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3화
“그럼 이 건으로 총학이 다른 동아리들이랑 딜을 하겠다는 거야?”
대찬은 그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뒷돈 문제는 슬그머니 감추고 여기에 주력하겠다는 거지. 다른 동아리도 이편이 자기들 이익이랑 직결되니까 아마 동의할 거야.”
“너무들 하네, 진짜.”
최재한은 그렇게 감상을 툭 내던지듯 밝히고는 옆에 앉은 서원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너는 왜 아무 말도 없어?”
“어? 어……. 아, 아니야.”
“너는 화도 안 나?”
최재한의 말에 서원웅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향했다.
“화나지…….”
“반응 한번 싱겁다.”
대찬은 서원웅의 기색을 흘끗 살폈다.
그는 서원웅의 표정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서원웅이 저렇듯 소심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서원웅의 모습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뒤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
그런데 민승기, 김산하 같은 선배 간부들의 모습도 어딘가 수상했다.
서원웅에게 쏠린 시선을 흩뜨리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럼 우린 무슨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걸까?”
김산하는 평소 말투와는 전혀 다르게 어색한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걸 또 민승기가 어색한 목소리로 받았다.
“그, 그러게.”
‘뭐야, 저 양반들.’
대찬은 찜찜한 시선으로 김산하와 서원웅을 번갈아 봤다.
그래도 일단은 당면한 문제가 중요했다.
대찬은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총학과 동아리 연합회는 이미 이익이 맞아떨어졌어요. 그쪽의 결속은 깰 수 없어요.”
아무래도 논의는 그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제아무리 명문대생이요, 후배들 앞에서 모가지가 뻣뻣한 선배님들이라지만 결국은 햇병아리들이었다.
사회의 매운바람을 맞아 본 대찬의 관록과 식견에 딸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쪽이 아니라 다른 약한 고리를 찾아서 공략해야 해요.”
“약한 고리라니?”
“학보사는 이 일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어요. 단지 편집장이 총학생회장이랑 친하다는 거밖엔.”
민승기는 검지로 턱을 슬슬 긁었다.
“그럼 그쪽이 약한 고리라는 거야?”
“네. 공략하기 나름이죠.”
이에 김산하가 과격한 대안을 내놓았다.
“학보사 쳐들어가서 깽판이라도 칠까?”
“깽판은… 됐고, 항의 방문 어때?”
민승기가 순화해서 표현했지만 대찬은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항의 방문은 오히려 학보사에 먹잇감만 던져주게 돼요. 긁어 부스럼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시간을 끌어야 돼요. 재한아, 네 선배 중에 학보사 기자 있지?”
대찬의 물음에 최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민승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한이한테 학보사 선배를 만나게 하는 게 어떨까요?”
“만나서?”
“만나서 선제적으로 제안하는 거예요. 샐러리캡 제도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다만.”
“다만?”
“다만 부원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서 조율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말에 김산하가 우려를 표했다.
“나중에 우리가 거짓말 했다고 하면 어떡해?”
“용의가 있을 뿐이지, 결정한 게 아니에요. 그래도 못 알아들을 걸 걱정해서 이견이 있다, 조율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하는 거고요.”
대찬은 웃으면서 첨언했다.
“그리고 회장인 민 선배나 다른 간부 선배들이 아니라 일개 부원인 1학년에게 맡기는 것도 다 그런 이유예요.”
“날이 갈수록 간악해져.”
고등학교 때부터 그를 봐 온 최재한은 혀를 내둘렀다.
최재한은 비공식적으로 에피니키온을 대표해 학보사 사람과 만났다.
거기서 에피니키온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학우들의 생각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운을 띄웠다.
그리고 샐러리캡 제도를 도입해 학내 동아리들과의 형평성을 맞추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다만,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이런 내용을 섣불리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학보사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학보사는 최재한의 입으로 옮겨진 대찬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쪽에서도 굳이 에피니키온과 필요 이상의 악감정을 쌓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자신들이 써 내는 기사가 견강부회요 아전인수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에피니키온이 일단 한 발짝 물러나자 학보사에서도 논조를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불씨는 살려 놓았다.
매일 실리던 에피니키온에 관한 기사가 하루 걸러 하루 꼴로 바뀌었다.
그래야 간신히 은폐한 총학생회의 일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터였다.
“이 다음엔 어떻게 하면 되지?”
민승기의 역할은 대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대찬의 예상대로 흘렀고, 그의 처방이 먹혔다.
민승기뿐만 아니라 에피니키온의 모든 부원들이 그의 입에 집중했다.
‘이렇게까지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대찬은 곤란한 심정이었지만 칼을 완전히 뽑기로 결정했다.
그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당장은 내세울 패가 없어요. 일단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무슨 정보?”
“저쪽이 군침을 질질 흘릴 만한 것에 대한 정보요.”
상황을 빨리 일단락할수록 좋지만, 서두르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어줍지 않은 솜씨로 돼지를 잡으면 피가 사방에 튀는 법이다.
돼지는 시끄럽게 운다.
그건 대찬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망설이지 말고 급소를 찔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급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만 한다.
일단 그렇게 방향만 정하고 부원들이 해산했다.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와중에 대찬은 서원웅의 팔을 잡아끌었다.
대찬의 손길에 서원웅은 눈을 깜빡거렸다.
대찬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 무슨 일?”
대찬은 어딘가 불편해하는 서원웅의 태도가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일상적인 물음에도 말부터 더듬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대찬은 벤치에 그를 앉히고 다짜고짜 다그쳤다.
“빨리 말해.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
서원웅의 말을 대찬은 토씨 하나 신뢰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알고 있는 걸 왜 나한테는 말 안 해?”
“어, 어어?”
서원웅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짜 이러면 나 섭섭하다.”
그걸로 서원웅은 진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카페 가서 얘기 좀 할래?”
고개를 끄덕인 대찬은 사람이 붐비지 않는 한적한 카페로 그를 데리고 갔다.
서원웅은 커피를 여러 모금 마시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필래그룹 때문에 시끄럽잖아.”
“에피니키온으로만 한정하면 필래 때문은 아니야. 더러운 총학 놈들 때문이지.”
“그래도 필래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필래는 트집거리에 불과해. 필래가 아니었어도 다른 건수를 쥐고 늘어졌을 거야.”
서원웅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 필래 서청수 회장님 아들이야.”
하마터면 대찬은 입에 머금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
간신히 입술을 세게 오므려 참사는 피했다.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던 대찬은 서원웅의 고백에 눈이 커졌다.
“뭐, 뭐라고?”
“근데 떳떳한 아들은 아니고, 뭐랄까…….”
서원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적절한 낱말을 찾고 싶었지만 실패한 듯, 원래의 내키지 않는 낱말을 발음했다.
“첩의 아들이랄까. 서자지. 그러니까.”
“…….”
대찬은 무어라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서원웅은 서청수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서원웅의 어머니는 서청수의 아내가 아니었다.
내연녀였다.
서원웅은 아버지가 아랫도리를 서툴게 놀려 자신이 나왔다고, 적나라한 말을 덤덤하게 했다.
원하지 않은 자식이긴 했지만 서청수는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게 인간의 부성애인지, 혹은 부끄러운 진실을 감추기 위한 위선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서청수는 적지 않은 생활비를 서원웅의 어머니에게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서원웅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잘 자랐다.
덕분에 명문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청수는 자신의 후배가 된 아들에게 눈길이 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서원웅의 선배가 될 민승기에게 슬쩍 귀띔했다.
내 아들을 에피니키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래서 새터에서 민 선배가 그렇게 말했던 거구나.”
대찬은 그제야 감을 잡았다.
민승기는 새터에서 만난 대찬에게 에피니키온에 들어오라 권유했다.
대찬은 기쁜 마음으로 그걸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금방 교분을 쌓은 서원웅에게도 에피니키온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민승기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얘는 우리가 너보다도 먼저 점찍었던 친구야.’
대찬은 그 의미를 내내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그랬구나…….”
서원웅이 대찬에게 고가의 옷가지를 아무 부담 없이 사 줬던 것도 이해했다.
재벌 회장이 아버지라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먼저 얘기하지 않아서 미안해. 속이려던 생각은 없었어.”
“아니야. 나라도 선뜻 얘기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털어놓으니까 편하다. 내내 힘들었거든, 가장 친한 친구한테 가장 중요한 비밀을 감추는 게.”
홀가분해진 서원웅의 표정이 대찬으로선 기꺼웠다.
대찬도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편해졌다니 됐어.”
“혹시 이것 때문에 내가 괜히 불편하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불편은 무슨. 서원웅은 서원웅이야.”
대찬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자 서원웅은 기분 좋은 한숨을 쉬었다.
대찬은 선선히 서원웅의 비밀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심장은 쿵쿵 뛰었다.
예상 밖의 사연이었다.
필래그룹의 서청수 회장은 재벌답지 않은 바른 품성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청수, 맑은 물이라는 그의 이름이 잘 어울린다는 평가가 주류였다.
이번 손찌검 황태자 사건 때도 그랬다.
일이 터지자 서청수 회장은 후계자인 서승학을 필래건설 상무로 내보냈다.
모래바람이 불어 대는 리비아의 건설 현장으로 좌천시켰다.
그래서 서승학을 욕하는 사람들도 서청수에 대해서는 악의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 양반이 잘도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다녔네.’
소위 있는 놈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기는 했다.
그런 부끄러운 과거의 소생인 서원웅을 꺼릴 만도 했다.
그럼에도 내놓은 자식인 서원웅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다.
일말의 양심은 있으니 아주 낙제는 면한 셈이었다.
대찬은 서원웅의 말을 곱씹다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아버지랑 따로 연락은 해?”
“아니,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은 없어.”
아무래도 재벌 회장의 체면이 있으니 그러겠다 싶었다.
“그래도 돈은 넘칠 정도로 주더라.”
대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보탤 말이 없었다.
서원웅은 최재한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았다.
대찬보다는 마음이 덜 성숙한 최재한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대찬과 서원웅은 큭큭 웃었다.
에피니키온이 돌파구를 마련하는 사이에 학보사의 펜촉은 다소 무뎌졌다.
하지만 총학 차원에서의 우회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익명의 대자보가 학내 게시판에 부착되었다.
-학내 위화감을 조성하는 에피니키온, 이대로 괜찮습니까?
이러한 제목의 대자보를 대찬은 총학의 술수로 간주했다.
내용이야 뻔했다.
학보사에서 기사로 낸 내용을 적당한 수사와 미사여구로 치장했을 뿐이다.
에피니키온이 학교에는 쥐뿔 기여하는 것도 없으면서 떵떵거리고 지낸다는 게 요지였다.
고원대라는 소속감보다는 에피니키온이라는 소속감이 우선하는 동아리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근래 발생한 필래그룹의 스캔들도 적당히 버무려졌다.
필래그룹의 문제가 에피니키온의 문제인 것처럼 호도되었다.
“아, 이 새끼들 진짜 가서 지랄을 해 줘야 한다니까?”
김산하는 팔목을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기세였다.
“야, 내가 대외협력국장이니까 이 새끼들한테 가서 쇼부 치고 올게. 말리지 마.”
“대외협력국장이지 대외협박국장이 아니잖아요. 일단 참으세요.”
대찬은 김산하를 뜯어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