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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2화 (31/556)

난 할 수 있어 32화

민승기의 말에 김산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알아서 기어야지, 뭐.”

“아이템 잡느라고 또 골머리 앓겠네.”

김산하가 민승기의 말에 공감했다.

“차라리 범위를 정해 주면 모를까, 창업 아이템 찾아봐라 하고는 말을 안 해서 더 막막하다니까.”

“기업 이미지를 제고할 소품을 만드는 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꽁한 표정으로 장고에 빠진 민승기와 김산하에게 대찬이 말했다.

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미지 제고할 소품?”

“네. 필래에서는 간단하게 요구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는 않아서요.”

민승기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이 1억은 단순한 선심은 아닐 거예요. 물론 에피니키온의 선후배 관계가 끈끈하긴 하지만, 1억 버리는 셈 치고 주지는 않을 겁니다.”

김산하는 턱을 괴고 대찬의 말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회사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템을 원할 거예요. 최근 있던 일 때문에.”

대찬이 말한 최근 있던 일은 필래그룹 재벌 3세와 관련된 구설수를 의미했다.

필래푸드 사장, 서승학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필래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서청수 필래그룹 회장의 장남이기도 했다.

서승학이 비서에게 폭언을 하고, 심지어 손찌검까지 서슴지 않았던 정황이 포착되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비서는 서승학보다 훨씬 연상이었다.

30년 가까이 필래그룹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다.

돌아온 대가가 폭언과 손찌검이었으니 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앙심을 품은 비서는 그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세간에서는 이를 ‘손찌검 황태자 사건’이라고 부르며 분노했다.

이 때문에 필래그룹의 이미지는 급전직하했다.

이번 자금 지원도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게 대찬의 추측이었다.

“대학 창업 동아리를 지원하고, 거기서 마련된 아이템을 내세워 청년을 후원하고 소통, 화합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손찌검 황태자 이미지를 지워 보겠다?”

김산하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승기 역시 대찬의 분석에 동의했다.

“일리가 있네.”

“그래서 아이템을 내는 것만으로도 필래에 도움이 되긴 할 테지만, 이미지를 제고할 아이템이면 금상첨화겠죠.”

대찬의 말에 민승기와 김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럴듯하다며 입을 모았다.

“좋아. 조대찬 의견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회의를 해 보자.”

민승기는 그렇게 가닥을 잡기로 했다.

얼마 뒤, 필래그룹으로부터 에피니키온에 1억 원을 기탁하겠다는 공식적인 통보가 도착했다.

이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정상적으로 모든 절차가 이뤄졌다.

에피니키온 부원들의 회의는 대찬을 중심으로 의견을 모으기로 결정했다.

대찬도 자신의 생각이 십분 반영되는 이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었다.

* * *

“야, 너네 괜찮냐?”

전공 수업을 마치고 에피니키온 부실로 향하려던 최재한에게, 그와 같은 국문과 동기가 물었다.

최재한은 멀뚱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뭐가?”

“에피니키온 말이야. 학보사 있는 종훈이가 그러던데? 이번에 에피니키온 골 좀 아플 거라고.”

그 말에 최재한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라고? 학보사에서 갑자기 왜?”

“나야 모르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과한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었다.

최재한은 찜찜한 표정으로 부실로 향했다.

그가 접한 소식을 부원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최재한의 말에 부원들이 동요했다.

민승기는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학보사에서 우릴? 왜?”

그 말에 적절한 대답을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간 학보사와는 뚜렷한 접점이 없었다.

에피니키온은 에피니키온이었다.

학보사는 물론이고, 교내의 다른 집단과도 그다지 얽혀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재한발 소식은 부원들에게 뜬금없기만 했다.

학보사는 교내의 언론이었다.

언론은 문제를 다룬다.

학보사가 에피니키온을 겨냥했다는 건 당연히 달갑지 않았다.

민승기는 총무국장을 바라봤다.

“우리 뭐, 돈 문제로 털릴 거 있어?”

“아니. 우리 다 영수증 처리하고 사용처 밝히고 있는데?”

그의 시선은 다음으로 김산하에게 향했다.

“최근에 우리 학보사하고 트러블 생긴 거 있었어?”

“응? 아, 아니, 딱히…….”

김산하의 대답은 개운하지 않았다.

민승기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진짜 없어?”

“좀 걸리는 구석이 있긴 한데.”

“뭔데?”

김산하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쪽 잘못은 아니고.”

“아니고?”

“최근에 총학 쪽에서 비리 사건 터진 거 알지?”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간부 사퇴하고 난리도 아니었잖아.”

며칠 전, 총학생회 내부에서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축제에 무대설비를 담당할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총학생회가 특정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고 특혜를 줬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나은 업체가 있었음에도 특정 업체에게 일감을 몰아줬다는 일이 최근에 폭로되었다.

이 때문에 학내 여론이 시끌시끌했다.

이에 총학은 외부 섭외를 담당하던 간부를 사퇴시켰다.

하지만 이게 한두 해 사이의 일이 아니라는 게 다시 드러났다.

그 때문에 총학 간부 전원이 사퇴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때였다.

민승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게 뭐?”

“이번에 학보사 편집장이 바뀌었는데, 걔가 총학생회장이랑 가까운 사이래.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다나.”

김산하가 그렇게 말하자 민승기의 시선이 잠깐 대찬과 최재한에게 머물렀다.

그들을 본 민승기는 확신했다.

“총학생회장하고 학보사 편집장도 죽고 못 사는 사이겠군.”

“그걸 미루어 볼 때…….”

“총학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우리 쪽으로 돌려 보겠다는 거지?”

김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건수가 대체 뭘까? 책잡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우린.”

에피니키온이 학보사에 비판받을 일은 없었다.

회계도 투명했고, 애초에 학교에 누를 끼칠 환경이 아니었다.

에피니키온은 철저히 학교에서 재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자체적으로 선후배끼리 끈끈한 관계로 돌아가는 조직이었다.

대체 학보사가 왜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은 거지?

그 의문에 누구도 뾰족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말단으로서 침묵을 지키던 대찬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필래에서 지원한 1억 때문일 거예요.”

“뭐?”

부원들의 시선이 대찬에게 쏠렸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대찬은 멋쩍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거밖엔 없어요, 학보사에서 트집 잡을 만한 게.”

“그게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성공한 선배가 동아리 후배들을 위해 거액을 쾌척했다.

미담이면 미담이지 에피니키온을 비난할 건수가 될 수는 없었다.

부원들의 의아한 시선과는 달리 대찬의 눈빛은 분명했다.

“손찌검 황태자 사건이요. 그게 트집 잡을 만한 건수가 될 거예요.”

“그건 필래 내부의 문제지, 우리랑은 관계가 없잖아.”

“그걸 도화선 삼아서 우릴 공격할 겁니다. 총학은 학내의 여론에도 관심이 있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에요.”

민승기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더욱 좁혔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단단히 잡혔다.

“그럼 뭔데?”

“지금 총학 비리 사건을 논의하려고 설치한 윤리 심판 회의 있죠? 그게 문제예요.”

본래 총학은 이 문제를 총학 산하의 윤리 위원회에서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총학이 통째로 썩었는데 내부에서 해결이 되겠느냐는 것이 여론이었다.

그래서 중앙 동아리 회장들과 학보사 편집장 등이 추가로 참여한 윤리심판회의가 설치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총학생회장 포함 간부 전원이 사퇴하고, 조기선거를 시행하자는 안이 주류였다.

동아리 회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한 민승기는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다 먹고살기 바쁜 학생들이 총학이 지지고 볶는다고 해서 가두행진을 하거나 하진 않아요. 실질적인 문제는 윤리 심판 회의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찬의 말을 경청했다.

다른 부원들도 숨죽인 채였다.

대찬은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총학 간부들과 동아리 회장들이 주류를 이룬다지만 신뢰를 잃은 간부들은 자중할 수밖에 없고, 결국 동아리 회장들이 총학의 운명을 결정할 겁니다.”

“그렇지.”

“필연적으로 총학은 동아리 회장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어요. 필래를 걸고넘어져 우릴 치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민승기의 거듭되는 질문에 대찬은 막힘없이 줄줄 읊었다.

에피니키온 부원들은 대찬의 말이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대찬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며칠 뒤, 학보 1면에 기사가 실렸다.

-‘손찌검 황태자’ 필래, 창업 동아리 에피니키온에만 1억……후배 차별?

당연히 당하는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불쾌했다.

에피니키온의 선배니까 에피니키온에게 지원을 해 주는 건 당연했다.

그걸 두고 에피니키온에‘만’이라든지 후배 차별이라든지 운운하는 건 부당했다.

그런데 학보사의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에피니키온, 작년 1.8억 예산 집행……. 나머지 동아리 총합보다 많아

-선배는 ‘몰빵’, 후배는 ‘독고다이’…에피니키온, 우리 학교 동아리 맞아?

“이게 도대체 뭐가 문제야?”

김산하는 얼굴이 벌게져서 분통을 터트렸다.

비단 김산하의 다혈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학보사의 보도 행태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에피니키온이 선배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건 사실이었다.

에피니키온의 재학생들이 학내 집단들과 깊이 교류하지 않는, 학보사의 표현대로 독고다이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 순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학보사의 기사들은 위화감을 조성했다.

에피니키온을 재수 없는 귀족으로 묘사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그들의 기득권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식의 기사가 실렸다.

사실과 달랐다.

학보사의 기사는 예상보다도 반향이 컸다.

대찬이 살았던 2010년대 후반에는 학보사라는 존재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잊혀 갔다.

하지만 지금은 2002년이었다.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 자체가 생활 필수품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학내여론을 모으는 데 있어 학보사의 존재감이 살아있었다.

학보사가 작정하고 에피니키온을 물어뜯자 학내 여론이 꿈틀거렸다.

거기에 총학의 지원까지 가세하니 설상가상이었다.

대찬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음 일을 예상했다.

“아마 이 다음은 우리를 털어서 다른 동아리들 배를 불려 주는 수순으로 진행될 거예요.”

“야, 제발 예상하지 마!”

민승기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대찬의 입을 막았다.

대찬의 말은 말하는 족족 실현되었다.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계속해서 끔찍한 미래를 말하니 민승기의 두통이 더 심해졌다.

그래도 대찬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마 샐러리캡 제도를 도입하자고 할 것 같아요.”

“샐러리캡이라니?”

김산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스포츠광을 자처하는 민승기가 나섰다.

“미국 프로 농구 같은 데서 쓰는 방법인데, 각 팀의 연봉 상한선을 정해 놓는 거야.”

“연봉 상한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로 치면 외부 지원금이 되겠지. 지원금 상한선을 정해 놓고, 그 상한선을 넘는 지원금은 총동아리 연합회가 회수해서 각 동아리가 나눠 갖는 거지.”

민승기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찬을 바라봤다.

“네가 말한 게 이거 맞지?”

“네, 맞아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이에요. 그리고 학보사에서 기사 내는 걸 보니까 딱 그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김산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 선배들도 지원금을 딱 끊을 거 아니야. 그게 다른 동아리한테 무슨 득이 돼?”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음… 하향평준화에 따른 심리적 안정감?”

“엿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거죠. 그렇게 돼도 다른 동아리들이 피해 보는 건 없으니.”

최재한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마디 참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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