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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8화 (27/556)

난 할 수 있어 28화

수영실업 측에서도 비밀리에 제원을 입수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대찬이 주목한 건 다른 제품들의 제원이었다.

“다른 제품들 회전수는 오히려 수영실업보다 못해.”

그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신기술을 보유했으면서 오늘을 위해 숨겨 놨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바보 같은 일이지. 오 팀장이 외계인 고문했냐고 할 정도의 기술이면 단기간에 개발했을 리도 없는데.”

그럼 뭐지?

대찬은 찜찜한 표정으로 계속 조사를 이어 나갔다.

황림정밀의 홈페이지를 유심히 살폈다.

그쪽에서 생산하는 믹서기 제품 목록을 꼼꼼히 따져 보았다.

블렘페러1 출시 일자 2000-04-05

블렘페러2 출시 일자 2000-08-14

블렘페러3 출시 일자 2000-12-09

블렘페러4 출시 일자 2001-03-22

블렘페러5 출시 일자 2001-07-03

다가라30 출시 일자 2002-05-25

“4개월씩 규칙적으로 신제품을 출시했는데…….”

대찬의 시선은 최근 출시된 2개의 제품에 머물렀다.

블렘페러5와 다가라30.

두 제품의 출시 일자는 약 10개월가량 차이가 났다.

정상적인 패턴이라면 저 사이에 또 다른 제품 하나가 출시됐어야 했다.

“수상해.”

대찬은 저 10개월을 이 의문의 미싱 링크로 의심했다.

게다가 블렘페러5의 출시 이후 황림정밀은 모델명을 변경했다.

물론 바꾸지 말라는 법은 없으나 10개월의 공백이 있으니 어쩐지 더 수상했다.

“블렘페러6…….”

대찬은 중얼거린 말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없지는 않았다.

- 황림정밀, 저비용 고효율 믹서기 ‘블렘페러6’ 출시… 시장 강타할 듯!

작은 언론사에서 낸 기사였다.

“대한생활경제? 못 들어 본 언론인데.”

대찬은 필래유통에 몸담던 시절 언론 리스크를 관리하기도 했다.

특히 경제지에 실린 업계 관련 기사는 빼놓지 않고 읽었다.

종종 경제지 기자들을 접대하는 일도 맡았다.

그런 만큼 아무리 작은 언론사라지만 대찬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찬이 대한생활경제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이미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몇 개월째 기사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이 기사는 홍보성이 짙어. 황림 쪽에서 돈 먹여서 쓴 기사가 분명해.”

홍보 효과가 불투명한 이런 부실 언론에만 기사를 청탁하진 않았을 거다.

대형 경제지에도 청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검색되는 건 폐간되어 이미 관리가 안 되는 작은 언론사의 기사 하나뿐이라니.

대찬은 간단히 유추했다.

“다른 기사들은 다 삭제시켰다는 거지.”

대찬은 대한생활경제에 실린 기사를 유심히 읽었다.

- …블렘페러6는 기존의 보급형 믹서기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2만RPM의 매우 빠른 회전 속도를 자랑한다. 황서임 황림정밀 기술이사는 ‘지갑이 얇은 서민층 고객들도 고성능의 믹서기를 사용하는 시대가 열렸다.’라며……

“2만RPM이라…….”

대찬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 삼라물산과의 프레젠테이션에 선보일 황림정밀의 신제품 다가라40의 회전수가 2만RPM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찬식 팀장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이미 몇 달 전에 출시한 블렘페러6가 저가형 믹서기임에도 2만RPM의 회전수를 보유했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제품을 흔적도 남기지 않았단 말이지.”

황림정밀은 블렘페러6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믹서기 주력 모델명도 다가라로 교체했다.

“무슨 문제가 있던 게 분명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자판만 두들겨서는 한계가 있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대찬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마강국! 오랜만이다. 공부는 잘돼 가?”

“웬일이야? 요즘 바쁘게 산다더니 전활 다 하고.”

“오랜만에 나랑 술 한잔할까? 내가 살게.”

“안 된다고 했지, 수능 끝날 때까진.”

대찬은 푸, 숨을 내뱉고 말했다.

“참치 산다.”

“어디로 가면 되냐?”

대찬은 씩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마강국과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대찬은 제법 거금을 쾌척했다.

물론 자발적으로 재수를 선택한 마강국이 기특해서 격려차 지갑을 여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

제법 속물적인 목적.

“강국아, 사실 있잖아…….”

“응?”

참치 한 점을 집어 입안에 넣는 마강국에게 대찬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이거 공짜 아니다?”

“그럼 그렇지.”

그 순간 마강국은 입안에 거의 다 들어간 참치를 다시 접시에 탁 내려놓았다.

“안 먹어.”

“야, 듣지도 않고.”

“네가 밑지는 장사를 할 놈도 아니고, 이거 먹었다간 뒤탈 단단하게 날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내 말 들어서 언제 손해 본 적 있냐?”

“그건 아니지만…….”

“일단 듣기만 해 봐, 듣기만.”

대찬은 마강국이 내려놓은 참치 한 점을 다시 제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리고는 마강국의 입에 극구 욱여넣었다.

마강국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안에 들어간 참치를 꼭꼭 씹었다.

대찬의 얘기를 한참 들은 그는 찝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연락만 해 주면 된다, 이거지?”

“응. 그걸로 끝.”

“이미 먹은 게 있으니까 그 정돈 해 줘야지.”

마강국의 승낙을 받은 대찬은 홀가분하게 웃었다.

마강국은 향응의 대가를 아주 착실하게 이행했다.

다음 날, 대찬은 출근길에 마강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퇴근하고 바로 대방동으로 갈 수 있냐?”

“대방동? 시간은 좀 걸리겠는데 당연히 갈 수 있지.”

“그래. 연락처 문자 메시지로 알려 줄게. 그분 주소지가 거기니까 그쪽에서 만나는 게 좋을 거다.”

“고맙다. 일 잘되면 한 번 더 살게.”

마강국은 피식 웃는 소리를 내고는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오찬식 팀장부터 찾았다.

“황림에서 나온 블렘페러6 아시나요?”

“블렘페러6?”

오찬식은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모른다는 표시였다.

“작년 말쯤 출시한 제품인데요.”

“글쎄… 우린 그때 선풍기 신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서.”

믹서기만 주력으로 생산하는 업체라면 모를까, 수영실업은 생활 가전 전반에 걸쳐 생산하는 업체였다.

중소기업인 수영실업은 특정 제품에 대한 타사의 동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미 다른 업무만으로도 눈코 뜰 새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 제품을 보니까 회전수가 2만RPM이던데요.”

“뭐야?”

그 말에 오찬식 팀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찬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파 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찬식은 웃음기를 띤 대찬을 멀뚱히 바라봤다.

약간의 아둔함마저 비치는, 대학 신입생의 햇병아리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세파에 닳고 닳은 웃음이었다.

오 팀장은 얼떨떨했다.

대찬은 퇴근하자마자 한 작은 식당에서 누군가와 만났다.

삼라물산을 대상으로 한 프레젠테이션 이틀 전이었다.

대찬의 앞에는 우물쭈물하는 표정의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대찬은 최대한 푸근하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선생님,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편하게.”

초면에 인간적으로 가깝게 다가가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었다.

대찬은 소주 1병을 주문하고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남성은 여전히 깊은 시름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선은 자연히 꼴꼴 차오르는 잔으로 향했다.

대찬은 그의 시선을 보고 반쯤은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

오찬식 팀장은 서류 가방을 챙기며 대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준비 다 됐어?”

“네, 다 됐습니다.”

오찬식은 훅, 숨을 크게 내쉬며 대찬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긴장하지 마.”

“팀장님이나…….”

대찬은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오찬식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짱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대찬의 대꾸에 오찬식은 어정쩡하게 웃어 보였다. 여전히 어색했다.

“잘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찬은 오찬식의 용기를 북돋았다.

이렇게 선의로 상사를 응원해 본 게 언제였더라.

유백기에게 시달리고 나서는 저주를 했으면 했지, 응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비록 회사 내에서 그다지 높은 직책도 아니고, 고액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찬은 이렇게 진심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삼라물산의 사옥은 수영실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서울의 노른자위 땅 위에 세워진 통유리 빌딩은 우러러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었다.

빌딩의 꼭대기층에는 삼라물산의 로고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푸른 타원형의 로고.

대찬도 오랜만에 정장을 빼입고 오찬식의 뒤를 따랐다.

목을 살짝 조이는 넥타이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오 팀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삼라물산 해외영업부 대리가 오찬식을 깍듯이 에스코트했다.

대리가 깍듯한 것의 곱절로 오찬식은 더 깍듯했다.

어디까지나 을은 수영실업이기 때문이었다.

승강기에서 내려 회의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대찬도 을의 을로서 긴장했다.

가는 길에 수영실업의 경쟁 업체 사원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긴장 속에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갈 길을 갔다.

“어? 이게 누구야?”

중년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대찬과 오찬식 팀장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오찬식 팀장이 알은체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황 이사님.”

대찬은 그 말을 듣고 여자의 얼굴을 흘끔 봤다.

‘저 사람이 황서임이구나.’

임유준의 어머니이자 황림정밀의 기술이사.

실질적 소유주인 황서임이 직접 나섰다.

그걸 보면 황림정밀 역시 삼라물산 같은 대기업과의 파트너십은 중요한 모양이었다.

황서임은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오찬식에게 물었다.

동종 업계에 있는 만큼 제법 면식이 있는 듯했다.

“같이 온 친구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이런 고사리 손까지 빌리다니, 수영실업 어지간히도 어려운가 봐?”

“고사리 손치고는 많이 쓸 만해서요.”

“이해해. 요즘 수영 물건 잘 안 나가잖아. 쥐꼬리만 한 월급에 베테랑들이 볼멘소리 뱉으면서 사표 썼다며?”

오찬식은 마음에 차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남의 회사에 너무 걱정이 과하신 것 같군요.”

“그랬나? 아니, 나는 같은 일 하는 입장에서 조금 걱정이 돼서.”

“저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황서임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수영 쪽 PT 관심 있게 지켜볼게요.”

그렇게 말한 황서임은 대찬에게도 한마디 던졌다.

“애기한테는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대찬은 황서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씩 웃으면서 받아쳤다.

“네. 이사님께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군요.”

그렇게 쏘아붙인 대찬은 오찬식을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서임은 입술을 뒤틀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였다.

“쥐방울만 한 게 어디서 모가지를 빳빳이 쳐들어? 싸가지 없게.”

* * *

“자, 그럼 마음껏 자사의 제품을 소개해 주시죠. 오늘만큼은 팔불출이셔도 좋습니다.”

업체를 선정할 결정권을 쥔 삼라물산의 영업부장이 여유롭게 말했다.

그의 좌우로는 영업부 직원들이 죽 늘어앉아 있었다.

대찬은 앉을 자리도 없이 오찬식의 뒤에 서 있는 처지였다.

경쟁업체는 수영실업을 포함해 총 다섯 곳이었다.

그러나 오찬식 팀장이 말했듯 결국 수영실업과 황림정밀의 2파전이었다.

오찬식은 앞선 업체들의 PT는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이미 제품의 객관적인 질에서 수영실업이 월등했다.

하지만 황림정밀 차례에 이르러서는 오찬식의 허리가 곧게 펴지고 절로 주먹이 말아졌다.

지루한 남의 자랑에 집중력을 잃던 대찬도 황서임이 앞으로 나서자 눈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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