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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30화 (29/556)

난 할 수 있어 30화

오찬식은 빙긋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자 관리영업팀의 사원들이 대찬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뭐 이런 회사가 다 있어…….’

대찬은 겸연쩍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부장은 대찬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이번 계약의 젊은 주역은 성함하고 직급이 어떻게 되시는지?”

“이름은 조대찬이고, 직급은 사원입니다.”

오찬식이 부연했다.

“대학 1학년인데 이번 방학만 잠깐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회사 생활을 전혀 안 했는데도 일처리가 꼼꼼하고 확실하더군요.”

“예? 이제 대학 신입생이라고요?”

부장은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예. 저희 같은 작은 회사에 둘 재목은 아니죠. 부장님께서 눈여겨보셨다가 나중에 삼라에 스카웃 해 주십시오.”

“허허, 놀랍군요.”

대찬은 오찬식의 파격 제안에 놀라울 뿐이었다.

정사원도 아니고 이제 대학에 들어간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런 이에게 이런 큰 건을 맡겼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회사의 위신에 생채기가 갈 일이었다.

그래서 대찬도 자신의 직급을 사원이라고만 말하고 사족을 달지 않았다.

그런데 오찬식은 홀라당 모든 걸 실토하면서 대찬을 추켜세웠다.

대찬의 상식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을 파격이었다.

덕분에 대찬을 보는 삼라 부장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대기업 월급쟁이의 보는 눈빛이 달라져 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대찬은 그럼에도 오찬식의 이런 앞뒤 안 재는 배려가 고마웠다.

제 아들이 칭찬받는 장면을 보려고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들던 오광훈 사장은 예상 밖의 전개에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삼라물산 부장이 돌아가고 나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야! 이게 대찬이 네 작품이었냐!”

“아, 아니에요. 팀장님이 다 하신 일…….”

대찬은 황급히 오찬식에게 공을 돌렸다.

심보 뒤틀린 사람이라면 아들의 공을 대찬이 가로챘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광훈은 대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겸손 떨지 마! 그게 더 재수 없어!”

“예?”

“자기가 했으면 자기가 했다고 떳떳하게 말을 해야지! 사내새끼가 말이야.”

묘한 이유로 날아오는 꾸중에 대찬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오광훈은 다시 그렇게 윽박지르고는 관리영업팀 사원들을 향해 말했다.

“큰 건수 해 줬어! 대박이야, 대박! 여기 법인카드 놓고 갈 테니까 다들 시간 맞을 때 꽃등심이라도 씹으라고.”

그러자 사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광훈은 씩 웃으면서 다시 사장실로 돌아갔다.

‘웃기는 회사야.’

대찬의 얼굴에도 저절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날, 오찬식 팀장 이하 관리영업팀 사원들은 기분 좋게 축배를 들었다.

자리에는 임신으로 휴직 상태였던 성 대리도 부른 배를 안고 참석했다.

“휴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더니, 이러다 저 책상 빼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이런 친구를 데려왔어요?”

성 대리는 대찬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좀 덜었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는 걸요. 예쁜 아기 무사히 잘 낳으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고원대생이라면서요? 나중에 우리 아기 과외 부탁해도 돼요?”

그러자 오찬식 팀장이 싱겁게 웃으면서 가볍게 핀잔했다.

“성 대리, 아기가 과외 받을 정도 되면 대찬 씨도 아저씨야. 영영 대학생일 줄 아나 봐.”

“어머, 그렇네, 참.”

성 대리는 입을 가리고 민망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예요?”

“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황림정밀 쪽 빨대 말예요. 어떻게 접촉했어요? 어떻게 연락은 닿아도 얘기 끌어내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아, 그게요…….”

대찬은 빙긋 웃으면서 사정을 말했다.

대찬은 다가라40으로 둔갑한 블렘페러6가 안전사고로 단종되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황림정밀에서 꽤 긴 시간 근무했던 마강국을 불러 믹서기 생산 라인에서 근무했던 지인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강국의 인선은 매우 적절했다.

블렘페러6가 단종될 당시 권고사직을 당한 근로자였다.

믹서기 생산 라인의 관리자 격이었다고 하니, 대찬은 직감으로 그가 안전사고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해직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마강국이 귀띔하기를, 황서임의 괄괄한 성미가 그의 입에 자물통을 채웠을 것이라고 했다.

듣자하니 황서임의 일가친척 중에 조직 폭력배가 있다는 후문도 있다고.

울분은 치밀어 오르는데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찬은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우선 말없이 술 몇 잔을 나눴다.

용건을 먼저 꺼내지 않고 그의 속을 슬슬 건드렸다.

“살림은 좀 괜찮으십니까?”

대찬은 이미 마강국에게 전해 들어 그의 사정을 알았다.

나이 든 노동자를 우대해 주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살림은 엉망이었다.

대찬은 그의 하소연을 한참 듣고 화살을 황림정밀 쪽으로 돌렸다.

“참 나쁜 놈들 아닙니까. 회사에 그렇게 충성했는데 이따위 대우가 말이나 되나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면서 그간 다소 사그라졌던 적개심을 다시 일깨웠다.

그러자 슬슬 굳게 잠겼던 그의 입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 대찬이 지나가는 말로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갔다.

“선생님이 사람 잡은 것도 아닌데 왜 선생님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

대찬의 말에 그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대찬은 더 나아갔다.

“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잘사는 걸요.”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 꼴을, 선생님은 계속 보고만 계실 작정이십니까?”

“…하지.”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하지.”

고개를 들어 대찬과 눈빛을 맞닥뜨렸다.

그간의 슬픔과 분노가 점철된 눈빛이었다.

대찬은 덤덤히 그 눈빛을 바라봤다.

“그렇겐 못하지! 절대 못해!”

그는 온몸으로 진저리를 쳤다.

대찬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어떻게 돕겠다는 건가?”

“몇 달 전 있었던 믹서기 안전사고에 대해 진술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황림의 문제 다분한 믹서기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겁니다.”

대찬의 말에 그는 불신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그게 어떻게 날 돕는 일이지? 그건 자네 회사를 위한 일이잖나.”

“네, 부정하지 않지요.”

그러자 그는 대찬을 노려봤다.

“수영이나 황림이나 똑같아! 똑같이 돈 벌 궁리만 하는 속물들이라고!”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같겠습니까.”

대찬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선생님을 찾은 건 우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섭니다.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선생님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대찬의 목소리는 차분한 투였다.

“하지만 선생님께도 기회입니다. 저는 제 이익을 좇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도 선생님의 이익을 좇으십시오.”

“기회…….”

“네. 선생님의 힘으로 황림정밀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기회입니다.”

대찬의 말에 그는 풀썩, 풀 죽은 어깨를 아래로 꺼트렸다.

“그럼 뭐하나.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당장의 통쾌한 기분을 얻죠.”

대찬의 대답은 그에게 개운하지 않았다.

“그건 부질없는 쾌락이야.”

“네, 어쩌면 그럴지도요.”

대답의 무기력함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다인가?”

“아뇨.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졌다.

대찬은 그의 앞에 몸을 바짝 기울이며 말했다.

“저희 회사에서는 선생님께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 드리고자 합니다.”

“…뭐요?”

그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황림정밀에 대한 단발적인 복수보다 그에게 더 절실한 것이었다.

“저희를 도와주시면 수영실업은 선생님의 공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황림정밀과는 다르게요.”

무슨 이즘, 무슨 이즘, 모든 이념들의 꼭대기에 있는 게 소위 먹고사니즘이다.

그게 충족되지 못한 그에게 복수든 뭐든 다 공허할 뿐이었다.

대찬은 그걸 잘 알았다.

“일자릴 준다는 거요?”

“사장님께서 흔쾌히 그러시겠다 하셨습니다.”

대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했다.

그는 윗선에 운을 띄웠고, 오찬식 팀장과 오광훈 사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만일 황림정밀에 결정타를 먹여 삼라물산과의 계약을 따내면, 기존의 생산라인만으로는 물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라인 증설이 불가피했고, 관록 있는 관리자가 필요했다.

또한 삼라물산과의 계약을 따낸다면 그에게 지불할 인건비 정도야 푼돈에 불과했다.

여러모로 수영 쪽에서는 잃을 게 없었다.

“선택하십시오. 더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저한테 그럴 자격도 없고요.”

대찬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협상에서 말솜씨와 의전은 자질구레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아쉽지 않은 것이면서 남에게 아쉬운 걸 내주고, 그 반대를 취하는 것이 협상의 본령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길다면 긴 얘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결정은 사장님과 팀장님이 해 주신 거죠. 저는 말만 옮겼을 뿐이에요.”

최종적인 공로를 팀장에게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찬식 팀장은 씩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자자, 다 잘됐으니 건배합시다! 수영실업의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경쾌하고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영실업은 이 일로 크게 고무되었다.

일이 바빠졌지만 그만큼 수당도 톡톡히 주어졌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근무를 그만두도록 돼 있는 대찬에게도 두둑한 금일봉이 주어졌다.

두 달 치의 월급에 맞먹었다.

대찬의 지갑은 평범한 형편의 또래들에 비해 매우 두꺼워졌다.

“이거, 용돈 하세요.”

모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쥐여 드리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이게 웬 돈이냐?”

“아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에요. 많진 않아도 받아 주세요.”

“너 용돈 하기도 벅찰 텐데 뭐 이런 걸 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들의 호의를 물리치지 않았다.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마음이 중요했다.

어머니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아, 이런 걸 가지고 울긴 왜 울어!”

아버지는 짐짓 호통을 쳤지만 그도 뭉클한 건 마찬가지였다.

대찬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취직 이후 바쁜 일상에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다.

자주 찾아뵙지도, 두둑한 용돈을 드리지도 못했다.

학자금, 월세, 경조사비, 카드 값에 부모님 용돈은 내내 뒷전이었다.

당장 그럴듯한 직장을 얻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큰일을 해내 모처럼 생긴 여유로 부모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어서 뿌듯하고 뭉클했다.

삼라물산으로부터 발주받은 물량을 소화해 내기에 빡빡한 일상이 이어졌다.

물론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건 현장의 블루칼라들이라 그들이 가장 바빴다.

점심시간에 마주친 진위생은 대찬에게 따가운 눈빛을 쐈다.

“아주 공장이 미쳐 돌아감다. 아주 죽을 지경임다!”

“아, 그래도 일 없는 것보단 좋잖아요.”

“좋긴 뭐을래 좋슴까? 골병 들믄 조대찬 씨가 책임 질 검까?”

대찬은 빙글빙글 웃으며 진위생을 놀렸다.

“이걸 어쩌나. 저는 이번 달까지만 하고 회사 나가는데요?”

“말이나 못하믄 덜 밉기라두 하지.”

대찬은 킥킥, 소리 내 웃었다.

물론 현장 노동자들만큼은 아니라지만, 사무실의 화이트칼라라고 해서 여유롭지는 않았다.

수영실업의 4층짜리 작은 사옥은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근무하기로 정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대찬 역시 야근 대열에 동참했다.

오찬식 팀장은 그의 책상 위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전역 앞둔 말년 병장이 뭐 그렇게 열심히 해?”

“말년 병장은요, 무슨. 그래봤자 팀 막낸데요. 열심히 해야죠. 커피 잘 마시겠습니다.”

오찬식은 종이컵을 입술에 살짝 물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맘 같아서는 정직원 권유하고 싶은데 말이야.”

“에이, 콩깍지 너무 단단히 쓰이셨네요. 박수 칠 때 떠나야겠어요.”

오찬식은 쩝, 입맛을 다셨다.

“사장님께서 우리 회사 주식 500주를 조대찬 씨한테 주시겠대. 금일봉은 너무 단발적이야.”

대찬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식까지는 괜찮은데요…….”

“아니야. 대찬 씨가 성사시킨 일은 우리 회사의 장기적인 성장을 이끌어 낼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주역인 대찬 씨도 장기적인 이득을 취해야지.”

“계속 쥐고 있겠습니다. 조만간 돈방석에 앉겠어요.”

대찬의 웃음에 오찬식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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