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36화 (35/556)

난 할 수 있어 36화

기계에 어두운 노인들이 사용하기 쉽도록 기능과 디자인이 최대한 간소화되고,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을 위해 가격 거품을 최대한 줄인 제품들이었다.

처음에는 기부자와 독거노인을 일대일로 연결해서, 기부자가 원가에 가까운 가격에 제품을 구입하면 웜샤인이 독거노인에게 제품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소량만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제품은 보건복지부의 독거노인 지원 사업에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어 정부로부터 대량생산을 주문받게 되었다.

그건 오롯이 수영실업의 일거리가 되었다.

어김없이 진위생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어 기분 좋은 민원을 넣었다.

“아, 조대찬 씨는 무신 회사를 나가서도 우릴 괴롭힘까?”

수영실업이 수당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도록 두는 회사가 아니다.

삼라물산에 이어 필래그룹을 모회사로 둔 웜샤인과의 협업은 수영실업의 미래에도 큰 보탬이 될 거이란 걸 대찬도 알고, 물론 진위생도 알았다.

대찬은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진지해지지 않았다.

그는 긴말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 시간 돼요? 나와요. 술 사 줄게요.”

그러자 진위생은 킬킬 웃었다.

“역시 조대찬 씨는 뭘 좀 아는 사람임다. 뭐 사 줄 검까? 삼겹살이라도 사 주기요.”

“삼겹살은 무슨. 소고기 사 줄게요. 점심 조금만 먹어요.”

대찬은 씩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대찬은 진위생과 제법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종일 학교에서 살다시피 한 대찬은 오랜만에 숨통이 트였다.

오광훈 사장, 오찬식 팀장, 그리고 진위생, 몇 달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새 그리워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안부를 대찬은 저도 모르게 미소 띤 채로 전해 들었다.

성 대리도 그를 똑 닮은 딸을 순산했다고 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대찬은 성 대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득녀 축하드립니다. 산후조리까지 무사히 마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성 대리로부터 곧바로 답장이 왔다.

-우리 딸 다 크면 꼭 과외 해 줘야 돼요.

대찬은 피식 웃으면서 아마도 이뤄지지 않을 약속을 해 주었다.

방학이 되고도 에피니키온 부원들은 정기 모임을 계속했다.

학기 중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협업 건으로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한창 바쁜 사이에 민승기가 슬그머니 대찬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찬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요, 선배?”

“연말마다 선배들 다 모셔 놓고 송년회 하는 거 알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 대외협력국에서 도맡아서 힘들다고 산하 누나 입이 댓 발 나왔던 걸요.”

“그 송년회에서 시상식을 하거든.”

“대부분 돈 많이 낸 선배가 상 타 가시지 않나요?”

대찬의 말은 냉소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선배들 중 가장 많은 기탁금을 낸 선배가 올해의 에피니키온인 상을 타 갔다.

대찬은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기탁금은 에피니키온 활동의 원천이자 기회가 된다.

후배들에게 가장 많은 기회를 제공한 선배가 좋은 선배다.

그런 선배가 상을 받는 건 당연했다.

다만, 대찬은 굳이 자신을 불러다 그런 얘기를 하는 민승기의 의도가 궁금할 뿐이었다.

“올해의 에피니키온상은 그렇지. 근데 그것만 주는 게 아니잖아?”

“그래요?”

에피니키온의 부원으로서 맞는 첫 연말이었다.

송년회 때 무슨 상을 얼마나 주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재학생 부원한테도 주는 상이 있어.”

“아, 그런가요.”

대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자 민승기는 미간을 좁혔다.

“반응이 왜 그래?”

“네? 그럼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서 회장님한테 전화 받았거든?”

대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서 회장님이요? 필래 서청수 회장님?”

“이제야 관심을 보이네.”

민승기는 웃음을 머금었다.

“전화하셔서는, 이번에 웜샤인과의 협업으로 기업 이미지도 많이 좋아졌고, 공익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더라.”

“필래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긴 했죠.”

“그래서 너더러 준비하라 하시더라고.”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비라뇨?”

“자랑스러운 후배상에 네가 뽑힐 거라고 하시던데. 그러니까 후줄근한 캐주얼 정장 말고 그럴듯한 걸로 한 벌 뽑으라셔.”

“에, 저한테 상을 주시겠다고요?”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아니면 누가 받겠냐.”

“그래도 1학년한테 주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런데요.”

대찬은 상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1년간 에피니키온 부원들 중 가장 열심히 노력했고, 가장 많은 공훈을 세웠다고 대찬 본인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공훈의 순서를 따져 상을 준다면 자신이 받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복잡했다.

1학년인 대찬이 덜컥 큰 상을 받아 버리면 주위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 에피니키온을 발판으로 삼아 사회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대찬으로서는 차라리 상을 받지 않고 눈총을 면하는 쪽이 좋았다.

하지만 민승기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 두지 않는 눈치였다.

“암튼 군말 말고 정장이나 하나 뽑아. 너 이래저래 돈 많은 거 다 알거든.”

대찬은 난처한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네.”

상황이 민망하게 되긴 했지만 수확도 있었다.

필래그룹의 서청수가 대찬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대찬의 기여를 고려하자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총수가 대찬의 이름과 공을 알고 있다는 건 새삼 놀라웠다.

발가락 끝이 짜릿했다.

모처럼 그럴듯한 정장 한 벌을 사 입었다.

어쨌거나 나중에 취업할 때가 되면 면접 보느라 사야 될 정장이었다.

대찬은 수영실업의 오광훈 사장으로부터 받은 금일봉을 털어 정장 한 벌을 맞췄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누나 조수진의 몫도 챙겨 옷 한 벌씩을 선물했다.

어머니는 한참 옷을 벗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거울 앞에서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는 대찬의 마음도 훗훗해졌다.

12월 31일, 2002년도 이제 몇 시간 뒤면 과거가 된다.

대찬은 흘러가는 두 번째 2002년의 마지막 밤을 한 호텔의 연회장에 마련된 에피니키온의 송년회로 보냈다.

서원웅은 침착하게 자리를 지키는 반면, 최재한은 잔뜩 들떴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었다.

오죽하면 나비넥타이까지 했을까.

대찬은 과하게 들뜬 최재한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회는 역시 민승기가 봤다.

“이어 올해의 에피니키온인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시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최재한이 대찬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긴장하지 마라.”

“그러는 네가 더 긴장한 거 같다.”

대찬은 픽 웃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시상식의 전통은 이랬다.

가장 큰 상을 마지막에 주는 여느 시상식과는 달리, 에피니키온은 대상 격인 올해의 에피니키온인상을 가장 먼저 시상한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상을 받은 이가 재학생 부원에게 주는 자랑스러운 후배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시상한다.

올해의 에피니키온인상의 수상자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민승기 역시 긴장감 없이 곧장 수상자의 이름을 불렀다.

“올해의 에피니키온상을 수상하실 선배님은 1기 안두홍 선배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안두홍은 에피니키온 총동문회장으로서 총동문회 이름으로 2천만 원을 기탁했고, 개인적으로도 1천만 원을 기탁했다.

여러 선배들이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기탁금을 냈지만, 안두홍이 낸 것에 비하자면 푼돈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두홍 본인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놀라는 척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앞으로 나가 상을 받았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안두홍은 몇몇 후배가 주는 꽃다발을 능숙하게 받고, 씩 웃으면서 말했다.

“새삼스레 상까지 챙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돈 많이 내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소소한 농담에 우레와 같은 폭소가 터졌다.

“자, 그럼 제가 올해의 후배상을 시상하면 되겠죠?”

최재한은 대찬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야, 쪼대 출세 5초 전이다.”

서원웅도 역성을 들었다.

“상금으로 한턱 쏴야 된다?”

“아직 받은 것도 아닌데 김칫국 마시지 마. 못 받을 수도 있어.”

대찬은 겸손의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안두홍은 가래 끓는 목소리로 수상자를 발표했다.

“올해의 자랑스러운 후배상의 수상자는, 19기 탁형원 후배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박수를 쳤다.

하지만 재학생 부원들은 잠시 멈칫했다.

2002년을 에피니키온의 부원으로서 지내 본 사람들은 모두 생각이 같았다.

당연히 대찬이 수상자라고 생각했다.

탁형원은 뜬금없었다.

그는 에피니키온에서 가장 기수가 높은 선배였다.

그가 올해 한 일이라곤 한 달 남짓 남은 말년 병장만큼이나 게으르게 활동한 것뿐이었다.

기여도를 따지자면 마이너스였다.

그런 그에게 상을 주겠다니.

굳이 대찬에게 주지 않는다 해도 그보다 더 열심히 일한 부원들은 차고 넘쳤다.

최재한과 서원웅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간부로서 비교적 앞줄에 앉은 김산하 등 선배들도 흘끗 그를 돌아봤다.

사회자로서 연단에 선 민승기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대찬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승기가 자신을 물 먹이려고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필래그룹 서청수도 확신이 있으니까 민승기에게 그런 전화를 걸었을 거다.

대찬은 모처럼 빼입은 새 정장이 부끄러워졌다.

탁형원은 보무도 당당히 앞으로 나가 안두홍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안두홍은 그에게 상을 주면서 공치사까지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탁형원 후배님은 맏형으로서 재학생 부원들을 잘 이끌어 웜샤인과의 성공적인 협업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말에 속사정을 아는 모든 이들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안두홍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꿋꿋이 말을 이었다.

“또 그간 에피니키온의 일원으로서 열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자랑스러운 후배상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탁형원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들었다.

안두홍은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기념 사진까지 찍고는 물러났다.

결국 대찬이 이날 받은 상이라고는 1학년 부원 5명에게 주는 굿 팔로워상뿐이었다.

최재한, 서원웅도 대찬과 나란히 서서 상을 받았다.

굿 팔로워, 직역하자면 좋은 추종자였다.

숨은 의미를 조금만 더 캐자면 신입생 분수를 잘 알아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잘해서 주는 상이었다.

대찬의 행적과는 정반대였다.

최재한과 서원웅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사이, 대찬은 도리어 덤덤하게 상을 받았다.

상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탁형원에게 큰 상이 돌아간 편이 나았다.

상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대찬은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탁형원은 상을 받고 내려오는 자리에서, 1기 선배들과 나란히 앉은 서청수 회장의 눈치를 흘끗 봤다.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은 아침에 사모에게 잔뜩 소박을 맞은 까닭일 수도 있었지만, 대찬에게 갔어야 할 몫이 탁형원에게 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굳이 민승기에게 전화를 걸어 호언장담을 할 정도였다.

대찬을 자랑스러운 후배상에 내정한 건 서청수 본인일 터였다.

민승기에게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건 것 역시, 대찬이 상을 받게 된 건 다 자신의 공이라는 점을 에둘러 알리기 위함이었으리라.

또한 대찬이 필래그룹에 큰 도움을 줬으니 서청수로서는 기꺼이 대찬에게 상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1기 선배인 데다 굴지의 재벌 총수인 서청수의 발언권은 컸을 것이다.

또한 그의 주장이 합리적이었으므로 아마 확정적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서청수의 의중과는 달랐다.

대찬이 아니라 탁형원이 상을 가져갔다.

‘…그렇다면 누군가 개입해서 서청수의 주장을 뭉개 버렸단 건데.’

서청수의 지위를 생각하면 그의 주장을 뭉개기는커녕 반기를 들 만한 사람도 손에 꼽을 것이다.

대찬은 그가 누구인지 쉽게 짐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 짐작이 맞아떨어졌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대찬과 단둘이 우동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우던 김산하가 말했다.

“탁 선배 있잖아, AKD테크 입사했다던데.”

“네? AKD테크요?”

김산하는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