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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4화 (33/556)

난 할 수 있어 34화

대자보의 내용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는 건 대찬도 아주 잘 인식하고 있었다.

동아리가 대체 학교에 무슨 기여를 해야 한단 말인가?

동아리는 학교로부터 지원을 받는 조직이지, 기여하는 조직은 아니다.

게다가 큰 조직인 학교보다 작은 조직인 동아리에 소속감을 더 느끼는 건 당연했다.

지구인으로서 지구에 느끼는 소속감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느끼는 소속감이 더 큰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필래그룹의 문제를 에피니키온에까지 적용하는 대목은 논박할 가치도 없었다.

대찬의 마음이야 김산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대찬이 김산하를 뜯어말리는 건,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애초에 대자보는 익명으로 작성되었으니 총학에 가서 난리블루스를 추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총학 이름으로 대자보가 붙었다 해도 에피니키온에서 항의하는 건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학교 전체의 이슈로 번지는 것만큼은 지양해야 했다.

이미 논점은 흐트러져 있었다.

에피니키온이 선배의 동아줄을 쥐고 승승장구하는 것이 눈꼴시니까, 너희 지원금을 나눠 갖자는 것이 요지가 돼 버렸다.

이는 학생들의 호응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에피니키온의 잘나가는 선배들의 주머니를 함께 털어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

이치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익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했다.

고원대에 외부 지원금이 지나치게 많으니, 다른 학교들과 나눠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는 쌍수를 들고 반대할 사람들이 이 건에는 격한 찬성을 보낼 것이다.

대찬은 이 사실이 못 견딜 정도로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설계된 생물이다.

다만, 이쪽에서도 이쪽의 이익을 사수하기 위해 사투를 벌일 뿐이다.

대찬은 달라진 여론을 피부로 체감했다.

한 교양 강의 시간에 교수가 이 일을 언급했다.

“요즘 동아리 하나 때문에 시끌시끌하던데, 여기 그 동아리에 소속된 학생 있어요?”

그 질문에 대찬이 손을 들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최재한이 굳이 뭐 하러 손을 드냐며 속닥거렸다.

대찬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교수는 대찬을 발견하고 웃었다.

“소감이 어때요?”

대찬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대찬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을 충분히 인식한 후, 대찬이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학우님들의 생각을 먼저 알아보고 싶습니다.”

“음?”

“대자보가 붙고 학보에 기사가 몇 개 실리긴 했지만, 논점이 단일하지 않아서요.”

대충 뭉개고 넘어갈 줄 알았던 대찬이 진지하게 말을 받자 교수는 흥미가 생긴 듯했다.

그는 웃음을 지으며 교재를 탁 덮었다.

“좋아요. 여기 계신 학생분들이 좀 도와주시죠.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침묵이 이어지던 중, 무뚝뚝한 인상의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에피니키온이 다른 동아리에 비해 특혜를 받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대찬은 그와 직접 대화하지 않았다.

교수가 그의 말을 이끌어 내도록 두었다.

“특혜라면 어떤 특혜를 말하죠?”

“에피니키온이 상당한 외부 지원금을 받고 있는 건 모두가 압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불러일으킨 건 사실이잖아요.”

교수는 대찬을 바라봤다.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죠?”

“제 사견이 에피니키온 전체의 의견으로 비칠 수 있어서 발언은 자제하겠습니다. 학우들의 의견을 듣고, 선배들께 전달만 하겠습니다.”

대찬은 극도로 발언을 자제했다.

당장 반박할 거리야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당장의 시원함을 위해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무뚝뚝한 남학생이 물꼬를 트자 여러 학생들의 불만들이 이어졌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빨리 해결해야겠네…….’

잠자코 듣기만 하던 대찬은 짧게 대답했다.

“학우분들의 소중한 의견, 잘 전달하겠습니다.”

“1학년답지 않게 침착하네요.”

교수는 묘한 시선을 대찬에게 보내며 논의를 마무리했다.

대찬은 소중한 의견이라고 해 주니, 잘 전달하겠다고 했다.

거기에 돌을 던질 정도로 학생들은 야만스럽지는 않았다.

내심 한바탕 피 튀기는 설전을 벌이려고 했던 호전적인 학생들은 쩝, 입맛을 다셨다.

강의가 끝나고, 대찬은 최재한과 함께 캠퍼스를 걸었다.

“학생들 여론이 확실히 안 좋아.”

대찬의 말에 최재한도 공감했다.

“아까 눈빛 봤어? 완전 경멸하는 눈빛.”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네.”

최재한은 툴툴거렸다.

“아니, 우리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야? 우리가 삥을 뜯었어, 아니면 불법 증여를 받았어?”

대찬은 픽 웃으면서 최재한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너무 잘난 게 죄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최재한에게 물었다.

“학보사에 아는 사람들 많지?”

“응, 적지는 않지. 국문과가 갈 만한 직장이 몇 군데나 되겠냐. 언론사 준비생들 한 트럭이다.”

“그럼 좀 캐 봐.”

“뭘?”

대찬은 제법 품을 들여 최재한에게 설명했다.

최재한은 그 설명을 듣고 잠시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네 역할이 커.”

“자꾸 그렇게 부담 주지 마. 할 만큼은 해 볼게.”

대찬은 웃음으로 신뢰를 표현했다.

최재한은 대찬의 신뢰에 부응해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 모았다.

에피니키온 간부들은 한데 모여 그 정보들을 유심히 분석했다.

대찬은 간부가 아님에도 가운데 자리를 권유받았다.

어느덧 대찬이 에피니키온의 키를 잡게 되었다.

“학보사 편집장이 학보사 내부에서 인심을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 내분을 기대할 수도 없잖아.”

최재한의 말에 김산하는 툴툴거렸다.

만일 편집장이 내부의 원망을 사고 있다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편집장이 꽉 잡고 있는 학보사라면 불가능했다.

“편집장하고 총학생회장이 절친이라며? 이건 반칙이지.”

“둘이 내내 손잡고 있으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잖아.”

민승기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대찬 역시 뾰족한 수가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

최재한도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쓸데없는 정보만 줄줄 읊었다.

편집장이 술을 그렇게 좋아한다느니, 레고광이라느니, 대구 출신이라느니…….

쓸모없는 정보의 향연에 김산하는 냉소를 지었다.

“뭐, 술 먹이면서 레고라도 뇌물로 찔러 줄까?”

“그, 그런 뜻은 아닌데…….”

최재한은 겸연쩍게 웃었다.

“딱히 그럴듯한 정보가 없어요. 나머지는 다 신변잡기 같은 얘기라…….”

최재한 역시 모처럼 발로 뛴 정보들이 가치가 없어 낙담했다.

그때 정보들을 적어 놓은 메모를 보던 대찬이 최재한에게 물었다.

“편집장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응? 아, 응…….”

그 물음에 최재한은 얼굴을 붉혔다.

“미안. 너무 쓸데없는 것들만 적어 놨지.”

그러나 대찬의 표정은 진지했다.

“편집장하고 할머니의 관계는 어때? 좋은 편이야?”

“어?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런데 이 얘기를 학보사에 있는 우리 과 선배한테 들었거든. 편집장이랑 동기.”

“그런데?”

“그런데 술자리에서 자주 할머니를 언급했다더라고. 진짜 아픈 기억이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화난다고.”

“그랬단 말이지.”

대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민승기를 바라봤다.

“선배, 길이 보이는 거 같아요.”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

“그리고 필래에서 원하는 사업 아이템도 찾았어요.”

그 말에 민승기는 물론, 좌중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학보사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인데 필래그룹에서 낸 숙제까지 해결했다니?

김산하는 대찬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필래에서 준 1억을 도로 토해 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사업 아이템이 무슨 소용이야.”

“아뇨. 이 1억을 활용해서 학보사를 회유할 수 있고, 나아가서 학내 여론까지 뒤집을 수 있어요.”

민승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라도 하게?”

“아뇨. 말씀드렸잖아요.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고요.”

“그럼 그 사업 아이템에 1억을 쓰면서 학보사를 회유하고, 여론도 이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대찬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김산하의 질문에 대찬은 빙긋 웃었다.

며칠 뒤, 고원대학교 학보 1면 전체에 기사 하나가 올라갔다.

-에피니키온-필래그룹, ‘위안부 할머님’ 후원 위한 팔찌 출시한다!

에피니키온은 필래그룹으로부터 받은 1억 원으로 팔찌를 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위안부 할머님들을 후원하기로 했다.

디자인은 에피니키온 소속의 의상학과 부원이 맡았다.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제작에는 필래그룹 산하 패션 브랜드인 베리굿즈에서 맡기로 했다.

에피니키온은 팔찌의 디자인과 소요되는 예산, 작업 과정 등을 자세히 구성한 사업 계획서를 필래그룹에 발송했다.

필래그룹은 이를 크게 반겼다.

황태자 손찌검 사건으로 추락한 필래그룹의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였다.

필래로부터 거액의 광고료를 받는 신문사들이 이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필래, 청년상생-위안부 할머님 후원 동시에 해내!

대찬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대찬은 부원들에게 주장했다.

“1억 원으로 소품을 제작하도록 해요. 뭐든 좋아요.”

“그래서?”

“거기서 발생한 수익 전액을 위안부 할머님 후원에 쓰도록 하는 거죠.”

그 말에 민승기는 무언가 깨친 표정이었다.

‘민승기는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위안부 할머니 후원을 명목으로 한 소품 제작은 일석삼조의 결과를 도모할 수 있었다.

첫째, 필래그룹의 땅에 떨어진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쉬운 동의를 얻는 주장은 바로 일본,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과거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과거사를 공격하는 것보다 더 쉬운 동의를 얻는 건 바로 그 과거사의 피해자를 보듬는 일이었다.

누추한 삶을 영위하는 독립운동가 후손, 강제 징병과 징용의 피해자, 또 가장 잔학한 방법으로 피해를 입은 위안부 할머니.

그들을 돕는 일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 강력한 지지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필래에서 이 일에 발 벗고 나선다면 손찌검 황태자 같은 사소한 사건은 쉽게 잊힐 수도 있다.

둘째, 틀어진 학보사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학보사의 편집장이 학보사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면.

그의 할머니가 겪은 고통에 대해 편집장이 분개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대찬의 방법은 학보사와의 관계를 두텁게 만들 것이다.

필래그룹은 첫 번째 후원자로 학보사 편집장의 할머니를 지정했다.

필래그룹의 고위 관계자가 직접 할머니를 방문하여 포옹하는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학보사도 이걸 보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찬이 보지는 못했지만 편집장은 분명히 뭉클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학보사는 에피니키온을 건드리기 힘들어졌다.

총학생회장이 편집장과 얼마나 두터운 정을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포석의 파괴력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다.

셋째, 학내의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에피니키온을 공격하는 논지는 에피니키온이 학교에 기여하는 것 없이 외부 지원금을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에피니키온이 지원금을 받는 만큼 학교에 기여하면 그만이었다.

이 사업은 에피니키온의 위상은 물론 학교 전체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었다.

고원대학교의 뜻 있는 청년들이 대기업을 사회 공헌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한 수익이 학내 구성원, 당사자에게 돌아갔다.

이건 에피니키온이 접수한 1억 원의 자본을 온전히 지키면서도 학교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일이었다.

대찬이 제시한 안은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었다.

사회의 공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되, 영리를 추구하는 것.

대찬이 첫 번째 삶을 살던 2018년에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2000년대 초반, 이때에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명제가 진리로 통하던 시기였다.

대찬은 그것을 2018년의 논리로 비틀어 포석을 놓은 것이었다.

그의 사업 계획서 1장이 에피니키온에 불리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일시에 타개했다.

인터넷에서는 필래의 혁신적인 사회적 공헌을 칭찬하는 의견이 줄지어 올라왔다.

그건 매출로 직결됐다.

“대박, 말 그대로 대박!”

좀체 흥분하는 법이 없던 민승기가 쌍수를 들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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