임이 에피니키온의 양대 파벌이라고 생각했다.
복수의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깊어지면 파벌이 생긴다.
파벌은 필연적이다.
일개 대학 동아리에 다 늙은 어른들이 무슨 파벌을 나누어 유치한 싸움을 벌이냐고 할 테지만, 에피니키온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에피니키온은 끈끈한 인간관계와 막대한 이해관계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조직이었다.
에피니키온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서면 엄청난 이권을 취할 수 있다.
졸업한 에피니키온 부원들은 한국 사회 구석구석으로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간다.
그들은 에피니키온의 이름 아래 상부상조한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확보한다는 건 그 자체로 거대한 권력이었다.
안두홍이 거푸 에피니키온에 거액의 기탁금을 쾌척하고, 대찬에게 가야 마땅할 상을 탁형원에게 몰아주는 일련의 행보는 모두 그것에 맥이 닿아 있었다.
김산하는 자신의 우동을 다 해치우고 입맛을 다시면서 반 넘게 남아 있는 대찬의 그릇을 넘봤다.
대찬은 픽 웃으면서 그쪽으로 그릇을 밀어 주었다.
김산하는 인사치레의 사양도 없이 후루룩 대찬의 우동을 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대찬의 날아갔던 입맛이 돌아올 정도였다.
김산하가 우동을 먹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치면 안두홍 선배가 상을 가로챌 만하네. 그 사람 입장에서 너에게만은 절대 상 줄 수 없을 테니까.”
“아마 그렇겠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산하도 대찬을 따라 웃었다.
“당연하지. 그 사람이 싫어할 짓만 골라서 했잖아, 너.”
“아무리 그래도 애들 트로피를 뺏는 건 너무했잖아요.”
“안두홍이 널 싫어할 만은 해.”
대찬은 부정하지 못했다.
“좀 무섭네요, 이 이상으로 해코지하실까 봐.”
김산하는 대찬의 얼굴을 흘끔 보고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지금까지 본 너는 이런 거에 눈 하나 깜짝 안 할 놈이니까.”
“아니, 당사자가 무섭다는데 거짓말은 무슨.”
“걱정 마. 너 혼자 아니야. 뒤에 서청수 회장님이 떡 버티고 있어 줄 거니까.”
“누나는요?”
“…어?”
대찬이 웃으면서 말하자 김산하는 잠깐 당황했다.
그러다가 이내 대찬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저번에 뻥 차 놓고 지금 또 꼬리치는 거야?”
“언제 꼬리를 쳤다 그래요?”
“그게 꼬리치는 거지, 그럼.”
“상상의 나래 좀 그만 펼쳐요.”
김산하는 콧잔등을 씰룩이며 대찬의 면박에 응수하고는 조용히 사족을 달았다.
“뭘 물어. 나야 항상 네 편이지.”
“조금 감동이네요, 그 멘트.”
“그럼 누구 편을 들어? 안두홍 편을 들리?”
따갑게 쏘아붙인 김산하는 휙 고개를 돌려 대찬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 모습이 늙을 대로 늙은 대찬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대찬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고마워요, 누나.”
“…그래.”
“근데 또 무섭지만은 않다.”
“응?”
“스릴도 있어요, 안두홍 선배가 나를 일부러 찍어 냈다는 게.”
대찬은 지금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신이 높은 그가 자신을 의식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일개 대학 신입생 주제로 하늘같이 높은 선배의 코털을 건드려 봤다는 게 짜릿했다.
상을 빼앗긴 게 도리어 통쾌했다.
머리가 벗겨진 중늙은이가 새파란 젊은이의 공훈을 고의로 말살하다니.
안두홍으로 하여금 그 치사하고 졸렬한 짓거리를 하도록 만들었다는 게 통쾌했다.
또한 두려우면서도 짜릿한 건, 안두홍의 코털을 한번 건드려 보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는 까닭이었다.
코털을 뽑고, 나중에는 가죽까지 벗겨 버릴 날이 있으리라.
대찬은 그렇게 믿었다.
김산하와 헤어지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
대찬의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대찬은 걸음마저 잠시 멈췄다.
‘이상하잖아.’
김산하는 대찬에게 에피니키온 내 파벌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그 파벌은 월짝회와 필래장학회.
‘유백기는 월짝횐데 왜 필래유통에 들어간 거지?’
대찬의 첫 번째 삶, 그와 유백기는 모두 필래유통의 직원이었다.
대찬이 고원대에 입학하기 전부터 유백기는 월짝회 소속이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삶에서의 유백기는 월짝회 소속이었는데 취직은 필래유통으로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치에 닿지 않았다.
월짝회와 필래장학회는 서로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유백기가 취직을 한다면 탁형원의 경우처럼 안두홍의 AKD테크로 들어가는 게 맞았다.
필래유통으로 들어가는 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뭘까…….’
대찬은 혼자 한참 궁리했지만 답을 얻지는 못했다.
지금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의지가 없었다.
적어도 2년 동안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2003년 1월 5일 아침.
“아, 젠장…….”
대찬은 몸부림치며 잠에서 깼다.
두 번째 삶을 산다는 게 더없이 저주스러운 날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부모님이 측은한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전례 없이 화려한 아침상이 차려졌다.
돼지를 잡기 직전 포식하게 해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신문을 보던 아버지는 대찬에게 다가와 평소와는 달리 다정한 말씨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든든히 먹어 둬라. 생각날 거다.”
“…네.”
평소에 낯빛을 잘 단속하던 대찬은 이날만큼은 이목구비에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는 전날 깎은 짧은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벌초한 무덤 같은 느낌이 불쾌했다.
입대하는 날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찬을 빼놓고는 그가 두 번째 입대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누구도 공감하지 못하는 최악의 기분을 대찬은 전유물로 누리면서 마음껏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밥상을 차렸지만 대찬은 몇 술 뜨지 못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버지의 차에 실려 의정부로 향했다.
-국민과 함께하는 선봉3군-호국요람
아치형의 간판이 대찬을 반겼다.
의정부 306 보충대.
“하…….”
가는 도중에 대찬이 내놓은 소리라고는 깊은 한숨뿐이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에피니키온 송년회를 치른 지 겨우 나흘 만에 입대했다.
이성적인 포석이었다.
보통 입대를 한다면 한 달 정도 말미를 두고 사람들과 만나 떠들썩한 송별회를 열기 마련이다.
대찬은 그 송별회란 것의 쓸모없음을 알고 있었다.
입대를 앞둔 자의 정신적 고통을 술로 마취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래봤자 남는 건 구토와 숙취뿐이었다.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하느니 아예 일사천리로 입대까지 해치워 버리자는 게 대찬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계산은 계산뿐이라는 걸 의정부로 실려 가는 차 안에서 깨달았다.
그는 거푸 후회했다.
그래도 약간의 말미는 두어야, 마음의 준비를 할 에어백 같은 말미는 두어야 했다고.
대찬의 휴대폰이 여러 번 울렸다.
“야, 어디야?”
최재한이었다.
“어디긴 어디야, 훈련소지.”
약 올리는 거야, 뭐야.
대찬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이제 밥 다 먹고 들어갈 준비 한다.”
“어어, 그래? 식당 이름 뭐야?”
대찬이 대답하자 최재한이 얼른 말했다.
“알았어. 거기 잠깐만 기다려.”
“뭐?”
대찬이 어리둥절하게 반문하자 최재한은 전화를 끊었다.
대찬과 그의 가족들이 식당 밖으로 나가니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깜짝 배웅을 한답시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김산하, 최재한, 서원웅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민승기는 역시 2월에 입대가 예정돼 있어 굳이 대찬을 배웅하러 오지 않았다.
입대할 일이 없는 김산하는 그저 대찬의 머리를 보고 킥킥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운명에 놓인 최재한의 얼굴에는 덩달아 그늘이 졌다.
“원웅, 너는 어째 입대 앞둔 사람 같지가 않다?”
대찬이 괜히 심술궂게 시비를 걸었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고 말았다.
서원웅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받아쳤다.
“난 공익이야.”
“…….”
하기야 깡마른 체구의 서원웅이 공익으로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찬의 속이 쓰려 왔다.
배웅을 나온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