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22화 (21/556)

난 할 수 있어 22화

그대로 뒀다간 주정뱅이 뒤치다꺼리를 할 판이었다.

대찬은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소주병을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그 새끼가 개인적으로 아는 전문 투자자가 있대. 그 사람한테 종목을 추천받았거든.”

“네.”

“그런데 승기랑 내 돈은 다 날아가고 유백기 것만 올랐어.”

“돈을 잃으니까…….”

“나가래.”

김산하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유백기 굴러먹던 버릇이 어디 안 가는구나.’

대찬이 다 만든 보고서에 토씨만 몇 자 고쳐서 유백기가 윗선에 올린 일이 있었다.

크게 호평 받았지만 과실은 오롯이 유백기의 것이었다.

대찬은 김산하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죄송해요. 제가 누나랑 같은 팀 했어야 했는데.”

“…어?”

김산하는 물기 어린 눈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쫓겨난 팀원은 다른 팀에 못 들어가잖아.”

“수를 찾아봐야죠.”

“…됐어. 네 팀이나 잘 건사해. 무슨 수가 있겠어.”

“도울 거예요. 안 그러면 누나가 지금까지 실컷 욕한 그 새끼랑 다를 게 없잖아요.”

대찬은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들었다.

김산하에게 잔을 내밀며 씩 웃었다.

“제가 돕게 해 주실 거죠?”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던 김산하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애처럼 울면서 와락 대찬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 때문에 소주로 가득 찬 종이컵의 균형이 무너졌다.

소파에 소주가 끼얹어졌다.

대찬은 그제야 왜 소파에서 술 냄새가 나는지 알았다.

대찬은 김산하를 잠깐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풋, 웃으면서 품을 내주었다.

“나 울었다고 소문내면 진짜 죽는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안겼다곤 해도 되고요?”

김산하는 대찬에게 안긴 채로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왜 때려요!”

“그냥 오늘 일은 없었던 거야. 알았어?”

“그러죠. 없던 일로.”

“남들한테나 없는 일이란 거야. 너는… 기억해.”

대찬은 김산하에게 더 말하지 않았다.

대찬과 김산하는 조용한 동아리방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김산하에게 필요한 건 위로였다.

이러쿵저러쿵 설명과 분석, 논리적인 추론을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찬에게 필요한 건 후자였다.

유백기의 행동이 수상했다.

대찬은 최재한, 서원웅과 대학가의 후미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최와 서도 역시 수상하단 반응이었다.

“자기만 돈을 벌고 둘은 잃었다니. 뒤가 구린데.”

“그리고 자기가 주선한 전문 투자자가 짚어 준 종목이라 더 그래.”

대찬은 그들보다 유백기를 잘 알았다.

그들 말고도 대찬보다 유백기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다.

설령 그의 부모라 하더라도 그 추악하고 비열한 속내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할 거다.

“민 선배랑 산하 누나는 팽 당한 거야.”

“민 선배는 민 선배고, 김 선배는 산하 누나야? 뭐야, 둘이?”

최재한은 젯밥에 더 관심을 뒀다.

대찬은 혀를 차며 그의 쓸데없는 의문을 외면했다.

“회장인 민 선배,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대외국장인 산하 누나, 둘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지.”

“효과는 있었어. 01학번 절반 이상이랑 02학번 거의 대부분이 그 팀에 들어갔으니까.”

서원웅이 대찬의 말을 받았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 선배랑 산하 누나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던 거야.”

최재한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일부러 떨어질 주식을 그 두 사람한테 넘겼단 거야?”

“아주 유력하지.”

“유 선배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주식이 떨어질 걸 어떻게 알겠어.”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전문 투자자라는 사람이 그 사람 삼촌이거든.”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첫 번째 삶, 유백기는 자기 삼촌이 전문 투자자로 떼돈을 벌었다고 종종 으스댔다.

삼촌이 추천해 준 종목에 500만 원을 부었더니 몇 년 만에 3배로 불었다는 레퍼토리는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렇기에 유백기를 도운 그 전문 투자자가 그의 삼촌이라는 걸 쉽게 추측해 냈다.

아무리 신통한 투자자라 해도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악재로 점철되어 폭삭 망할 게 뻔한 ‘개패’는 알 수 있다.

유백기는 그렇게 삼촌의 안목을 빌려 민승기와 김산하에게 시한폭탄을 안겼을 것이다.

폭탄은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누구와 이익을 나눌 생각이 없는 거야.”

대찬의 말에 서원웅이 의문을 표했다.

“고작 대회에서 한 번 이기겠다고 사람들하고 척을 진다고?”

“고작 대회 한 번이라기엔 상금이 크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후배의 밀고 당기는 인맥이 에피니키온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동기의 뒤통수를 치는 건 그 본질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서원웅의 의문은 정당했다.

대찬은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풀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애초부터 선배들을 팀원으로 받지 않은 거야.”

“아…….”

“그리고 민 선배랑 산하 누나도 구실을 만들어서 내쫓은 거지.”

“그 둘은 그냥 유 선배 말에 동의했을 뿐이잖아?”

“동의하는 순간 책임은 발생해. 도의적으로는 아니지만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유백기는 교묘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김산하의 잘못이었다.

유백기는 선배로서 모범을 보이자고 했다.

반면 민승기와 김산하는 마지못해 동참했단 인상이었다.

게다가 유백기의 주식은 폭등은 아니더라도 제법 재미를 본 반면에 둘은 폭삭 망해 버렸다.

유백기는 동기들과 후배들이 민승기와 김산하에게 반감을 갖도록 했다.

“그러니까 민 선배와 산하 누나를 짐짝 취급당하도록 언론플레이를 한 거야.”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서원웅은 어처구니없단 얼굴이었다.

‘그런 놈이 다 있더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 떠나서 철저히 그 사람 개인의 이득만 따진다면 영리한 방법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사람을 잃는데…….”

“몇 사람 잃고 몇 사람 얻겠지, 잘 풀린다면.”

최재한은 툴툴거렸다.

“그런 망나니짓을 했는데 어떻게 사람을 얻어?”

“냉정하게 말하면 민 선배나 산하 누나나 그 사람 인생에 크게 득 되는 사람은 아니야.”

“하긴 엄밀히 말하면 같은 동아리 친구일 뿐이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그 사람이 우승을 거머쥐면 대번에 선배들의 눈에 드는 거지.”

“그리고 그 선배들은 유백기 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고?”

“커다란 도움보단 결정적인 도움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 100명을 헤아리는 부원들 중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 자체로 스펙이야.”

“스펙?”

2010년대에는 잡초처럼 흔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찬은 즉시 정정했다.

“취업 문턱을 넘는 데 결정적인 이력이 될 거야.”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렇네…….”

“아마 선배 둘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 사람… 탐욕 덩어리거든.”

대찬은 김치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거액의 상금을 햇병아리들과 절대 나누지 않을 것이다.

에피니키온에 있어 선배는 수익이요, 후배는 지출과 같았다.

유백기는 단순하게 생각했겠다.

수익은 늘이고 지출은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인생 그렇게 간단하지 않단 걸 알려 줄게, 유백기.’

대찬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압도적인 자본을 지닌 유백기의 팀은 저만치 앞서 나갔다.

대찬, 최재한, 서원웅도 나름대로는 노력했다.

때는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던 때, 관련된 상품을 발주해 인터넷을 통해 판매했다.

수익은 쏠쏠했지만 유백기를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수익률로 따지자면 대찬이 뒤지지 않았지만 절대적인 액수는 비교 불가였다.

유백기는 수십 명분의 자본을 주식에 쏟아부었다.

천리안을 지닌 전문 투자자께서 보우하사 자산은 견실하게 불어났다.

유백기는 처음부터 과실을 후배들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김산하는 시작에 불과했다.

민승기와 김산하를 도려 낸 유백기는 더 거칠 것이 없었다.

잔챙이는 더 쉬웠다.

굳이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면서 내칠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구슬리면 그만이었다.

유백기는 같은 팀의 후배를 하나씩 일대일로 만났다.

그는 후배와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팀에 있는 24기들 다 내보낼 거야. 동참해.”

“네?”

뜬금없는 선언에 후배는 놀랐다.

“너한테도 이득이 될 거다.”

“…어떻게 그렇죠?”

“너는 이 대회가 단순히 장학금이나 몰아주자고 만든 거 같아?”

유백기의 말에 후배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니면요?”

“이 대회는 우리 에피니키온의 적통을 뽑는 테스트야.”

후배는 곧장 알아먹지 못했다.

유백기는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선배들이 단순히 재밌자고 이런 일을 벌이겠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재학생 중에 집중적으로 키워 줄 재목을 찾겠단 거야.”

“그,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나는 그 적통이 되고 싶어. 그러려면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줄 필요가 있어.”

“그게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

세상물정 모르는 후배의 말은 날것이었다.

유백기는 피식 웃었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

“투자라뇨?”

“다 앞에서 끌어줘야 크는 거야. 이번에 날 도와주면 다음 차례는 네가 되는 거지.”

“그런데 굳이 24기 선배들을 내칠 필요까지 있을까요? 어차피 팀장은 선배님인데요.”

꼬박꼬박 토를 다는 후배가 유백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대한 친절한 말투를 유지했다.

“밋밋한 우승은 안 돼.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지. 선배들은 냉혹한 스트롱맨을 원한다고.”

유백기는 에피니키온의 1기 선배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잘 알았다.

그들은 철저히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기적인 승리의 역사를 언론에 미담처럼 거리낌 없이 자랑했다.

선배들은 자신의 닮은꼴을 후계자로 육성하고자 할 것이 분명하다는 게 유백기의 판단이었다.

“내가 24기 중에서 압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면 다음으로는 확실히 널 밀어 줄게.”

보증 없는 구두 약속이었고, 허황된 공수표였다.

당근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 반신반의하는 후배에게 유백기는 채찍도 보여 주었다.

“굳이 이걸 안 받겠다면 뭐, 너도 그냥 방출하면 그만이야. 팀장의 합법적인 권한으로.”

그 말에 굴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유백기는 그런 식으로 후배들을 발아래에 뒀다.

따르지 않는 강골들은 포섭한 후배들을 이용해 몰아냈다.

적어도 민승기와 김산하는 동기라는 걸 고려해 절차적 정당성을 따졌지만, 후배들 상대로는 그만큼 정성스러울 필요도 없었다.

불만을 제기한 후배에게는 분란을 야기하는 못된 놈이란 딱지가 붙었다.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후배에게는 싸가지 없는 놈이란 딱지가 붙었다.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후배에게는 말 많은 놈이란 딱지가 붙었다.

그런 딱지를 구실로 하여 유백기는 그들을 내쫓았다.

나가는 사람 손에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100만 원만 쥐여졌다.

그 자본으로 창출한 수익은 고스란히 유백기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팀에 폐를 끼쳤지만 선후배의 정이 있으니 자본은 보존해 주는 거야. 고맙게 여겨.”

유백기는 쫓겨나는 팀원의 뒷모습에 대고 이렇게 이죽거렸다.

쭉정이들의 찬성으로 명분은 충분했고, 팀장의 권리는 합법적이었다.

반박은 공허했고, 항의는 도로 삼켜졌다.

김산하는 복장이 터졌다.

“유백기 그거 미친 거 아니야? 이럴 줄은 몰랐어, 진짜.”

“우리는 코 푼 휴지라 이거지.”

김산하의 말을 듣는 민승기도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앞으로 우리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앞으로 당분간 볼 일이 없거든.”

“뭐? 왜?”

“이번 학기 끝나고 그 자식 군대 가기로 돼 있어.”

“미친.”

김산하는 고개를 젖히며 탄식했다.

“야, 못 참겠다.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

그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산하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껏 연기를 빨아들이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누나, 안녕하세요.”

대찬이었다.

김산하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던 담배를 뺐다.

“어, 어, 그래.”

“담배 피우시는 줄은 몰랐네요.”

“담배 피우는 여자 별로냐?”

“아뇨. 저도 피우는데요.”

“다행이네.”

“네?”

김산하는 얼굴을 붉히고 급히 정정했다.

0