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25화 (24/556)

난 할 수 있어 25화

김산하는 대찬의 품에서 빠져나와 휙 뒤를 돌아봤다.

“야!”

“누나, 왜 그래요?”

“저 자식이 내 엉덩이를……!”

“뭐라고요?”

그 말에 대찬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김산하를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파렴치범은 잡아서 물고를 내야 했다.

대찬의 시선에 초라한 행색의 아저씨가 걸렸다.

‘낫살 먹은 양반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데 그의 자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대찬과 눈도 마주치지 않더니 몸이 기우뚱 무너졌다.

대찬은 급히 손을 뻗어 무너지는 그를 받아 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을 것이다.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대찬은 급히 아저씨의 맥박을 확인했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성추행이 아니라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김산하의 신체를 짚은 것이었다.

“누나! 빨리 119 불러 주세요!”

“어? 어어… 알았어!”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김산하가 대찬의 말대로 움직였다.

대찬은 급히 그의 상의를 풀어헤치고 정확한 지점에 손바닥을 올려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군대에서 이골이 나도록 배워 온 것을 써먹을 때가 왔다.

광장은 난장판이었다.

박지성의 골에 정신이 나간 사람들은 한동안 흥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방방 뛰었다.

그 와중에 대찬은 땀을 흘려가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웅성거리기만 할 뿐 도움이 안 됐다.

“가만히 보지만 말고 구급대원 올 길 좀 확보해 주세요! 남자분들 다 군대 다녀오셨잖아요!”

대찬이 아저씨의 흉부를 압박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군필자의 자존심에 자극을 받은 젊고 늙은 남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동행한 여자들에게 알량한 멋짐을 뽐내려는 사심도 적지 않게 발동했다.

“응급 환자 발생했어요! 길 좀 터 주세요!”

여자들도 주변에 상황을 알리며 일조했다.

덕분에 온통 붉은빛의 인파로 가득한 광장까지 구급대원들이 신속하게 도착했다.

대찬은 구급대원들에게 아저씨를 인계하고 완전히 탈진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심폐소생술은 심폐소생술이 아니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이 예사였다.

그 정도로 격렬하게 압박해야만 했다.

그건 받는 쪽도 고됐지만 하는 쪽도 고됐다.

구급대원이 도착하는 그 시간까지 쉼 없이 심폐소생술을 했던 대찬은 기진맥진했다.

“환자 보호자분 안 계십니까!”

구급대원의 말에 대찬이 대답했다.

“아마 혼자 오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남자분이 같이 가 주시죠.”

“저요?”

“네. 저희 올 때까지 도와주셨으니 나중에 감사도 받으셔야 하고.”

대찬은 우물쭈물하며 이제 겨우 후반에 돌입한 대형 스크린을 바라봤다.

“괜찮은데…….”

“가시죠.”

구급대원은 대찬의 대답과 관련 없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고 구급차에 태웠다.

김산하도 덩달아 구급차에 올라탔다.

심폐소생술은 구급차에서도 이어졌다.

끈질긴 노력 끝에 빛이 보였다.

“크하!”

아저씨가 스스로 숨을 토해 냈다.

축구고 뭐고 일단 사람이 살았으니 대찬도 안도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고, 아저씨 가족의 심보가 못됐다면 대찬도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대찬은 휴, 한숨을 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김산하는 대찬의 손을 잡았다.

대찬도 거듭 한숨을 쉬며 김산하의 손을 꼭 잡았다.

아저씨는 멍한 시선을 좌우로 움직였다.

구급대원이 물었다.

“선생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아이고, 고장 난 심장이 또 지랄을 했나 보네.”

“평소 심장 질환이 있으셨습니까?”

아저씨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심장 약하신 분이 길거리 응원을 가시면 어떡해요!”

그러게 말이야!

구급대원의 말에 대찬도 속으로 동의했다.

그러자 아저씨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내 책임인가! 박지성이가 골을 넣어 갖고 그렇게 된 거지!”

그러자 대찬이 울컥해서 아저씨에게 쏘아붙였다.

“그럼 박지성 책임입니까?”

“쌍방과실이야!”

구급대원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이분한테는 소리 지르지 마세요. 이분이 선생님 살린 은인이십니다.”

“그, 그려?”

“심폐소생술로 저희 올 때까지 선생님 명줄 붙들고 계셨어요.”

아저씨는 대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는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고맙네.”

“아닙니다.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니.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 목숨이 대단찮은 것이 되잖나.”

대찬은 어설프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치면 대단한 일이군요.”

아저씨는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스스로도 우스운 듯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자네 관상이 재밌구만.”

“예?”

갑자기 웬 관상 타령?

“눈썹이.”

“눈썹이라뇨?”

“중간에 끊어진 눈썹은 천하에 재수가 없는 놈이거든. 근데 끊어진 부분에 다시 털이 나기 시작했어. 혹시 심었나?”

“…아뇨.”

“허, 그렇다면 지독한 불행이 점점 아물고 있단 건데. 재밌군.”

“관상이 취미십니까?”

“그냥.”

그렇게 잠깐의 화제 전환으로 민망함이 가신 아저씨는 히죽 웃었다.

“내 병원 신세 지는 동안에는 꼼짝도 못하지만, 퇴원하면 자네에게 거하게 쏘지.”

“아뇨. 보답 바라고 한 일은 아닌데요.”

“그래야 내 맘이 편해! 사양할 생각은 마!”

그렇게까지 말하니 대찬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공비례, 과한 예의는 도리어 예의가 아니므로.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자네도 자네 비즈니스가 있을 거 아냐. 은혜 입은 쪽은 내 쪽이니까.”

아저씨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대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언제든지 전화 한 통 넣고 찾아와. 부모님 초상 치르지 않는 이상 무조건 자네와의 약속이 최우선이니까.”

“아, 감사합니다.”

대찬은 아저씨가 건네준 명함을 흘끗 봤다.

수영실업 사장 오광훈.

“사장님이셨네요.”

“그냥 작은 회사야. 암튼 명함 보고 연락 꼭 주도록.”

오광훈은 그러면서 지갑을 도로 집어넣으려다가 다시 열었다.

“그리고 이건 내 감사 표시니까 사양 말고.”

그는 한 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 1만 원짜리를 세기 시작했다.

너구리에서 끝나지 않고 오징어, 육개장, 칠뜨기, 팔보채, 구두짝, 십자가까지 갔다.

너구리 다음이 궁금했던 대찬은 좋은 거 배워 간다고 생각했다.

오광훈은 1만 원짜리 10장을 내밀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아나, 이걸로 애인이랑 여관으로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 알았지?”

그 말에 대찬이 펄쩍 뛰었다.

“여관은 무슨 여관! 애인도 아니거든요? 아저씨, 그거 성희롱이에요!”

“성희롱은 니미, 여자 눈깔에서 아카시아꿀이 떨어지는데 사내새끼가 등신같이!”

유탄을 맞은 김산하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얼굴만 살짝 붉혔다.

대찬은 헛기침을 하고 오광훈에게 말했다.

“암튼 안 갈 거고요. 사례금은 말 그대로 사례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찬이 그렇게 못 박자 김산하는 그의 발등을 콱 밟았다.

“윽!”

“어, 미안. 발을 헛디뎠네.”

오광훈은 킬킬 웃었다.

병원에 도착한 후 간단한 검사가 시작됐다.

그가 기력을 되찾자 대찬과 김산하는 병실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오광훈이 그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꼭 들러야 돼! 보답해야 하니까!”

“알겠어요!”

“여관도!”

“쫌!”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병실을 완전히 떠났다.

병실 문을 탁 닫고 나가는 순간 갑자기 병원을 무너뜨릴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찬은 급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실의 TV에서 안정환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달리며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인저리타임에 안정환의 천금 같은 역전골이 터집니다! 태극전사들이 4강 진출 신화의 9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캐스터의 말이 끝나고 1분이 못 되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대한민국이 4강에 진출합니다! 시청 앞 광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겠군요!”

‘그렇겠군요. 난 광장에 있는 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대찬은 픽 웃고는 병원을 떠났다.

한국이 이겼으니 기분은 좋은데 아쉬움은 감추기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호프나 한잔하실래요?”

대찬의 말에 김산하는 입맛을 쩝 다시며 대답했다.

“그래, 아쉬운 대로.”

어딜 가나 만석이었다.

인파에 치여 대찬과 김산하는 시청에서 종로 5가까지 밀려났다.

겨우 빈자리를 찾아 기어 들어가 프라이드치킨 1마리와 맥주 500cc 2잔을 주문했다.

그게 또 나오는 데 한참이었다.

“근데 참 신통하네요.”

“뭐가?”

“그 아저씨 있잖아요. 제 눈썹 얘기했잖아요.”

“응, 중간에 끊긴 눈썹은 재수가 없는데 다시 눈썹이 나기 시작했다고.”

“네. 그게 맞기는 맞는 말씀이거든요.”

“무슨 일 있었어?”

대찬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라면 굉장히 큰일이지.

“그냥, 사고 비슷한 거였어요.”

“사고면 사고지, 비슷한 건 또 뭐야?”

“어, 맥주 나왔다. 건배해요, 우리.”

대찬이 얼버무리며 잔을 내밀자 김산하도 웃으면서 건배에 응했다.

둘은 밤늦은 시간까지 음식과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서울은 불야성이었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커플은 대로변에서 프렌치키스를 했다.

자동차의 경적은 요란하게 울렸다.

청년들은 애국심을 빙자하여 광기를 꽥꽥 발산하고 다녔다.

둘은 여전히 밝은 네온사인을 뒤로하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대찬이 김산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반대 방향이죠?”

“가기 전에 잠깐만.”

“네?”

대찬을 멈춰 세운 김산하는 잠깐 머뭇거렸다.

대찬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다.

술을 마셔도 저렇게 망설인다.

술 없으면 못했을 얘기다.

침을 꼴깍 삼킨 김산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마음 아예 없어?”

대찬은 지금만큼은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예의가 아니었다.

“없으면 이렇게 안 가까웠을 거예요, 우리.”

“한 발자국만 더 오면 되잖아. 근데 왜 안 와……?”

“누나는 저 좋아해요?”

김산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응.”

“그게 잠깐의 연애 감정이에요, 아님 오래 잘해 보고 싶은 거예요?”

“그건 차차 알아가야지.”

“저는 그 알아가는 시간을 사귀지 않는 상태에서 갖고 싶어요.”

“…왜?”

대찬은 잠깐 미소를 비쳤다.

“반년 있으면 저 군대 가야 하거든요.”

“기다릴 수 있어.”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운 일이에요. 2년 길어요.”

“내가 기다릴 수 있다니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에요.”

“뭐가 어려워?”

“멀리 떨어져 있어서 힘들고, 서로 같이 하는 게 없어서 힘들고.”

대찬은 감상에 빠졌다.

술기운이 오르기도 하고,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 이유였다.

원혜미와 헤어지고 내내 애인을 사귀지 않던 대찬은 대학교 1학년 때 한 여자와 사귀었다.

생김생김도 괜찮았고 성격도 곰살맞은 편이었다.

크게 열렬하진 않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대찬은 그 여자를 믿고 군대를 갔다.

또 자신을 믿었다.

최전방 전선과 애정 전선을 둘 다 지킬 수 없다.

그걸 깨달은 건 그가 상병 2호봉이었을 때였다.

여자는 떠나갔다.

어쩌면 남자가 떠나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군대와 사회는 달랐고, 인간은 반쪽짜리 적응의 동물이었다.

각자의 영역에 적응하는 만큼 서로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대찬과 비슷한 호봉의 친구들, 그리고 위아래의 동료들도 대개 대찬과 상황이 비슷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