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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4화 (23/556)

난 할 수 있어 24화

대찬은 멍한 시선으로 김산하를 바라봤다.

김산하는 그를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대찬은 홀로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런데 민승기와 김산하는 그 짐을 나눠 짊어지었다.

그건 유백기를 향한 적개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공통된 동지애였다.

안두홍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김산하 후배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리 바람직하진 않군.”

한긍윤도 한마디 보탰다.

“대회의 목적을 벗어난 행동이었어. 우리는 돈을 벌라고 했어. 누군가를 응징하라고 한 적은 없네.”

그들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건 오히려 유백기였을지도 모른다.

사회는 정글이다.

사회는 냉혹하다.

철저히 개인의 이익에 집중해라.

동지는 없고 도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민승기, 김산하, 대찬, 그리고 60명의 부원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사람의 사회는 짐승의 정글과 다르다는 걸 증명했다.

냉혹한 마음 건너편에 따뜻한 마음이 있음을 증명했다.

개인의 이익을 연대의 이익이 이길 수 있음을 증명했다.

도구가 동지로 바뀔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안두홍과 한긍윤은 고개를 저으며 뒤풀이를 겸한 회식에 불참했다.

못마땅한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에피니키온의 부원들은 저들끼리 모였다.

선배의 두둑한 주머니에서 나오는 공짜 밥과 공짜 술은 없었다.

허름한 식당의 주인 할머니가 인심 좋게 담아 주는 순댓국에 막걸리만 있었다.

하지만 하늘같은 선배를 위한 억지웃음 대신 스스로를 위한 자연스러운 웃음이 있었다.

대찬은 막걸리 잔을 부딪치고 한 번에 비워 냈다.

그는 민승기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배, 고마워요.”

“됐어. 그럼 새내기한테 1기 선배들 상대하게 뒀을까 봐?”

“그래도 제가 시작한 일이니까.”

“같이 시작한 일이지.”

대찬과 민승기는 마주 보고 웃었다.

김산하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한테는 고맙단 소리 안 해?”

“이제 막 하려고 했거든요? 또 선배라고 묶어서 말하면 누나라고 안 했다고 꼬투리 잡을 거잖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당황하는 김산하를 보고 민승기가 끼어들었다.

“와, 천하의 김산하가 당황을 하세요? 이제 보니 조대찬이 김산하 킬러였네?”

“나는 민승기 킬러니까 좀 닥쳐.”

“아,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선배가 배석했다면 장난으로 티격태격하는 건 어림없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부원들은 편안하게 웃었다.

대찬과 최재한은 거나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최재한은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좀 아깝다.”

“뭐가?”

“우리 열심히 해서 오십씩은 더 벌었잖아. 백오십이면 큰돈인데.”

“큰돈이긴 하지.”

학생 신분에 백오십이 큰돈이라는 건 대찬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생 신분일 때의 얘기였다.

훗날 푼돈까진 아니더라도 삶에 타격을 주는 액수는 아니었다.

최재한과 달리 사회에서의 경험이 있는 대찬은 그걸 몸으로 느꼈다.

대찬은 실실 웃었다.

“내가 좀 오글거리는 말 좀 해 볼까?”

“가급적이면 하지 마.”

“취했으니까 할래.”

최재한은 포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찬은 달관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영감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돈은 못 벌었지만 사람을 벌었어.”

“으, 미친! 닭살 돋아.”

최재한은 경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대찬은 꿋꿋했다.

“이번 일은 우리한테 큰 이익으로 돌아올 거야. 150만 원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최재한은 그렇게 말하며 웃는 대찬을 보고 자신도 픽 웃었다.

둘은 한참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최재한이 늦은 대답을 내놨다.

“아마 그럴지도.”

유백기는 학교에서 모습을 감췄다.

들리는 말로는 에피니키온 부원들이 없는 교양 강의에만 종종 출석한다고 했다.

에피니키온 부원들의 입에서 유백기가 오르내리는 일은 점점 잦아들었다.

학기 말로 향할수록 아예 잊힌 존재가 되었다.

“그 새끼한테 상금 뜯어내야지! 나랑 그 새끼 집 찾아갈 사람!”

김산하는 격앙했지만 민승기는 그를 겨우 진정시켰다.

부원들이 기탁한 발전 기금으로 유백기의 벌금 같은 상금을 충당했다.

그것이 유백기에게는 더 잔인한 대우였다.

그가 에피니키온으로 복귀할 여지를 아예 삭제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유백기는 승리했지만 돈도, 사람도 잃었다.

대회에서의 우승이 취업 시장에서 주요한 경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추악한 행동이 선배들에게도 전해진 마당이다.

그것마저도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1억 원의 돈, 그리고 그것을 자본으로 해서 얻은 수익은 고스란히 에피니키온 전원의 손에 돌아갔다.

사정이 어려운 부원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되었다.

민승기는 장학금을 받는 동기에게 슬며시 물었다.

“이거 다 누구 덕인지 알지?”

“그래, 알아. 다 우리 민승기 회장님 덕이지. 고마워.”

“무슨 내 덕이야.”

“그럼 누구 덕인데? 유백기 덕이냐?”

민승기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대찬.”

당분간 회식비를 걷을 일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대찬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선배들의 눈총은 민승기와 김산하가 감당했고, 부원들 사이에서의 공로는 대찬에게 돌아갔다.

대찬은 그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재수 없는 잘난 척이 아니었다.

처세에 실패해 본 이의 철저한 처세술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건 만고의 이치였다.

평판이 매우 좋은 것과 대체로 좋은 것 중 선택할 수 있다면 대찬은 후자를 원했다.

날아오른 것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높이 날수록 아프게 떨어진다.

유백기의 압도적인 수익이 부원의 일치된 단결을 이끌어 냈다.

그랬듯 대찬의 압도적인 평판이 유백기의 말로와 같을까 대찬은 염려했다.

그럴 땐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희미해지기.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진다면 그 밝기를 희미하게 조정하면 된다.

대찬은 의도적으로 매주 있는 정기 모임에 격주로 참석했다.

그가 불참한 주에는 그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원들의 시야에서 대찬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두 번째 삶의 대찬이 첫 번째와 다른 것은 계산을 한다는 점이었다.

민승기를 비롯한 선배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김산하는 흡연 구역에서 대찬을 발견하고 째려봤다.

전날 있던 모임에 대찬이 참석하지 않았던 참이다.

“야, 요즘 왜 이렇게 뜸해?”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지금은 너무나도 좋은 시기였다.

2002년 6월이었다.

“월드컵 봐야죠!”

“누구랑 보는데”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뭐, 에피니키온 말고 친구도 없는 줄 알아요?”

“여자야?”

“여자도 더러 있죠.”

대찬의 대답에 김산하의 얼굴이 찜찜해졌다.

“너 스페인전 볼 거야?”

“당연히 봐야죠.”

8강 스페인전까지 오는 과정은 첫 번째 삶에서 겪은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경기 결과는 엇비슷했지만 아주 같진 않았다.

비겼던 미국전은 이기고, 이겼던 포르투갈전은 비겼다.

16강 이탈리아전에서도 연장 승부까지 가는 접전이 아니라 1 대 0, 대한민국의 승리로 끝났다.

대찬은 그걸 보면서 스포츠 도박으로 돈을 벌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또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결말을 알고 보는 스포츠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는데 다행히 그것만은 모면하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니 대한민국은 스페인을 만나 4강 진출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누구랑 볼 거야?”

“글쎄요, 아직 안 정했는데.”

“그럼 나랑 봐.”

“누나 축구 싫어하신다면서요.”

“시끄러워. 나랑 봐. 나 길거리 응원 해 보고 싶었어. 나랑 시청 가자.”

“민 선배하고 재한이, 원웅이도 부를까요?”

“안 그래도 복잡한데 그런 대인원이 어떻게 가! 싫어. 그냥 둘이 가.”

“알았어요.”

대찬은 빙긋 웃었다.

시청 앞 광장에 붉은 물결이 넘실거렸다.

‘Be the reds’ 티셔츠를 다시 입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태극무늬 페이스 페인팅도 했다.

스페인전을 앞둔 시청 앞 광장은 말 그대로 북새통이었다.

사방에서 왕왕 울리는 목소리에 고함지르듯 말해야 소통이 가능했다.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때문에 이산가족이 속출했다.

“휩쓸려 가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 말을 들은 김산하는 씩 웃었다.

그러더니 김산하의 몸이 휘청거렸다.

발을 헛디딘 것도, 누군가와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어어!”

그러자 대찬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사람이 너무 많아…….”

김산하의 목소리는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러면서 슬쩍 대찬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가는 게 안전할 거 같아.”

대찬은 김산하의 체온을 감지하고 속으로 웃었다.

의외로 여우 기질도 있었네.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대찬은 김산하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 덕분에 대형 스크린이 잘 보이는 명당을 꿰찰 수 있었다.

“대- 한민국!”

우레와 같은 함성을 대찬은 두 번째로 들었다.

함성에 이어 대인원이 일치된 박자로 치는 박수가 다섯 번 들렸다.

‘지난 월드컵 때 난 어디에 있었더라.’

“대- 한민국!”

‘아마 최재한이랑 있었던 거 같은데.’

대찬은 옆에 앉아서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치는 김산하를 봤다.

‘최재한도 좋지만, 아무래도…….’

그는 씩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남자보단 낫지.’

시선을 느낀 김산하는 대찬 쪽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박진감 넘치는 축구와 그것에 호응해 들끓는 군중은 대찬과 김산하를 마냥 자리에 눌러앉게 두지 않았다.

대찬과 김산하도 자리에서 일어나 경망스럽게 뛰면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호아킨, 치고 들어옵니다. 막아야죠. 수비수들 더 압박해야 합니다.”

스페인의 윙어가 현란한 개인기를 앞세워 한국의 수비진을 휘저었다.

‘연장까지 원래 0 대 0이었는데…….’

첫 번째 삶의 스페인전과 두 번째 삶의 스페인전에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었다.

윷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첫 번째에 윷이 나와도 두 번째에 백도가 나올 수도 있다.

“막아야 합니다! 호아킨, 모리엔테스에게 찔러 주고 모리엔테스 슛!”

적진 깊숙이 침투한 호아킨이 모리엔테스에게 공을 띄워 주었고, 모리엔테스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아, 골이군요.”

모리엔텐스의 헤딩슛에 대한민국의 골망이 흔들렸다.

해설자의 허탈한 탄식에 관중들도 일제히 아쉬움을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대찬은 머리를 싸쥐었고, 김산하는 살벌한 육두문자로 할 일을 한 스페인 선수를 욕했다.

그런데 3분 후,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아! 이을용, 박지성에게 찔러 주고! 박지성 여의치 않자 다시 유상철에게!”

“박지성한테 줘야죠! 줘야죠!”

해설과 캐스터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줘야죠!”

“유상철! 박지성에게 찔러 줬습니다! 박지성, 주춤주춤!”

자리에 앉아 있던 대찬이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어?”

“박지성! 슛!”

대찬은 무릎을 완전히 펴고 양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으아악!”

“골! 골이에요!”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순간에 귀가 먹먹해졌다.

“와아아!”

김산하도 발을 마구 구르며 환호했다.

“골이다, 골!”

김산하는 애처럼 웃으면서 대찬을 확 껴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대찬도 완전히 이성을 잃어서 그 포옹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내가 박지성 일낼 줄 알았다니까!”

“대박, 진짜 대박!”

둘은 서로를 껴안은 채로 폴짝폴짝 뛰었다.

둘뿐만 아니라 광장의 모든 사람들, 대한민국의 남녀노소가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때 김산하의 엉덩이에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언제 당해도 기분이 팍 상해 버릴 일이었다.

한창 대찬과 분위기가 좋은 와중에 그래 버리니 김산하의 분노가 용암처럼 끓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 줄 성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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