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6화
용케 2년을 잘 버틴 녀석들 중에서도 그것의 후유증을 버텨 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단순히 개인의 경험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절대’라는 전제를 붙이지 않는 이상 귀납법은 가장 강력한 논증 방법이다.
대찬은 극히 드문 그 확률에 배팅하고 싶지 않았다.
“힘든 길이에요. 반년의 불장난 때문에 힘든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아요.”
“왜 그렇게 확신해? 군대가 우릴 힘들 게 할 거라고.”
“다 그러니까요.”
나를 포함해서.
대찬은 정작 중요한 말은 삼켰다.
“제 뜻대로 해 주세요.”
김산하는 머뭇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
“입대 전까지 여자 안 만날 거예요. 후로는 어림없죠. 남자 값어치가 제일 형편없는 때니까.”
“그럼 나도…….”
대찬은 고개를 저으며 김산하의 말을 가로막았다.
“많이 만나세요. 그때까지 저는 그냥 동아리 후배예요. 2년 동안 한눈 팔아도 눈에 밟힌다면, 그래도 제가 좋다면.”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와 주세요. 제가 2년 동안 있던 그 자리로.”
“내가 다른 남자 만나면 질투 안 날 거 같아?”
“날 거예요. 하지만 이 판단을 뒤집을 정돈 아니에요. 저는 아직 누나한테 관심 있는 정도니까. 뜨겁지 않아서, 아직.”
아직 뜨겁지 않다.
하지만 곧 뜨거울 거 같다.
대찬은 아직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역시 김산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김산하는 물끄러미 대찬을 올려보다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김산하의 이마가 대찬의 가슴에 닿았다.
대찬은 슬쩍 손을 올려 김산하의 등을 감쌌다.
김산하는 대찬에게 안긴 채로 중얼거렸다.
“네 눈썹.”
“눈썹이 왜요?”
“눈썹이 그러면 재수가 없다고 했지.”
갑자기 화제를 벗어난 말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생각해 보니까 그게 다른 뜻으로 재수가 없다는 거 같아.”
“무슨……?”
대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산하를 내려다봤다.
“그런 눈썹은 그냥 재수 없는 놈이란 뜻이었어. 천하의 왕재수!”
김산하는 대찬의 가슴팍을 손으로 툭 밀고는 그대로 전철에 올라탔다.
‘문이 닫힙니다.’
전철은 천천히 다시 출발했다.
대찬의 얼떨떨한 표정이 천천히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유리를 통해 대찬을 보던 김산하는 살짝 혀를 빼 물었다.
“고작 20살이 저렇게 낭만이 없고 계산적이야? 그 아저씨도 여관 가라고 난리블루스를 추는데!”
김산하는 전철의 닫힌 문을 대찬의 정강이라 생각하고 걷어찼다.
주변의 승객들은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그런 김산하를 흘끔 바라봤다.
학기가 끝났다.
대학은 이른 종강을 결정했다.
월드컵 열풍에 맥 못 추는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배려가 아니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대찬의 두 번째 1학년 1학기 학점은 3.42였다.
낮지도 높지도 않은 학점이었지만 목표 달성이었다.
대찬은 버스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월드컵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대찬이 이어폰을 꽂고 듣는 라디오에서도 축구 얘기뿐이었다.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터키와의 3, 4위전에서 승리하면서 유종의 미는 거뒀습니다.’
‘그렇죠.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태극 전사입니다. 벌써부터 2006 독일월드컵이 기다려집니다.’
‘이번 쾌거를 발판 삼아 한국이 아시아의 맹주는 물론 세계적인 강호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대찬은 듣고 있던 라디오를 끄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뺐다.
“여기네.”
대찬은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수영실업.”
대찬은 퇴근 무렵에 수영실업을 찾았다.
언제든지 오라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업무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찾는 편이 좋았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니, 이게 누구야!”
오광훈 사장은 대찬을 반갑게 맞았다.
대찬도 웃으면서 말했다.
“바쁘신데 제가 폐 끼치는 거 아니죠?”
“폐는 무슨! 어서 와, 어서 와. 왜 이렇게 늦게 찾았어? 일찍 봤으면 좀 좋아.”
“그래도 퇴원하시고 몸조리 좀 하실 시간이 있어야죠.”
“아이구, 배려심도 많아라.”
오광훈은 피식 웃고 대찬을 이끌었다.
“근처에 오향장육하고 어향동고 잘하는 집 있어. 빼갈 안주로 그만이야. 자네, 술 좀 하나?”
“없어서 못 먹죠.”
“여러모로 맘에 드는 친구라니까. 가세.”
대찬은 오랜만에 대취했다.
오광훈은 술고래였다.
사장 낀 회식 자리에서 내지를 직원들의 비명 소리가 대찬의 귀에 생생했다.
대찬도 술이 약하지는 않아서 오광훈과 대작할 상대가 되었다.
오광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낄낄거렸다.
“내가 술 좀 들어가면 코가 따끈따끈해지거든? 근데 웬만해선 안 그래. 오늘 오랜만에 따끈따끈하구먼. 만져 볼래?”
대찬은 질색했다.
“제가 왜 만져요. 싫어요!”
“농담에 정색하기는.”
독주를 연신 삼키던 오광훈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자네, 방학 때 뭐 해?”
“글쎄요, 영어나 공부할까 하고…….”
대찬의 첫 번째 삶, 인맥과 학벌 다음으로 애를 먹었던 것이 외국어였다.
그건 스스로의 결함이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문법 위주의 영어만으로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한참 미달이었다.
아무리 일머리가 좋고 태도가 야무져도 회화가 약해서야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외국어 능력이 강조되는 판에 이러한 경험까지 있으니 이를 악물고 외국어 능력을 함양할 작정이었다.
“용돈 부족하진 않아?”
“네? 용돈이요?”
“그래. 자네 고원대 경영이라고 했지?”
“네.”
“그 정도로 똘똘하면 쓸 만하겠군. 우리 회사에서 방학 동안만 일해 보는 게 어때?”
“일이요?”
“그래.”
대찬은 난색을 표했다.
“저 공장 일에는 소질이 없는데요.”
“아, 누가 자네더러 기계 돌리랬나. 사무직이야, 사무직.”
“일 가르치고 나면 방학 끝날 거 같은데요.”
오광훈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쉬운 일이야. 엑셀은 다루지?”
“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갓 대학 문턱을 넘은 학생 중에서 엑셀에 통달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찬은 엑셀이라면 이골이 날 대로 났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저절로 자신감이 실렸다.
오광훈은 씩 웃으면서 대찬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럼 됐어. 사실 일하던 친구가 출산 휴가 갔거든. 근데 너무 급작스러워서 일손이 많이 달려.”
“좋은 사장님이시네요. 다른 분들은 일손 걱정 먼저 하실 텐데요.”
“큰일 날 소리! 그러다 애 떨어지면 어떡하라구?”
오광훈의 태도가 썩 대찬의 마음에 들었다.
대개의 중소기업들은 정당한 출산 휴가도 주기 싫어 어깃장을 놓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출산 휴가 이전에 임신한 것만으로도 휴직이 가능한 직장이라니.
흔히 만날 수 있는 경영자는 아니었다.
“어쨌든, 할 거지! 일.”
“이제 보니 보답이 아니라 구인하시려고 절 찾으셨네요?”
“아, 시끄럽고! 딱 대답만!”
“아주 막무가내시네.”
오광훈은 잔을 내밀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이거 마시면 나랑 일하는 거다?”
“아, 그 멘트는 좀 역효과 날 거 같은데요.”
대찬은 웃으면서 건배에 응하고 잔을 비웠다.
그의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어쨌든 용돈이 아쉬운 대학생 입장이었다.
정식 인턴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업무 현장에서의 경험이다.
차후 입사 지원을 할 때 좋은 이력이 될 터였다.
대찬은 바로 현실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급료는요?”
“급한 건 우리 쪽이니까 확실하게 쳐줄게. 그리고 내 은인이니까.”
“기대되네요.”
“주6일 근무, 나인 투 식스, 월급 100, 월차 하루 보장. 어때?”
이 당시 최저 임금으로만 따지면 월급은 30만 원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검증된 게 없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역시! 시원시원해서 좋아. 자자, 한잔하지.”
대찬은 오광훈 사장의 건배에 기꺼이 응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하면 되는 거죠?”
“말 그대로 사무 보조야. 관리영업팀 성 대리가 쉬고 있으니 그 빈자리 메워 주면 돼. 아마 오 팀장이 잘 알려 줄 거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죠?”
“내일은 숙취 때문에 안 될 거고, 모레 바로 출근하지.”
“넵.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오광훈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다시 술을 권했다.
이날 대찬은 완전히 대취했다.
어쩔 수 없이 오광훈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대찬은 늦은 오전에 일어났다.
까치집 머리를 한 채로 오광훈의 부인이 끓여 주는 콩나물국으로 해장했다.
대찬은 덜 뜬 눈으로 부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민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민폐는요, 무슨. 우리 집 술고래랑 대작해 줘서 고마워요. 아 참, 그리고 저치 목숨 구해 준 것도.”
그 남편에 그 부인이었다.
부인의 인상도 오광훈처럼 시원시원하고 호감이 갔다.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국을 떠먹었다.
소식을 들은 최재한은 다시 되물었다.
“방학 동안 회사를 다닌다고?”
“응. 회사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그냥 아르바이트야.”
“그러니까 산하 선배랑 둘이 길거리 응원 나갔다가 우연히 중소기업 사장님을 구해 줬더니 그런 땡보직을 제안 받았단 말이야?”
“땡보직인지 어떻게 아냐?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최재한은 대찬의 말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해석했다.
“진짜 조대찬 운빨은 알아줘야 해. 어떻게 산하 선배가 먼저 그렇게 달라붙고, 길거리 응원 나갔다가 그런 귀인을 사귀고 오느냐고.”
“운빨은 무슨.”
대찬은 단순히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삶을 살면서 그런 기회를 알아보고 낚아챌 준비를 한 결과였다.
물론 그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것부터가 기가 막힌 운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럼 우리 방학 때 하기로 했던 영어랑 중국어는?”
“그건 예정대로. 어차피 평일 저녁하고 주말에 하기로 했잖아? 너도 아르바이트 하니까.”
대찬은 최재한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함께 외국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해서 톡톡히 효험을 본 최재한은 적극 찬성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김산하를 비롯한 몇몇 부원들도 스터디 그룹에 함께하기로 했다.
대찬이 에피니키온 내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만한 환경도 잘 조성되어 있었다.
에피니키온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은 후배들을 위해 많은 복지를 제공했다.
그중 하나가 부원들끼리 자체적으로 스터디 그룹을 만들면, 장소와 편의 등을 동문 기금에서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런 장치 하나하나가 에피니키온의 성장 동력이라고 대찬은 생각했다.
버젓이 주어지는 혜택을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대찬은 스터디 그룹의 대표 격으로 나서서 선배들의 동문 기금을 따냈다.
낮에는 수영실업, 밤에는 스터디 그룹.
학기보다 더 바쁜 방학이 대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찬은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침 일찍 수영실업으로 출근했다.
8시 30분.
첫 번째 삶의 유백기가 그토록 강조하던 30분 빠른 출근이었다.
유백기가 고압적으로 강권했을 때는 반발심이 들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조기에 출근한 건 묘한 뿌듯함마저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사장님께 설명 들었어요. 성 대리 대타라고? 내가 관리영업팀 오찬식 팀장입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이 대찬을 반겼다.
겉보기에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오광훈 사장 아들이네.’
대찬은 감으로 척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