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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9화 (28/556)

난 할 수 있어 29화

황서임은 미소를 띠며 능숙한 투로 목소리를 냈다.

“저희 제품 다가라40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델명이 다가라라니, 제품의 장점이 한 번에 캐치되는군요. 역시 황림정밀이 이런 쪽 센스가 좋습니다.”

황서임과 면식이 있는 듯 부장은 PT 중간에 친근한 농을 던졌다.

황서임도 여유 있게 넙죽 농을 받았다.

“센스 좋은 삼라물산이 센스 좋은 황림과 같이 가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진지한 어필이 들어갔다.

객관적 수치를 근거로 내세워 경쟁 업체들의 앞선 PT를 깔아뭉갰다.

“다가라40의 회전수는 2만RPM에 달합니다. 저렴한 가격을 견지하면서도 이만 한 회전수를 확보한 건 지금 PT에 나선 업체 중 황림이 유일합니다.”

황서임은 경쟁 업체들의 사원들을 바라보며 우위를 확신했다.

그 확신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우러나왔다.

그 미소는 오찬식, 그리고 대찬에게 오래 머물렀다.

“믹서기의 본질은 절삭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삭력은 회전수로부터 나옵니다. 황림은 이 본질에서 모든 업체들을 따돌렸습니다.”

그녀는 자신감 어린 눈빛으로 삼라물산 부장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부장은 박수를 치며 오찬식 팀장 쪽을 바라봤다.

“확실히 칼날 회전수에서는 황림정밀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습니다. 이제 수영실업만 남았는데, 어떤 PT를 보여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오찬식 팀장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대찬은 눈빛으로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오찬식은 그의 응원에 역시 눈빛으로 화답했다.

“수영실업 제품, 믹스원360에 대한 PT를 시작하겠습니다.”

오찬식은 차분한 목소리로 PT를 개시했다.

대찬이 2010년대의 세련된 감성과 10년 차 사원의 숙련된 솜씨로 만든 자료였다.

일목요연했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도구일 뿐이었다.

본질은 역시 황서임의 말대로 성능, 그중에서도 회전수였다.

역시 이 부분이 해소되지 않은 관계로 삼라물산 직원들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다.

오찬식은 그들의 표정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면서 정공법으로 나섰다.

“저희 제품은 황림정밀에서 선보인 제품에 비해 절삭력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산수입니다. 어떤 감언이설로도 숫자를 은폐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삼라물산 직원들은 PT에서 눈을 떼고 탁자에 놓인 애먼 서류나 뒤적였다.

본질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본인의 입으로 실토하였으니 더 볼 일 없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오찬식의 표정과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오찬식의 목소리가 사뭇 달라졌다.

그는 한결 편해진 음성으로 부장에게 물었다.

“부장님, 야구 좋아하시죠?”

“네? 아, 네……. 근데 뜬금없이 야구 얘기는 왜…….”

“구속, 공의 속도는 투수의 필수적인 미덕입니다. 그렇죠?”

부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럼 구속이 빠른 투수는 무조건 훌륭한 투수입니까?”

부장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당황하면서도 야구광답게 대답했다.

“그렇진 않지요. 공이 빨라도 제구가 안 되면 좋은 투수가 아니죠.”

“그렇습니다. 황림정밀의 PT가 이것과 같습니다. 황림정밀은 빠른 구속만 내세웁니다. 정교한 제구력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저격당한 황서임이 욱하는 마음에 끼어들었다.

“억지 비유로 판을 흐리지 마세요!”

오찬식은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억지 비유가 아닙니다. 제구력이 엉망인 강속구 투수는 살인기계나 다름없습니다. 황림정밀의 다가라40에게 알맞은 비유입니다.”

“네거티브가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황서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따졌다.

부장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며 일단은 오찬식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지금은 수영실업의 시간입니다. 따져 볼 말이 있거든 차후에 하시죠.”

“으음…….”

갑의 지시에 괄괄한 성미의 황서임도 다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오찬식은 계속 말을 이었다.

“황림정밀은 작년 연말, 믹서기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모델명은 블렘페러6. 회전수는 다가라40과 마찬가지로 2만RPM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황서임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런데 블렘페러6은 출시한 지 두 달 만에 단종되었습니다.”

“음?”

“홍보성 기사를 냈던 언론 기사도 삭제되었고, 황림정밀의 홈페이지에서도 삭제되었습니다.”

“허어.”

오찬식은 황서임 쪽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이를테면 강속구 신인 투수를 등판시켰다가 황급히 다시 2군으로 내린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구가 잡히지 않아서?”

부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네. 공은 빠른데 그게 사람 잡는 살인기계라 그런 거죠.”

“자사 제품만 소개하세요! 그런 자극적인 흑색선전이 통할 거 같습니까!”

오찬식은 황서임의 항변을 묵살했다.

“저희는 황림정밀의 믹서기 생산 라인에서 근무했던 전직 근로자를 만나 얘기를 들었습니다. 퍽 충격적이더군요.”

오찬식은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무리수였죠. 값싼 비용으로 그 정도의 절삭력을 확보하려다 보니 안전 문제에 취약해진 거예요. 빠른 속도를 부실한 본체가 버티지 못했어요.’

고요한 회의실에 변조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한 가정집에서 제품을 사용했는데, 칼날이 튕겨 나와 주부의 몸에 상처를 입힌 사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한 건이 아니라 여러 건이었죠.’

음성이 퍼질수록 황서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때 거액의 합의금을 물어주고 묻어 버렸어요.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단종시켜 버렸습니다. 그걸 중국에 내다 팔겠다고요? 미친 짓이죠.’

재생이 끝나자 오찬식이 덧붙였다.

“그 미친 짓을 지금 황림정밀은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삼라물산 역시 이 책임의 공범이 되겠죠.”

황서임이 급히 나섰다.

“저, 저 제품이랑 지금 출시한 신제품하고는 제원이 다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 사고는 고객의 부주의에 의한 거예요! 제품의 결함이 아닙니다!”

“제품에 자신이 있었으면 뒷돈을 찔러 주며 묻어 버리진 않았겠지요. 단종도 없었을 테고.”

“이익……!”

황서임은 입술만 깨물고 더 반박하지 못했다.

오찬식은 삼라물산의 부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희 믹스원360은 황림정밀의 제품보다 절삭력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안전성이 확보돼 있고, 친환경 소재와 인체 공학적인 디자인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오찬식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긴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공은 조금 느리지만, 정교한 제구력과 다양한 구종을 갖춘 투수와 공만 빠른 투수. 감독으로서 어떤 선수를 기용하시겠습니까. 야구에 문외한인 저도 정답을 알 것 같군요.”

오찬식은 그렇게 PT를 끝냈다.

삼라물산의 부장은 잠깐 고심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직원들이 일어났다.

“다섯 업체의 PT를 잘 들었습니다. 저희 삼라물산은 신중히 고심하여 파트너를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장님, 부장님! 이대로 끝내시면 안 되죠! 저희 측에게도 반론의 기회를 주세요!”

황서임이 다급하게 부장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부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기회는 공평하게 다 드렸습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오면 연락드리죠. 그럼 이만.”

부장은 매몰차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황서임은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수영실업 쪽을 노려봤다.

오찬식과 대찬은 모두 그 시선에 응답하지 않았다.

* * *

“아이고, 부장님이 다 찾아 주셨습니까.”

수영실업의 사장인 오광훈이 벌떡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삼라물산 부장에게 다가갔다.

부장은 웃으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오광훈에게 말했다.

“앞으로 바빠지실 텐데 위로차 방문했습니다.”

“위로는요, 무슨! 지금 전 직원 모두 의욕이 넘치고 있습니다!”

삼라물산은 중국에 대량으로 수출할 믹서기를 수영실업에게 맡기기로 했다.

수영실업 창사 이래 단일 사업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중국 쪽에서 반응이 좋으면 장기 계약도 검토해 보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수영 쪽 제품이 월등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PT가 제대로 한몫했어요. 전체적으로 퀄리티도 훌륭했고, 특히 황림 쪽 약점을 파고든 건 발군이었습니다.”

부장은 웃으면서 오광훈에게 말했다.

“PT를 오찬식 팀장이 맡아서 해 주셨죠? 따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아이고, 그럴 것까지야.”

“아닙니다. 아드님 한번 잘 두셨습니다.”

대형 계약을 따내고, 아들의 공치사까지 들으니 오광훈의 기분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오광훈은 으허허, 웃으면서 삼라 부장을 관리영업팀으로 안내했다.

“대박! 대박임다!”

진위생이 호들갑을 떨면서 대찬에게 뛰어왔다.

그는 대찬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너무 힘이 실려서 아플 지경이었다.

대찬은 진위생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그의 손을 쳐 냈다.

“아, 뭐예요!”

“삼라물산 부장이 이쪽으로 오고 있지 않게슴까!”

“삼라 부장이 온다고요?”

대찬의 물음에 진위생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얼른 오찬식 팀장에게 보고했다.

“팀장님, 삼라 부장님이 오고 계시다는데요.”

“뭐야!”

그 말에 오찬식 역시 바짝 군기가 들었다.

사단장의 기습 방문을 받은 중대장처럼 오찬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장님, 여기까지 다 찾아와 주시고요.”

“아, 파트너한테 잘 보여야죠.”

“제가 먼저 진즉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오찬식은 부장 앞에서 한껏 자세를 낮췄다.

“별말씀을. 생산 라인도 견학할 겸 제가 오는 게 맞지요.”

부장은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오찬식은 두 손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대찬 역시 꼿꼿한 자세로 그 옆에 서 있었다.

“PT는 정말 훌륭했습니다. 어째 오 팀장님은 안주하지 않고 나날이 더 발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에요. 자료도 핵심 위주로 일목요연하고, 디자인도 잘됐고, 더군다나 경쟁 업체의 치명적인 허점을 파고든 게 백미였지요.”

대찬과 오찬식 팀장은 물론이고, 수영실업 관리영업팀 직원이라면 삼라물산의 부장이 운운한 공로들이 모두 대찬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진위생은 쭈뼛거리면서 대찬의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재주는 조대찬이가 부리구 돈은 오 팀장이 벌기요?”

못내 섭섭하다는 투였다.

대찬의 수고를 잘 안은 진위생은 대찬이 저 공치사의 대상이 되기를 바랐다.

대찬은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씩 웃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았다.

공을 상사가 가져가는 건 당연했다.

유백기처럼 도가 지나친 경우는 공을 가로챘다는 표현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오찬식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아이디어를 제시한 건 대찬이었지만 최종 책임을 지는 건 오찬식이었다.

만약 대찬의 공격을 황림 쪽에서 성공적으로 방어헸다면?

나아가 역습을 가해 수영실업을 무너뜨렸다면?

대찬은 잠깐의 질책을 듣고 말겠지만, 오찬식 팀장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다.

그 책임의 무게를 짊어졌다는 점에서 1차적인 공로는 오찬식이 가져가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오찬식의 이어지는 말이 대찬의 예상을 깼다.

“부끄럽지만 이번 PT의 주역은 따로 있습니다.”

“예? 아니, 오 팀장님이 도맡아서 했을 건데 주역이 따로 있다니요?”

오찬식은 대찬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상 못한 손길에 대찬은 그대로 딸려왔다.

오찬식은 대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다 이 친구의 공로입니다.”

대찬은 얼떨떨했다.

너무나도 낯선 대우였다.

“PT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 친구가 구성했습니다. 황림정밀의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한 것도 이 친구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부장 역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대찬은 부끄러운 감정마저 들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 본 것은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의 직장 생활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응당한 공로를 부하 직원에게 돌리다니.

삼라물산 부장은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보기에 얼굴이 앳돼 보이는데… 수고 많았어요.”

“아, 아닙니다. 다 팀장님이 잘 지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대찬은 얼른 부장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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