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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5화 (34/556)

난 할 수 있어 35화

에피니키온이 필래의 베리굿즈에 의탁해 생산한 팔찌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팔찌는 할머니 팔찌라는 별명이 붙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젊은 연인들은 이걸 커플 팔찌로 구입하면서 애정도 잡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뽐내기도 했다.

한번 비탈을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는 삽시에 불어나는 법이다.

필래그룹에서는 아예 이런 사회적 공헌을 전담하는 계열사를 새로 창설했다.

‘웜샤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업이 팔찌는 물론, 반지, 귀걸이 등을 포함한 액세서리와 다이어리, 만년필, 부채 등 이런저런 잡화까지 영역을 넓혀 생산했다.

“선배님 도착하셨습니다!”

에피니키온 부원 하나가 급박하게 부실 안으로 들어와 알렸다.

그 전언에 한데 모인 부원들이 동시에 기립했다.

멀쑥한 정장을 빼입은 서청수 필래그룹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회장 민승기가 선창하며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자, 나머지 부원들도 허리를 굽히며 후창했다.

“안녕하십니까!”

그 우렁찬 인사에 서청수 회장은 민망하게 웃었다.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니고, 편하게들 있어요.”

그의 표정은 전례 없이 밝았다.

불과 몇 주 전, 손찌검 황태자 사건으로 대국민사과를 할 때의 표정과는 완전히 상반된 얼굴이었다.

“후배님들 덕분에 안녕합니다. 큰일 해 주셨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민승기에게게 악수를 청했다.

“이게 다 회장님의 통솔력 덕분이겠지?”

민승기는 악수에 응하며 대찬 쪽을 슬쩍 바라봤다.

“아닙니다. 그건…….”

대찬에게 공을 넘길 생각이었다.

그러자 대찬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눈빛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민승기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딸려 갔다.

서원웅이었다.

“아…….”

잠깐 말을 멈춘 민승기는 웃으며 서청수에게 말했다.

“다들 수고가 많았지만 특히 서원웅 후배, 조대찬 후배의 공이 컸습니다.”

“…그래?”

그 말에 서청수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아예 서원웅한테 돌렸어야지…….’

대찬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민승기는 그를 향해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의 성격상 완벽한 거짓말은 허용되지 않았다.

“조대찬 후배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고, 서원웅 후배가 주도적으로 세부적인 사업 내용을 구성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서청수는 그렇게 말하며 잠깐 서원웅에게 시선을 던졌다.

서원웅은 반사적으로 다른 곳을 바라봤다.

대찬은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으로 부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서원웅은 아버지와 단 한 번도 연락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스무 해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대면한 것일 터.

서원웅의 마음을 대찬은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서청수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하는 건 더 어려웠다.

서청수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입술은 그 말들을 가로막는 댐이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

개중 가장 간절한 말은 아마도,

‘장하다, 아들아.’겠지.’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서청수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민승기 쪽으로 눈빛을 틀었다.

“아무튼 회장도 수고가 많았어요.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뜻깊은 기여도 하게 되었고.”

“이게 다 선배님께서 저희에게 기회를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큰 기대는 안 했어요. 내가 후배님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군요.”

서청수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건 격려금이에요. 그리고 사례금이기도 하고.”

서청수는 민승기 쪽으로 입을 갖다 대고 속닥거렸다.

“학교 쪽에는 알리지 말아요. 피차 또 골치 아파지니까.”

민승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참 선배가 오래 머물면 불편하기만 하겠지. 먼저 가 볼게요. 오늘은 만사 제쳐 놓고 술이라도 걸게 먹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청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또 봅시다.”

그렇게 말하는 서청수의 시선은 서원웅에게 오래 머물렀다.

서원웅의 시선이 그와 정면으로 맞았다.

그는 긴장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눈빛을 받았다.

서청수는 다소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부실을 떠났다.

“와아! 모두 수고했다, 수고했어!”

잔뜩 고무된 민승기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에 호응하는 흥분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서원웅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는 오로지, 한 사람의 한마디 말만 무제한으로 재생되었다.

‘그럼, 또 봅시다.’

대찬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서청수에 이어서, 학보사 편집장도 몸소 에피니키온 부실에 방문했다.

“고맙습니다.”

편집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부원들에게 말했다.

민승기는 그의 감사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에피니키온의 이익이 크게 침해당할 뻔했다.

그건 에피니키온의 회장으로서 심각한 문제였다.

만일 샐러리캡 제도가 적용되면 선배들로부터의 지원이 대폭 삭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에피니키온은 그 화려한 명맥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민승기 이후로 그저 그런 동아리로 전락할 터였다.

그건 민승기로서는 커다란 불명예였다.

그 주범이 바로 학보사 편집장이었으니 민승기로서는 쉽게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편집장도 그런 민승기의 심사를 잘 알았다.

그렇기에 감사합니다, 그 말 뒤에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미안합니다.”

그제야 민승기도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사과를 받아 줄 준비를 마쳤다.

“악감정 남겨 봤자 서로에게 안 좋으니까요. 잊읍시다.”

“학보에 제 이름으로 사설을 싣겠습니다. 에피니키온에 대한 불합리한 공박과 학보사의 실책을 숨김없이 고하겠습니다. 대자보도 별도로 붙일 예정입니다.”

그 말에 민승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네?”

“이미 일은 해결됐습니다. 더 들쑤시고 싶지 않아요.”

“…네.”

민승기는 그렇게 말하고 대찬을 가리켰다.

편집장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은 저기 있는 조대찬입니다. 저는 그쪽한테 사과는 받고 싶지만 감사를 받을 자격은 없거든요.”

편집장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위안부 할머님을 후원하는 사업을 고안한 장본인이 바로 저 친굽니다.”

“…아.”

“저 친구에게 감사를 표하세요.”

편집장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대찬에게 다가갔다.

“고맙습니다.”

그의 사의에 대찬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저희에게도 소득이 있었으니까요.”

편집장은 환하게 웃으면서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그 손을 꽉 붙들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자 민승기는 그제야 편하게 웃었다.

“이걸로 다 끝났네. 잘 풀렸어.”

그의 말에 비로소 부원들의 긴장이 탁 풀렸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잔뜩 움츠려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였다.

만일 일이 잘못돼서 에피니키온으로 들어오는 지원금이 끊기면?

선배들에게 문제적 후배로 낙인이 찍히면?

그간 선배들이 누려 왔던 이익이 자신의 대에 이르러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부원들은 그 고비를 넘긴 것에 안도했다.

여전히 이 동아줄은 튼튼하고 질기게 유효하다.

그런데 대찬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돼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응?”

부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불길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대체 또 무슨 소릴 하려고.

편집장과 악수한 대찬의 손은 여전히 편집장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대찬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총학의 일이 아직 처분되지 않았습니다.”

대찬은 붙든 편집장의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굳은 시선으로 편집장을 바라봤다.

편집장의 손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희 역성을 들어 달라는 게 아닙니다.”

대찬은 편집장에게 말했다.

“학보사면 학보사답게 기사를 써 주세요.”

“…….”

“총학생회장의 친구가 아니라 학보사 편집장으로서 써 주세요.”

대찬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추악한 면모를 감추기 위해 애먼 쪽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고 싶었다.

그것은 복수심에 의한 앙갚음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정당방위 겸 정의 구현이지.’

대찬은 편집장의 확답을 들을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결국 편집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학보사만 기대하지 않았다.

학내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붙었다.

-이제 총학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짧은 제목에 분명한 뜻이 담겼다.

에피니키온의 차례는 끝났다.

이제 너희, 총학 차례다.

편집장도 약속을 지켰다.

총학생회장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에피니키온은 그에게 분명한 혜택을 주었다.

거짓으로 총학을 공격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친분에 눈 감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찬의 대자보는 학내 여론을 에피니키온에서 총학으로 전환하는 효과가 있었다.

학보사가 이에 동참하자 그 효과가 증가했다.

그러나 그건 부수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결정적인 건 결국 이해 당사자였다.

본디 에피니키온의 몫을 나눠 가지려고 작당모의를 했던 동아리들이었다.

그걸 담보로 총학의 과거를 슬며시 묻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건 무위로 돌아갔다.

따라서 약속도 무효였다.

동아리들은 총학으로부터 어떠한 이득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굳이 총학의 역성을 들어줄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학내 여론마저 총학의 운명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총학의 누구누구와 얕고 깊은 친분이 있던 동아리 회장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분 때문에 자신까지 도매금으로 지탄받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역시 동아리 회장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민승기는 강도 높게 주장했다.

“이미 특정 업체에게 수년간 특혜를 제공한 증거가 이미 다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전례 없이 날카로웠다.

“대체 얼마나 더 발뺌하실 요량입니까?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세요.”

물증이 확실하니 총학의 반론은 부실했다.

총학생회장은 잔뜩 구겨진 표정으로 민승기의 독설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 회장들은 냉담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총학의 비리를 심판하기 위해 열린 윤리 심판 회의는 엄중한 결정을 내렸다.

-공고-

총학생회의 축제 무대 설치업체 비리의 건에 대하여 윤리 심판 회의는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음.

1. 총학생회장을 포함한 총학생회 간부는 전원 사퇴할 것.

2. 총학생회장 선거를 위한 선거 관리 위원회를 조속히 소집할 것.

윤리 심판 회의는 간부 전원 사퇴를 종용했다.

그리고 결국, 그 종용대로 이루어졌다.

총학생회장은 사퇴의 변도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볕이 들었다.

에피니키온은 필래그룹의 사회 공헌 계열사인 웜샤인과의 협업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좋은 일로 바쁜 것이니만큼 에피니키온의 부원들은 열정적으로 임했다.

성공적인 협업과 경험의 축적이 훗날 좋은 직장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보장이 있었다.

현실적인 보상이 걸려 있기에 부원들은 열성적일 수 있었다.

대찬도 그 대열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방학 내내 수영실업에서 고된 업무를 치러내고 학교로 와서도 이런 상황이었다.

심신이 고갈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기쁘게 작업했다.

에피니키온은 기존에 수립되었던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그리고는 웜샤인과의 협업에 몰두하기로 결정했다.

협업은 연말까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필래그룹의 자회사인 웜샤인은 출범 후 1년도 되지 않아 공장 세 군데에 제품 생산을 위탁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중에는 수영실업도 있었다.

수영실업은 독거노인을 위한 소형 가전 제작을 위탁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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