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7화
중소기업에서 일가족이 업무에 투입되는 건 일반적이었다.
굳이 그걸 고려하지 않더라도 오광훈 사장을 똑 닮은 사각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부족하지만 회사에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멘트가 갓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답지 않은데? 그래요. 잘 부탁해요.”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영실업은 느낌이 좋았다.
상사들의 인상도 괜찮았고, 회사 분위기도 좋았다.
더군다나 대학 신입생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봉급이 주어졌다.
뭐든 시켜만 달라는 대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봉급 이상으로 부려먹는 것도 안 되지만, 돈값을 못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대찬은 성공적으로 조직에 녹아들었다.
업무 능력도 발군이었다.
애초에 대찬에 대한 기대치는 낮았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녀석이 잘해 봤자 얼마나 잘하겠냐는 것이 주류의 생각이었다.
대기업에서 10년 넘게 구른 경력이 뒤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체계가 복잡한 대기업과는 달리 수영실업은 구조가 간단했다.
그만큼 파악하기도 쉬웠다.
또 대리급의 업무와 일개 아르바이트생의 업무는 난이도 차이가 천양지차였다.
전화 응대도 능숙했고, 특히 악성 고객들을 달래는 데는 으뜸이었다.
어려운 양식의 보고서도 뚝딱, 복잡한 수식으로 얽힌 엑셀 파일도 곧잘 다뤘다.
같은 팀의 상사들도 싹싹하게 잘 모셨다.
그러다 보니 좋은 평가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오찬식 팀장은 엄지를 세우며 칭찬을 연발했다.
“이야, 조대찬, 너 물건이다? 역시 사장님 안목이 탁월하다니까.”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잘한 건 잘했다고 해야지. 안 그래?”
오찬식 팀장은 대찬의 등을 두드리며 흡족하게 웃었다.
팀원들도 대찬을 기꺼워했다.
임신한 성 대리의 일을 모두 떠안게 돼 야근이 생활화되던 참이었다.
대찬이 생각보다도 많은 짐을 덜어 주었으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대찬의 사수 격이자 본래 팀의 막내였던 사원 오찬구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름도 그렇고 사각턱도 그렇고 역시나 한 식구였다.
“조대찬 사원이 아니라 조대찬 대리님이라고 불러야겠는데요?”
“아유, 선배님까지 이러지 마십시오…….”
대찬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웃음을 머금었다.
농담이었지만 조대찬 대리님이란 말을 오랜만에 들어 봤다.
그 호칭이 아련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퇴근 후에는 저녁을 대충 때우고 스터디 그룹에 참석했다.
시시콜콜한 문법이나 따지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쓸 일이 있을까 싶은 단어를 외우는 데 시간 낭비 할 생각은 없었다.
현장에서 쓰이는 능력을 갖추고자 했다.
선배들의 지원은 퍽 전폭적이었다.
대찬을 눈여겨본 선배 하나는 잘 알고 지내는 원어민 강사를 스터디 그룹에 붙여 주었다.
암튼 끈끈하기로는 강력 접착제 못지않은 에피니키온이라고 대찬은 혀를 내둘렀다.
오랜만에 혀를 꼬부라트리려니 애를 먹긴 했지만 대찬은 금방 익숙해졌다.
영어는 강사의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선배들이라 해도 중국어 강사까지 붙여 주진 않았다.
대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영실업에는 조선족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대찬이 그들에게도 싹싹하게 구니 그들은 기꺼이 대찬의 중국어 과외 선생님이 돼 주었다.
개중 동년배 노동자인 진위생이 적극적이었다.
“음, 짜오 니 마…….”
“발음이 그기 아이라 하지 않슴까. 자, 따라 해 보기요. 챠오 니 마!”
“챠오… 아니, 이게 뭔 뜻인지는 알려 주고 따라 해 보라 하셔야죠.”
진위생은 칫, 콧방귀를 뀌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뜻이 뭐이레 중요함까?”
“참 나, 뜻이 중요하지, 그럼 뭐가 중요해요?”
“뜻이 궁금함까?”
“네.”
진위생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니미랄임다!”
“아잇……! 내가 생활 중국어 알려 달랬지, 그런 저속한 말 알려 달랬어요!”
“원래 생활 언어는 욕부터 배우는 거 아님까?”
“에휴, 관둬요, 관둬!”
“크크, 우리 조 사원님 삐졌슴까?”
대찬과 진위생이 티격태격하는데 오찬식 팀장이 다가왔다.
“뭐가 둘이 그렇게 좋아 죽어?”
“아, 팀장님.”
“같이 웃자, 좀.”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근데 무슨 일로…….”
“어, 이번에 삼라물산에서 새로 사업 파트너 선정한다는 거 들었지?”
머리 아픈 얘기가 나오자 진위생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네, 들었습니다. 권 과장님이 맡아서 하시던 거요.”
“응. 근데 이번에 중요한 출장 건이 생겨서 권 과장이 가기로 했거든.”
“네.”
“그래서 내가 맡아서 해야 할 거 같은데, 조대찬 네가 서포트 해 줬으면 해서.”
대찬은 곤란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어련히 잘할 거면서 엄살은. 다음 주에 PT 있으니까 나랑 좀 빡세게 준비해 보자. 이 건 따내면 인센티브 팍팍 갈 거야.”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 볼게요.”
대찬이 다니던 필래유통은 대기업이었다.
주로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는 원청 업체였다.
원청 업체 직원으로서 대찬은 무수한 하청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봤다.
그들은 원청 업체를 향해 절실하게 애걸복걸했다.
물론 삼라물산 같은 무역 상사들에게 중소기업이 하청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통 경로를 개척하는 데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었다.
실상 원청-하청 업체 관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소위 상사들이 갑의 위치에 섰다.
이제 을의 입장에서, 대찬은 오찬식 팀장을 도와 눈물의 구애를 펼치는 입장에 섰다.
“중국 쪽에서 믹서기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싶어 한대. 우리 제품이 경쟁력이 있을 거 같거든? 삼라 쪽에서 눈여겨보고 있어.”
“경쟁사는 몇 군데 정도 되나요?”
“다섯 군데 정도 되는데, 나머지는 우리가 성능이나 가격 면에서 우위에 있어. 그런데.”
“그런데?”
“한 군데가 찜찜하거든. 좀 빡센 회사가 있어.”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딘데요?”
“황림정밀. 이쪽 업계에서는 유명하지.”
“아, 황림정밀!”
대찬이 무릎을 탁 치자 오찬식이 물었다.
“알아?”
“네. 뭐… 약간 인연이 있죠.”
대찬은 어정쩡한 웃음을 걸쳤다.
대찬에게 내키는 이름은 아니었다.
오찬식 팀장의 말에 따르면 수영실업과 황림정밀의 2파전이었다.
삼라물산을 상대로 황림정밀보다 수영실업이 더 매력적이라는 것만 납득시켜라.
그러면 이길 것이다.
삼라물산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무역 상사였다.
그쪽과 파트너십을 맺어 두면 수영실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했다.
영업 담당자였던 권 과장을 오찬식 팀장으로 교체한 것도 명분은 출장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상급자에게 일임하여 경쟁력을 더 담보하겠다는 포석이었다.
그저 두부 자르듯 명령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오광훈 사장은 권 과장의 체면을 생각해 출장이란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걸 보고 대찬은 수영실업이 예의와 품격이 있는 회사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필래유통이랑은 다르게 말이야.”
대찬은 조용히 툴툴거렸다.
대찬은 열심히 일했다.
수영실업이 잘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사적인 이유가 더 컸다.
수영실업을 제치고 황림정밀이 삼라물산의 파트너가 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야, 조대찬, 너 언제 이런 걸 다 배웠어?”
“프로 같죠?”
“그냥 프로도 아니고 숙련된 프론데?”
오찬식 팀장은 대찬이 작성한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럴 수밖에.
대기업인 필래유통의 축적된 노하우로 교육을 받았다.
자신의 몫에 더하여 유백기의 몫까지 무수히 많은 프레젠테이션을 제작해 왔다.
기술적으로는 완성된 솜씨였다.
게다가 2018년의 세련된 감성까지 더하니 오찬식의 눈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야, 이거 사장님한테 조대찬 특채로 채용하라고 해야겠는데?”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진심이야.”
오찬식은 탄성을 내질렀다.
대찬은 훌륭한 조수였다.
조수로 두기 아까운 조수였다.
“이승엽을 대타로 쓰는 격이야. 그냥 서포트만 시키기엔 아까워.”
“서포트 하는 거만으로도 벅차요.”
대찬은 웃으면서 오찬식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우리 조 대리 노력이 빛을 발해야 하는데 말이야.”
“잘될 거예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근데 황림정밀 이것들이 믹서기 하나는 기똥차게 만들거든.”
“그렇게 잘 만들어요?”
오찬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트를 보여 주었다.
“황림 쪽에서 삼라에 선보일 신제품이래. 우린 시판제품 내보일 건데, 얘네는 신제품 선보일 예정이라는군.”
“그렇군요…….”
수영실업과 황림정밀의 믹서기 제원이었다.
“황림 신제품 제원을 몰래 입수하긴 했는데 이게 만만하지가 않네.”
“그래요?”
“우리가 가진 강점은 인체에 적합한 손잡이, 월등한 냉각 능력, 친환경 소재, 정밀한 레버야.”
“그럼 황림 쪽은요?”
“저 여러 가지 장점을 단 한 가지로 묻어 버리지.”
“그게 뭐죠?”
“회전수에서 게임이 안 돼. 황림 모델은 2만 RPM까지 나와.”
“우리는요?”
“우린 1만 5천이 최대고. 우리가 지면 아마 이것 때문일 거야.”
오찬식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속도가 나올 수 없거든, 이 가격에.”
“그런데 황림은 나온다는 거죠?”
“응. 외계인이라도 고문했나. 어디서 이런 기술이 나오는지 참.”
“그렇군요…….”
기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대찬은 보탤 말이 없었다.
그저 잘해 보자, 근거 없는 격려만 할 뿐이었다.
오찬식은 미소를 지으면서 흘끗 손목시계를 봤다.
“어, 퇴근해야지. 스터디 전에 끼니도 챙겨야 하잖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오찬식은 대찬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수고했으!”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회사 문을 나섰다.
오찬식의 신경은 온통 황림정밀과의 경쟁에 쏠려 있었다.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일에 대한 욕심도 더 많아지기 마련.
그와 비례해서 부하 직원들을 못살게 구는 게 보통 상사의 생리였다.
유백기였으면 대찬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 터.
그런데 오찬식은 그런 불량한 상사들의 모습과는 퍽 달랐다.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은 돕고 싶기 마련이었다.
또 오찬식을 돕는 일이 스스로를 돕는 일이었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에서 공로를 세우면 대찬에게도 분명히 이득이었다.
특히 나중에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할 때 좋은 밑거름이 될 터였다.
대찬은 퇴근하고 나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재한아 난데, 오늘 스터디는 못 가겠다.”
“어, 뭐야? 왜? 여친 생겼냐? 산하 선배 오늘 빠진다는 말 없었는데?”
“야!”
“산하 선배한테 일러야겠다.”
“이르든가 말든가.”
대찬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그는 곧장 집으로 직행했다.
부모님께 꾸벅 인사하고, 누나 조수진의 방문을 열어 생사를 확인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먹으라는 말에도 대찬은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동안 대찬은 출퇴근할 때마다 지참하는 가방에서 서류뭉 치를 꺼냈다.
각종 보고서가 가득했다.
그것을 책상 위에 죽 펼쳐 놓고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자발적 재택 야근이었다.
이제 삼라물산을 대상으로, 황림정밀을 상대로 하는 프레젠테이션이 겨우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 몇 단어, 중국어 몇 문장 익히는 것보다 이쪽에 주력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내가 봐도 황림 쪽 스펙이 월등하네…….”
디자인은 대동소이했고, 기타 등등의 잡다한 장점을 수영실업이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황림의 월등한 회전수였다.
수영실업이 삼라물산에 선보일 제품은 믹스원360이었다.
이미 한국 시장에서도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정보가 수두룩했다.
그다음으로 황림정밀 제품을 검색하던 대찬은 머리를 긁적였다.
“황림정밀 다가라40은 찾을 수가 없네.”
황림정밀 홈페이지의 제품 소개에도 다가라40은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