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1화
500주라고 해도 한 주당 가격이 얼마 나가지 않아 큰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뭐든 챙겨 주려고 하는 마음만으로도 대찬은 기뻤다.
“환송회도 거하게 할 테니까 빼지 마. 곽 기장님이 제대로 쏜다고 며칠 전부터 호언장담하고 계시니까.”
곽 기장은 대찬의 설득으로 황림 블렘페러6의 은폐된 진실을 증언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광훈 사장과 간단한 면접을 거쳐 믹서기 신설 생산 라인의 책임자로 기용되었다.
황림에 회심의 일격을 날리기도 하고 다시 직장을 얻게 되었으니, 곽 기장에게 대찬은 제2의 인생을 살게 해 준 구세주였다.
그런 까닭에 성대한 환송회라도 열어 주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이 곽 기장의 마음이었다.
물론 대찬도 그 호의마저 물리칠 생각은 없었다.
공식적으로 업무가 끝나는 그때까지 대찬은 일에 매달렸다.
퇴근해서는 틈틈이 외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야근 뒤에는 공부고 나발이고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송골송골 물기가 맺힌 찬 맥주 한 캔을 즐기는 게 자연스러운 욕구였다.
그러고는 다음 날의 출근에 몸부림치며 잠들기 바빠야 했다.
그런데 대찬은 수면 시간을 쪼개 야근으로 못다 한 공부에 투자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지금이라고 해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피로와 귀찮음을 무릅쓰고 책상에 앉을 정도의 의지는 있었다.
두 번째 고교 생활을 하면서 무리할 정도로 노력했던 경험을 몸이 기억했다.
그러니까 노력의 관성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듯 지나칠 정도의 자기 계발이 가능했다.
대찬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의자를 책상 앞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지루한 공부를 하면 바로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미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틀어 놓고, 그 대사를 듣고 말하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But if you don’t run because you think it’s gonna be too hard or you think you’re gonna lose, Jed, I don’t even want to know you.”
“벗 이퓨 돈 런 비커스 유 띵크… 유 띵크 유어 거너 루즈……. 아 돈 이븐 원 노 유…….”
2시간여를 졸음, 영어와 씨름하던 대찬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꺼졌다.
둔해지던 발음은 이내 멎었다.
소변이 마려워 자다가 깬 어머니는 새벽 4시가 되도록 불이 꺼지지 않은 아들의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대찬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드라마는 진즉에 엔딩 크레딧까지 다 올라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엎드린 뒷모습을 뿌듯함 반, 안쓰러움 반으로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어머니는 대찬의 등을 얌전히 두드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그를 깨웠다.
“대찬아, 누워서 자. 응?”
“네? 네…….”
대찬은 반쯤 뜬 눈으로 비틀비틀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엎어졌다.
어머니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늦도록 켜져 있던 불을 껐다.
3시간 뒤면 다시 켜질 불이었다.
대찬의 퇴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그즈음 수영실업은 판매가 부진하던 선풍기 라인을 급히 믹서기 라인으로 바꾸었다.
그러고는 약소하나마 테이프 커팅식까지 이뤄졌다.
오광훈 수영실업 사장과 삼라물산 부장이 가장 상석을 차지했다.
그 뒤로 오찬식 팀장이 섰다.
대찬은 계약직, 그것도 고작 2달짜리 계약직이었다.
그런 주제로는 파격적으로 테이프 커팅식에 참석했다.
필래유통에 몸담았을 때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대열에 껴서 흰 장갑을 들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테이프를 가위로 자르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간헐적으로 터지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박수 치는 노동자들 대열에 선 진위생은 대찬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대찬이 받은 500주의 수영실업 주식은 커팅식 이후로 값이 치솟았다.
쏠쏠한 수입이었지만 대찬은 묵혀 두기로 했다.
당장 주식을 팔아치울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급하지도 않았다.
이 500주는 단순히 숫자로 따져지는 재물이 아니었다.
대찬과 수영실업 사이의 친분을 증명하는 증거물이었다.
대찬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다.
이미 인생의 궤도가 많이 틀어져 버렸다.
그런 만큼 훗날 수영실업과 다시 인연을 맺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마 500주 이상의 가치가 미래에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건 순전히 감이었는데, 대찬은 그 어떤 논리적인 분석보다 그 감을 신뢰했다.
대찬의 업무가 8월 31일부로 종료되었다.
오광훈 사장은 직접 관리영업팀으로 와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짧고 굵게 있다가 가는구먼. 아쉬워.”
“사장님 배려 덕분에 귀한 경험 했습니다.”
대찬도 웃으면서 악수에 응했다.
“우리도 자네와 함께해서 아주 좋았네.”
“종종 찾아봬도 되죠?”
“그럼! 만사 제쳐 놓고 만날 거야.”
오찬식 팀장도 아버지인 오광훈 사장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조대찬 씨는 어디 가서도 다 잘할 거야. 그간 수고 많았어.”
“팀장님 밑에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끝까지 너스레는.”
팀장과 인사를 나눈 대찬은 이어 관리영업팀 직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대찬과 곧잘 장난치기도 했고, 그의 중국어 과외 선생님이었던 진위생은 그답지 않게 코를 훌쩍거렸다.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오히려 대찬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디 죽으러 가는 거 아니거든요? 왜 울어요.”
“울긴 누가 운단 말임까.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 검다.”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듯한 걸 대지. 애도 안 믿을…….”
대찬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하는 와중에 진위생이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이 기분 좋게 와! 웃었다.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을 짓던 대찬도 이내 진위생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푸근하게 웃었다.
“믹서기 생산 좀 안정적으로 되면 술 한잔해요? 제가 살게요.”
“당연히 조대찬 씨가 사야 되는 거 아님까. 누구을래 이 고생을 하게 되았는데.”
“제대로 쏠게요. 기대하세요.”
대찬은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진위생의 얼굴을 보고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자, 닦아요. 이건 선물이에요.”
대찬은 그렇게 재회를 기약하며 수영실업을 떠났다.
정문 밖까지 배웅하려던 사람들을 대찬은 억지로 떼어내고 홀로 걸어 나왔다.
환송회는 이미 며칠 전 거창하게 치른 터였다.
삼라물산과의 계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바빠지기 전에 치렀다.
대찬은 혼자 천천히 수영실업의 밖으로 걸었다.
늦은 저녁 시간, 하늘은 어둑해져 갔다.
대찬은 어스름이 지는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고 다시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그때 불온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몸을 틀려는 순간,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대찬의 입을 가로막았다.
한 사람이 아닌 듯 또 다른 손길이 대찬의 몸을 결박했다.
특전사 출신으로 남들보다 나은 체력과 기술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대찬이었다.
하지만 기습에는 장사 없었다.
“으읍!”
대찬은 몸을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더 강한 결속이 따를 뿐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의 주인이 대찬의 귀에다 대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따라와.”
대찬이 곁눈으로 그의 얼굴을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쉽게 대찬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대찬은 급히 몸을 비틀며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풋.”
그러자 웃음소리가 팽팽한 긴장을 탁 풀어 버렸다.
대찬은 그 웃음이 황당할 뿐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나서야 대찬도 그들처럼 웃을 수 있었다.
“아, 뭐야…….”
대찬은 다리에 힘이 탁 풀려서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마강국과 최재한이었다.
마강국은 킥킥거리면서 대찬에게 물었다.
“쫄았어?”
“뭘 물어봐. 완전 쫄아갖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데.”
최재한이 웃으면서 대찬보다 빨리 대답했다.
대찬은 한숨을 돌리고 피식 웃었다.
“왜 왔어, 여기까지.”
최재한은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고 말했다.
“왜긴! 한턱 쏘라고.”
“쏘긴 내가 왜 쏴.”
“야, 정 없게 이럴 거야? 월급에 금일봉에 주식까지 받았다며.”
최재한은 마강국을 흘끗 보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 강국이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이렇게 되니 대찬도 할 말이 궁했다.
“그, 그건 그렇지.”
“그런데 안 쏘시겠다?”
“마강국은 자격 있다 치고, 너는 뭐 했다고 그렇게 당당해?”
그러자 최재한은 세상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와, 한 게 없으니까 얻어먹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야?”
“응.”
“이렇게 팽 당하는구나. 10년 우정 부질없다!”
대찬은 지끈지끈 오르는 두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알았어. 가자. 내가 산다.”
“뭐 살 거야?”
최재한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찬에게 물었다.
그러자 대찬은 뭘 기대하냐는 투로 대꾸했다.
“삼겹살.”
“아이고! 10년 우정…….”
“아, 닥쳐! 참치 살게, 참치 산다고.”
최재한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으면서 어깨동무를 한 손에 힘을 주었다.
“역시 쪼대밖에 없다니까.”
그렇게 최재한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대찬을 이끌었다.
마강국도 피식 웃으며 그 둘을 뒤따랐다.
결국 대찬은 지갑을 탈탈 털어 참치회와 그에 어울리는 술을 사 냈다.
대찬은 기습공격으로 지갑이 털렸다고 꿍얼거리면서도, 즐겁게 식사하는 최재한과 마강국을 보고 언뜻 미소도 비쳤다.
‘그래, 벌어서 뭐하냐. 이럴 때 써야지.’
대찬은 웃음을 머금고 친구들을 바라봤다.
“야, 많이들 먹어라.”
그 말에 최재한과 마강국은 대찬을 보며 씩 웃었다.
그들은 정말로 많이 먹었다.
2학기가 시작되었다.
대찬은 과음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학교로 향했다.
2학기도 마찬가지였다. 학점 관리에 모든 힘을 쏟지 않았다.
여전히 학교 생활의 중심축은 에피니키온이었다.
대찬이 에피니키온에 매달리는 건 단순한 동아리가 아님을 거듭 통감하는 탓이었다.
그는 대외협력국 소속으로 선배들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담당했다.
어느 날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에피니키온 대외협력국 맞습니까.”
남성의 정제된 말투였다.
대외협력국의 막내이기도 하고, 25기 중에 가장 야무진 대찬의 휴대폰 번호가 대외협력국의 대표번호로 쓰여 있었다.
“네, 맞습니다.”
“필래그룹 비서실입니다.”
필래그룹은 에피니키온 창립 멤버인 서청수가 회장으로 있는 기업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이었다.
그러니까 서청수는 전형적인 재벌이었다.
창업주인 아버지에 이어 2대째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고객을 반드시 오게 만들라고 해서 반드시 필 자에 올 래 자를 쓴다고 했다.
세계에 꽃처럼 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도 했다.
표어는 필래로 필래.
대찬은 이 연락이 선배인 서청수 회장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생각하고 긴장 속에 응대했다.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동아리 전체에 해악을 끼칠지도 모른다.
“아, 넵.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회장님께서 거액의 지원금을 기탁하시겠다고 합니다.”
“선배님의 아낌없는 사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걸로 에피니키온 차원에서 좋은 창업 아이템을 강구해 보시길 원하십니다. 회장님께선 1억 원을 기탁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홍역처럼 지나갔던 창업 콘테스트의 총 자본이 1억이었다.
그런데 필래그룹 단독으로 1억 원을 쾌척하겠다고 하니, 과연 에피니키온의 선후배 사랑이 끈끈하다고 대찬은 혀를 내둘렀다.
또 한편으로는 재벌 총수가 후배들을 위해 1억을 내놓는 게 큰 출혈은 아니라 여겨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1억은 에피니키온에 있어 매우 큰 액수였다.
자연히 대찬의 허리가 굽혀졌다.
“감사합니다. 간부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간부들이란 회장 민승기 이하 각 국의 국장들을 의미했다.
“예. 추후에 또 의논할 일이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찬은 즉시 민승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반응은 좋았다.
민승기와 함께 있던 김산하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또 이번 학기 꾸려 가야겠네.”
“1억이나 몰아주셨으니 회장님 의중에 따라 드려야지. 이번 학기 프로그램 싹 다 취소하고 우선 창업 프로그램에 몰두하자.”
민승기는 일의 경중을 알았다.
필래그룹의 1억 원의 조건은 이걸 자본으로 해서 창업 아이템을 강구하라는 것이다.
에피니키온은 철저한 을의 위치에서 그 주문을 받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