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3화
“아, 아니야.”
“근데 누나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시는데.”
“요즘 내 표정 안 좋으면 무조건 유백기인 줄 알아.”
“왜, 또 무슨 일 있어요?”
대찬은 그렇게 물으면서 김산하의 옆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유백기가 팀에서 24기를 전부 몰아냈어. 25기 중에서도 자기 안 따라오는 애들은 다 방출했고.”
“예. 불만들이 많던데요.”
“없을 수가 없지. 그 새끼, 이번에 쭉 빨아먹고 군대로 튈 생각인가 봐.”
참 유백기다운 생각이다.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민 선배는 좀 어떠세요?”
“승기? 겉으론 괜찮은 척하는데 걔 속도 말이 아닐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면 허탈하시긴 하겠죠.”
“이미 대회는 물 건너갔고, 유백기 그 새끼 때문에 자다가도 이불 뻥뻥 찰걸.”
“유 선배한테 복수하고 싶으시겠네요.”
“그걸 말이라고 하니?”
“유 선배가 24기분들 쫓아낼 때 100만 원 자본은 들려 내보냈다고 했죠?”
“어.”
“그럼 민 선배한테 전해 주실래요? 그 선배들, 한자리에 모아 달라고.”
“무슨 생각인데?”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는 상황 보니까 저희 팀이 우승하긴 힘들 거 같고요.”
“그럼?”
“대신 일을 꾸미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민 선배 힘이 필요해요. 물론 누나 힘도.”
유백기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애초에 30명분에 달하는 자본을 쥐고 시작했으니 뭘 해도 따라잡기가 곤란했다.
발에 땀띠 나도록 월드컵 굿즈를 팔아도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일 뿐이었다.
대찬이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승기가 찾아왔다.
“조대찬, 너 나보고 너희 팀 들어가라고 했다며.”
“어, 민 선배님, 벌써 들으셨어요? 산하 누나한테 부탁한 지 5분밖에 안 됐는데.”
“네가 부탁하니까 그런 거지.”
“네? 제가 왜…….”
“그거야 당연히 산하가 널… 아니다. 됐고, 어차피 게임 끝나가는데 무슨 방법이 있다고?”
“아직 안 끝났어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거 주최한 선배들은 유 선배가 치사하게 우승에 가까워지는 걸 알까요?”
“그 양반들이 알 바는 아니지.”
“네? 그래도 1억씩이나 쏟아서 하는데…….”
“그거 눈 먼 돈이야. 우리 1기 선배 중에 산업부 차관 있잖아.”
“연락처 목록에서 봤어요. 한긍윤 선배님.”
“너 기억력 좋다. 어쨌든 산업부랑 교육부랑 조인해서 젊은 경영인 육성 사업인가 하는데, 그 일환이래.”
“아.”
대충 감이 잡혔다.
“선발된 동아리가 사업 제안서를 내면 자금을 지원해 주는 거야. 우린 이번에 2억 따냈고.”
“근데 왜 1억만 줘요?”
민승기는 웃으면서 주머니에 슬쩍 손을 집어넣었다.
“인 마이 포켓. 그러니까 그걸 갖고 지지고 볶고 난리를 피워도 상관없지. 자기 돈이 아니니까.”
“그러면서 생색은 자기들이 내고요.”
“다 그런 거지. 너도 나중에 사회 나가면 못 볼 꼴 많이 볼 거다.”
‘이미 많이 봤네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유백기 그 자식이 저 멀리 나가 버렸는데 무슨 수로 이기냐.”
“다른 팀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죠?”
“당연하지.”
“그분들도 유 선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요?”
“알음알음으로는 들어서 알고 있지. 너희 동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3, 4학년 선배들도 좋게 안 보고 있어.”
“그럼 됐어요.”
“뭐가 돼? 유백기 안티 팬클럽이라도 만들게?”
“비슷해요. 선배가 주선을 좀 해 주세요. 저는 발이 넓질 않아서.”
대찬은 씩 웃었다.
유백기에 대한 반감은 생각보다 심했다.
당한 사람만 반감을 가진 게 아니었다.
같은 동아리에서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소문은 발 없는 말이고, 나쁜 소문은 날개 달린 말이었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같은 부원끼리 뒤통수를 후려?”
그것이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선배들 역시 내키지 않는 방법으로 선두를 달리는 유백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거기에는 후배에게 패배했다는 열등감도 작용했다.
아마 유백기가 정정당당하게 임했어도 그들은 하극상의 유백기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대찬은 민승기에게 부탁해서 그들을 한데 모으도록 했다.
민승기와 김산하는 대찬의 말을 따라 주었다.
한 장소에 거의 60여 명을 헤아리는 부원들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대찬은 좌중에게 말했다.
“1학년이 건방지게 동기님들, 선배님들을 한자리로 모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최재한과 서원웅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쟤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낸들 아나…….”
대찬의 부탁을 듣고 부원들을 모은 민승기와 김산하도 살짝 부담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만일 대찬이 사고를 치면 그들 역시 연대책임을 져야만 했다.
김산하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찬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는 밀레니엄 키즈의 날 이후로 모두 한 가지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대찬은 모두의 아픈 구석을 건드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무기력해졌습니다. 우승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흰소리나 들으라고 부른 거냐? 패배자들끼리 자위하면서 술이나 먹자고?”
선배들 중 성격이 급한 쪽이 대찬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대찬은 점잖게 받았다.
“아닙니다.”
“그럼 뭔데.”
“승부는 정정당당해야 합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부는 반드시 응징되어야 합니다.”
대찬이 옳은 말을 하니 까칠하게 나오던 선배도 누그러진 투로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 선두를 달리고 계신 분의 방법은 정정당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룰을 위반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대찬은 웃으면서 좌중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선배, 동기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말하면 입이 아프지. 나쁜 새끼.”
“그놈은 동아리에서 쫓아내야 돼!”
“24기의 수치.”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개중에는 상욕도 심심찮았다.
단순히 그들의 정의감이 투철한 까닭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유백기에게 우승을 빼앗긴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위하며 스스로의 무능을 은폐하는 동시에 울분을 토할 과녁을 마련했다.
대찬은 그들의 심리를 정확히 건드렸다.
예상보다도 거친 반응이 흡족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배를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시간은 많지 않고, 돈도 없습니다.”
“쫓겨난 팀원은 다른 팀에 들어갈 수도 없어.”
“네. 이길 수가 없습니다. 대신 선두를 지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뭐?”
대찬은 크게 들숨을 마셨다.
기약했던 한 달이 지났다.
대회를 주도했던 선배들이 동아리방을 찾아왔다.
에피니키온 1기, 한긍윤 산업부 차관과 안두홍 NS 한국법인 사장.
그들을 앉혀 놓은 자리에서 밀레니엄 키즈 중 1명인 선배가 우승자를 발표했다.
“격차가 꽤 크게 났습니다, 선배님.”
“그래? 재학생 후배님들 중에 자네 같은 사람이 있나 보네.”
“저보다 낫죠. 그럼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한긍윤과 안두홍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발표를 맡은 밀레니엄 선배는 겸연쩍게 웃었다.
“일단 우승자는 24기 01학번 유백기 후배님 이하 15인입니다.”
“자, 박수!”
안두홍은 박수를 유도했지만 자리에 있는 경쟁자들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박수 소리가 무성의했다.
그러자 안두홍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허, 우승자를 축하해 주는 것 역시 패자의 미덕이야!”
“그럼그럼, 승복할 줄 알아야지. 그래야 어른이지.”
한긍윤 역시 안두홍의 역성을 들었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좀체 커질 기미가 안 보였다.
“요즘 애들은 저렇게 기백이 없어…….”
안두홍이 꿍얼거렸다.
대찬은 멀찍이 뒷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우쭐한 모습으로 상금을 타러 나가는 유백기의 뒷모습을 팔짱을 끼고 감상했다.
밀레니엄 선배는 유백기를 옆에 두고 말했다.
“24기 유백기 후배님은 무려 1천만 원을 벌어들였습니다. 2위와의 격차도 매우 큽니다.”
“이야! 이거 대단하구먼!”
생각보다 큰 액수에 안두홍과 한긍윤은 싱글벙글 웃었다.
안두홍은 안경을 치켜 쓰며 밀레니엄 선배에게 물었다.
“한 사람만 해서 천이면 상금이 어마어마하겠지?”
“저, 그게…….”
“얼마야? 빨리빨리 말해. 대종상 시상식처럼 뜸들이지 말고.”
“3천만 원인데…….”
“3천이나 벌었단 말이야? 이야! 대단하다, 대단해! 이래야 에피니키온이지! 그런데 3천이면 3천이지, 왜 말이 ‘…인데’로 끝나나?”
밀레니엄 선배는 난감한 시선을 안두홍에게 보냈다.
“마이너스 3천만 원입니다.”
“뭐, 뭐라고?”
치켜 올린 안두홍의 안경이 다시 낮은 콧대를 타고 쑥 밑으로 꺼졌다.
한긍윤도 놀랐다.
유백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 62명의 후배님들이 주어진 자본금 100만 원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수익 없이.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6천2백만 원의 손실이…….”
유백기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황급히 항변했다.
“당연히 자본금은 제외하고 창출한 수익만을 따져야죠……!”
안두홍은 놀라서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더니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지. 나는 분명히 말했네. 자본과 수익의 합산이 상금이 될 거라고. 숫자는 양수만 있지 않아. 음수도 있지.”
안두홍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받은 자본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그러니 수익만을 상금으로 인정하려면 돈을 추가로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돈은 원래 안두홍 일당이 ‘인 마이 포켓’한 쌈짓돈이었다.
그러니 유백기에게 옴팡 뒤집어씌우는 쪽이 이득이었다.
안두홍은 의자에 몸을 묻고 좌우로 흔들더니 안경을 치켜 올리며 유백기에게 말했다.
“규칙은 규칙이지. 유 후배님, 상금 수령하시게.”
“아아…….”
유백기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안두홍은 그쪽에는 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부원들을 향해 물었다.
“누구지? 누가 이 일을 주도했나?”
호의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두홍은 민승기를 바라봤다.
“어이, 회장.”
“네.”
“이건 분명히 집단 반란이야. 그렇지?”
“…….”
민승기가 대답하기 전에 안두홍은 경고했다.
“부디 아니라고 하진 말게. 뒤집어엎는 수가 있으니까.”
“네, 맞습니다.”
민승기의 대답은 당당했다.
“누구야, 주도자가.”
대찬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려고 했다.
비겁하게 선배들 뒤에 숨어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보다 민승기의 말이 빨랐다.
“접니다.”
“…뭐야?”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부원들을 모아 모든 자본을 고의로 소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좌중은 침묵 속에서 침을 삼켰다.
안두홍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지?”
대찬은 민승기보다 빨리 입을 열려고 했다.
선배들이 지급한 자본을 날려 버린 건 경위야 어찌 되었든 선배들의 미움을 사기에 족했다.
대찬은 결자해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산하가 선수를 낚아챘다.
대찬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유백기의 방법은 비열했습니다.”
민승기에게 가 있던 안두홍의 시선이 김산하에게로 갔다.
좌중의 긴장한 시선도 그랬다.
“비열하다니?”
“유백기는 비열한 방법으로 대회에 임했습니다. 동기와 후배들의 자본으로 이익을 창출한 후, 그 이익을 독점했습니다.”
“그것은 팀장의 합법적인 권한이었네만.”
김산하는 씩씩하게 반박했다.
“네. 그래서 저희도 축출된 팀원의 합법적인 권한으로 응징했습니다.”
“으음…….”
“저희는 자본을 모아 동아리 기금으로 기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학우들의 장학금과 동아리 운영자금으로 쓰겠습니다.”
안두홍은 더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